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49화 (49/96)

#49

역시 넓구나.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실 내부는 생각보다 더 깔끔했다. 벽에 걸린 시계 하나, 액자 두 개, 그리고 한가운데 놓인 침대. 안쪽에 드레스룸이 별도로 있어서인지 수납공간이라고 할 만한 건 침대 옆에 있는 협탁 하나뿐이었다.

물건 대부분은 어두운 톤으로만 되어있었고 침구만 흰색이었다. 공간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가 따뜻해 보이진 않지만 매력적이었다. 그야말로 딱 강세현다웠다.

“뭐해?”

들어오라고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강세현의 기세에 눌려 억지로 걸음을 뗐다. 하지만 퀸사이즈 침대 두 개를 붙여놓은 것만큼 커다란 침대 앞에서 다시 멈칫했다.

진짜 크다. 바보같이 그걸 보며 넓으니까 둘이 자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서 있지 말고 얼른 누워.”

“어……. 알았어.”

강세현의 재촉에 느릿하게 침대 위로 올라갔다. 어느 쪽에 누워야 할지 몰라 그냥 발이 가는 대로 올라가서 서둘러 이불을 덮었다. 괜히 나만 긴장한 것 같았다.

“먼저 자고 있어.”

그렇게 말한 강세현은 침대 아래 들어오는 간접조명을 제외하곤 불을 전부 껐다. 그리고 누워있는 내게로 와 머리를 두어 번 쓸어넘기고 사라졌다.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내 다시 떴다. 나가는 강세현의 뒷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속으로 외쳤다.

정말…… 다행이다.

먼저 자고 있으라고 했으니까, 먼저 자도 되겠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발 혼자 있고 싶었다. 일단 내가 잠들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 같아서 안심했다.

강세현이 매일 잠을 자는 방. 그리고 잠드는 침대.

수십 번 왔었지만, 밖에서만 보던 방이었다. 슬쩍 안을 본 적도 있지만, 들어갈 일이 없으니 자세히 보진 못했었다. 이곳에 누워있다는 게 말할 수 없을 만큼 어색했다.

딱히 무슨 짓을 할 거라고 예상한 건 아니지만, 제대로 된 연애를 한 적 없으니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잠든 적도 없었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특히나 그 상대가 강세현이 될 줄은 더더욱 몰랐기에 하루 만에 바로 적응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러므로 먼저 자고 있으라는 상대의 말이 이렇게 기쁠 수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서운해해야 했을까?

하지만 고작 등을 두드리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어색해 죽겠는데, 도저히 한 침대에 나란히 누운 강세현과 나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 연애는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폭신한 침구는 쉽게 졸음을 불렀다.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였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인지 잠이 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을 뒤로하고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들었다.

***

잠깐 눈이 뜨였다.

그리고 다시 잠을 잘 수가 없다.

쿵. 쿵. 심장 소리가 시끄러워서.

목덜미에 고른 숨이 닿았다. 허리를 감싸 안은 단단한 손바닥이 델 듯이 뜨거웠다. 온몸을 휘감은 온기 때문에 신경은 온통 등 뒤로 가 있었다.

캄캄했던 밤은 어느새 뿌연 새벽이 되어있었다. 조금 전 비몽사몽 했던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이러다 진짜 이 상태로 아침이 오는 걸 보게 될 것 같았다.

미치겠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잠이 들 때까지만 해도 혼자였는데 눈을 떠보니 둘이었다. 강세현의 침대니까 침대 주인도 함께 인 게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이런 자세로 자고 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딱, 달라붙은 상태로.

의식하기 시작하자 있던 잠도 달아났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30분쯤 지났을까, 여전히 정신은 지나치게 맑았다.

침대도 넓은데 굳이 꼭 이렇게 자야 하는 걸까.

그나마 다행인 건 이대로는 강세현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면 표정 관리가 절대 안 될 것만 같았다.

혹시 내 심장 소리가 밖까지 들리는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는데.

“왜, 잠 안 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툭.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아무 말도 안 나온다더니. 말뿐만 아니라, 잠깐 숨도 멎었다. 잠결에 무심하게 뱉은 말투나 유독 낮게 깔린 음성은 충분히 그럴 만했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한 번 더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더 자.”

그렇게 말한 강세현은 내 목덜미에 제 뺨을 마구 비비곤 다시 잠이 들었다. 몇 초 후, 다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왜. 어째서 너는 괜찮은 거냐.

당장이라도 따져 묻고 싶었다. 아무리 잠결이라지만 강세현의 행동은 너무 자연스러웠고, 나와는 달리 너무나 쉽게 다시 잠에 빠졌다.

결국, 꼬박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한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역시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월요일서부터 조금씩 안 좋아지더니 어제 술을 마시고 나서 대충 알았다. 그냥 가벼운 피로가 아니구나, 하고. 거기다 제대로 잠까지 못 잤으니 결국엔 더 안 좋아졌다.

강세현: [언제 나갔어?]

나: [7시 반]

강세현: [오늘 첫강의 9시 아니었어?]

나: [눈이 일찍 떠져서 그냥 왔어]

강세현: [그럼 깨우지]

나: [너무 곤히 자길래]

7시 반이라는 건 거짓말이었다. 기다리던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거의 도망치듯 강세현의 집을 나왔다. 7시가 막 지났을 때였다. 그리고 나보다 늦게 잠든 강세현은 그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강세현: [그래서 지금 어딘데?]

