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50화 (50/96)

#50

오늘은 끝나고 곧바로 일을 가는 날이었다. 몸 상태도 좋지 않을뿐더러 혹시라도 감기를 옮길까 봐 일부러 강세현에게는 미리 오지 말라고 못을 박아뒀다. 좀 피곤해서 쉬고 싶다고 하자 별말 없이 알겠다는 답이 왔다.

마지막 강의가 끝나고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강세현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강세현: [이번주에 가는거지?]

강세현: [준성형이 너랑 기재형은 온다던데]

혹시나 해서 단체 채팅창을 확인하자 밀린 메시지가 수십 개나 있었다.

서기현: [아가들아 보고시ㅍ다]

박준성: [개소리하지마]

서기현: [ㅅㅂ너무 냉정하네]

서기현: [차가운 우리자기]

박준성: [ㅈ]

박준성: [저게진짜도랏?]

장기재: [ㅋㅋㅋ]

서기현: [근데 박준성 너진짜 안옴? 이번주]

박준성: [ㅇㅇ나대신 기재랑성하가 니자기 해줄거다]

서기현: [야 장기재는여친잇고 성하는여보잇자나]

박준성: [헤어졌대]

서기현: [헐]

서기현: [세현이랑 성하 이혼햇냐]

박준성: [ㄴㄴ 장기재만ㅋ 여친생일이었는데 헤어졋다고 참석한대]

박준성: [성하는부부동반]

빅준성: [ㅋㅋ]

서기현: [에이ㄱ난또 강세현 드디어 차인줄]

서기현: [성하야 아빠는끝까지 이결혼반대한다]

당사자인 우리만 빼고 즐거운 대화는 그러고도 한참 이어지고 있었다. 보다가 피식 웃음이 날 정도로 유치한 대화였다.

나: [어 가야지]

막상 보내고 나니 사귀게 된 이후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는 건 처음이라는 걸 알았다. 둘이 있을 때도 간혹 표정 관리를 하기 힘들었으니 왠지 웃어야 할 순간에 웃지 못할 것 같아서 걱정이 앞섰다. 그렇다고 형들이 아무렇지 않게 치는 장난을 그냥 웃어넘기기엔 또 양심이 매를 맞을 것 같았다.

산 넘어 산이구나.

곧바로 울릴 줄 알았던 핸드폰이 웬일로 잠잠했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캠퍼스에서 부는 칼바람 때문에 살이 아렸다. 예전에 서른 살이 된 사촌 형이 아직도 적응하지 못했다고 말한 기현 형의 말이 공감이 간다. 여전히 시카고의 추위는 화가 날 정도로 지독했다.

강세현에게 연락이 온 건, 중앙 건물을 통과해 주차장으로 가는 건널목에 있을 때였다.

“어.”

- …….

분명 늦지 않게 전화를 받았는데 수화기 저편으로부터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액정에는 여전히 통화 시간이 카운트되고 있었다.

“……여보세요?”

- …….

혹시 핸드폰이 잘못 눌러진 건가 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불러보고 끊으려 한 순간,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 목소리는 괜찮네.

“……뭐야, 그건 무슨 말이야?”

- 감기라며.

“아.”

내가 말하진 않았으니 범인은 기재 형과 준성 형, 둘 중 하나였다. 아직 읽지 못한 대화 중 그런 얘기가 나온 것 같았다.

- 말을 해야 알지. 그냥 피곤하다더니.

“피곤한 거 맞아.”

- 피곤하기만 한 건 아니겠지. 더 중요한 말이 빠졌잖아. 아파서 몸 안 좋은 거.

“……어쨌든 오지 마.”

- 간다고 말도 안 했는데.

“안 해도 알겠으니까 오지 마.”

다음 말을 예상했다. 분명,

- 싫어.

그럼 그렇지.

“아픈데 누구 오면 불편해서 못 쉬어.”

- 그러니까 들렀다만 갈게. 그러면 되지?

“아니. 그건 맘이 불편해.”

- 왜. 신세 지는 것 같아서?

“어.”