나: [도서관]

나: [미리 조사할거 있어서]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조사는 무슨. 한 시간 전부터 텅텅 빈 도서관 2층, 맨 안쪽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강세현: [그럼 방해안할게]

강세현: [수업 갈때 연락해]

다정한 메시지에 양심이 쿡 찔렸다.

딱히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끌어안고 잠을 잤을 뿐이었다. 포옹이라면 이전에도 했었고, 겨우 그 정도를 가지고 이렇게 당황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비정상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도저히 아무렇지 않게 강세현을 볼 자신이 없었다. 뭔가 어색하고 민망했다.

이건 뭐 애도 아니고.

매번 이렇게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

계속 친구로만 지내던 놈과 연인이 된다는 건,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그런 연애의 과정을 전부 함께해야 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스킨십에 관한 건 아예 간과하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호들갑이겠지.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나는 지나칠 정도로 앞서가고 있었다.

***

“성하야.”

“아, 형.”

“너 상태가 왜 그러냐. 피곤해?”

점심시간에 만난 기재 형은 두꺼운 목도리를 칭칭 두르고 있었다. 뒤이어 자리에 앉는 준성 형 역시 몸이 배나 더 커 보이는 뚱뚱한 패딩을 입고 있었다. 오늘도 역시 시카고의 추위는 피할 수가 없었다.

“잠을 잘 못 자서요.”

“그런 것치고는 좀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감기 아냐?”

“그런 것 같아요. 좀 멍해요.”

“맞네. 곧 목소리도 간다, 너. 열은 없어?”

“원래 아파도 열은 잘 안 나요.”

“억울하겠다.”

옷에 닿는 살갗이 이유 없이 아팠다. 며칠 전부터 징조를 보이더니 역시나 몸살이 오기 직전이었다. 한기가 뼈까지 드리우는 걸 보면 무조건 감기였다.

“좀 더 두껍게 입지. 목은 왜 내놓고 다녀.”

몸이 둔해 보이는 걸 싫어해서 지나치게 두꺼운 옷이나 목도리를 걸치는 일을 피해왔다. 웬만하면 얇은 옷을 여러 겹 껴입거나 목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선 차라리 목이 올라오는 니트를 입었다.

오히려 이렇게 입는 게 더 따뜻할 텐데 남들이 보기엔 그렇지 않은지 감기에 걸릴만하다며 형들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내가 괜찮다고 했는데도 기재 형은 굳이 자신이 하고 있는 목도리를 벗어 억지로 내게 건넸다.

“밥 다 먹고 꼭 두르고 가.”

반협박과 같은 호의를 무시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기재 너는 이번 주에 어쩔 거야? 기현이 새끼 이번 주에 못 간다니까 겁나 삐졌던데.”

“다른 때는 안 그러더니 왜 갑자기 그런대?”

“자기 졸업하자마자 같이 안 놀아주는 것 같아서 존나 서운하대. 개강하자마자 왕따시키는 거냐고.”

“웃긴 놈. 어차피 난 약속 없어졌으니까 가야지. 넌 약속 가라. 어떻게 잡는 건데 파투 내면 넌 내 손에 죽는다.”

기재 형은 이번 주 토요일에 있을 준성 형의 소개팅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와. 나 이런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만나서 무슨 얘기 해야 하냐.”

“그냥 이것저것 묻고 대답하고 그런 거지, 뭘.”

“표정 관리 망할 것 같은데. 너무 좋으면 바보처럼 실실 쪼갤까 봐 걱정.”

“음……. 쪼갠다고 다 바보 같진 않을 거지만 넌 좀 그럴지도.”

“넌 왜 하는 말마다 재수 없지. 존나 신기하네.”

“네가 더 신기해.”

둘 다 신기한데.

자주 어울리는 여럿 중에서도 전공이 같은 기재 형과 준성 형은 특히나 더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았다. 학교에서도, 밖에서도 그렇게 붙어 다니면서 매번 이렇게 대화가 끊이질 않는다는 게 신기했다.

“근데 진짜 연애를 너무 안 했더니 다 까먹었어. 설레서 심장 터지면 어쩌냐. 처음 연애할 때 그랬었는데.”

처음 연애하면 전부 나처럼 이런 건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준성 형이 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의문을 제기할 뻔했다.

“난 지금도 그래.”

“뻥 치지 말고, 이 나쁜 새끼야.”

“진짠데? 얼굴만 봐도 설레, 아직도.”

“그런 놈이 하루아침에 헤어지고 남처럼 구냐?”

“그거랑은 별개지. 여자친구일 때 설레는 거니까.”

“그게 어떻게 별개 되냐?”

“자, 잘 들어봐. 나는 그냥 썸만 탈 때보다 사귀고 나서 더 설레거든? 그게 왜인지 알아? 사귀고 나면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여자친구가 되는 거잖아? 나도 그 사람의 남자친구가 되는 거고. 그 소속감에서 주는 설렘이 있어. 근데 헤어지고 나면 더는 그 소속감을 느낄 수가 없으니까 별개 되는 거지.”

“와. 개떡같은 논린데 은근 설득당하네. 진짜 나를 경멸한다.”

자꾸만 대화의 주제가 지금 나와 차곡차곡 맞아간다는 게 기분이 나빠질 지경이었다. 형들이 나누는 쓸데없는 대화에 나와 강세현을 대입한다는 자체가 어이없었다.

입맛이 없어 일찌감치 먹던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오늘따라 카페테리아도 평소보다 더 추운듯했다.

오늘 새벽, 맞닿았던 따스한 살결이 그리워졌다. 낯선 손길이 두려워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아무리 생각해도 난 연애에 소질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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