아픈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시카고로 온 뒤 지금까지 총 여섯 번, 그중 강세현이 한국에 있었던 때를 제외한 다섯 번은 매번 약이나 먹을 것을 들고 찾아왔다. 그냥 단순 감기약 말고도 비타민이라든가 몸에 좋은 차 같은 걸 사 가지고 와선 정말 물건만 건넨 후 돌아갔다.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와 주는 게 기쁘면서도 미안했다. 약 같은 건 흔히 보이는 약국에서 나도 충분히 살 수 있는데 부러 그렇게 해 준다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 우리 사이가 달라진 지금도 그래?

“…….”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의 관계가 친구에서 연인으로 바뀌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친구일 때 부담스러웠던 일이 연인이 되었다고 당장 괜찮아지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맞다고도 대답하지 못했다. 왠지 그렇게 답해 버리면 좋은 말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그러면 내가 뭘 해 줄 수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 해 줘.

“꼭 해 줄 필요 없어.”

- 해 주고 싶은 거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하는데.

목소리에서부터 불만이 느껴졌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이런 걸 전부 다 따지며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알았어. 이렇게 심각할 줄 알았으면 거절 안 했어. 알았으니까 와.”

분명 허락했는데도 수화기 너머로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늘 옆에서 한숨 쉬는 걸 보기만 하다가 막상 그 대상이 되었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강세현이 그렇게 한숨을 쉬게 만든 건 나였다. 처음부터 그냥 알겠다고 할 걸 그랬나.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 일은?

“……가야지.”

또 한숨 소리. 고맙게도 상대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목요일은 바쁜 날이고, 그렇지않아도 인원이 부족해서 대신할 사람이 없다고 하자 다시 잠깐 정적이 머물렀다. 좀 일찍 마칠 수 있으면 일찍 끝낼 예정이라고 덧붙이자 그제야 대답이 들려왔다.

- 일단 밤에 잠깐 갈게.

전화를 끊은 후,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아프니까 와 달라고 했을까?

강세현이 좋다. 그건 확실한 사실이다. 하지만 강세현과의 연애는 어렵다. 우습게도 남자끼리의 연애라는 사실보다 친구에서 갑자기 연인이 되고 나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에 대한 고민이 더 많았다.

공부할 수도, 어디 가서 시험해 볼 수도 없는 연애.

잘해 나갈 수 있을까.

***

기다란 다리가 찬찬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강세현은 나 대신 집을 지키고 있었다. 다만 오늘은 그냥 덩치 커다랗고 잘생긴 개가 아니었다. 덩치 크고 잘생겼으나……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다가온 강세현은 내 얼굴을 슥 한번 쳐다보고 인상을 썼다. 그렇지 않아도 까칠했던 얼굴이 이제는 험하게 변했다.

“얼굴이 왜 이래.”

“어제도 봐 놓고 뭘 물어. 나 원래 이렇게 생겼어.”

“그런 뜻 아닌 거 알지.”

“그래. 근데 좀 이따 이야기하면 안 될까. 나 일단 좀 씻고 올게.”

왠지 입을 열면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 급하게 말을 잘랐다. 다행히 강세현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있다가 나와.”

욕실로 들어가자 욕조에 물이 받아져 있었다.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물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제 강세현의 다정함에도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못 한 감동이었다.

친구와 연인의 차이점은 이런 거구나.

눈에 보이는 다정함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오랫동안 욕조에 있다가 노크 소리에 후다닥 샤워를 끝내고 나갔다. 거실 테이블 위에 갈증을 날려줄 음료가 놓여있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배는 안 고파?”

“별로 생각 없어.”

멍하니 소파에 앉아 차를 마셨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나니 계속 괴롭혔던 한기는 사라지고 한결 상태가 좋았다. 피곤하긴 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들어가서 누워. 전기매트 켜놨으니까 따뜻할 거야.”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강세현이 컵을 내려놓자마자 마치 그 순간만 기다린 사람처럼 곧바로 나를 일으키는 바람에 결국 방으로 갔다. 시키는 대로 침대에 눕자 따뜻하고 폭신한 침구가 몸을 감싸 안았다. 아픈데도 새삼 행복을 느꼈다.

이럴 거면 왜 오지 말라고 했을까.

조금 후 강세현은 물잔과 약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약통 말고도 손에 든 작은 상자가 무엇인가 했더니 미리 약을 나눠 담아놓은 휴대용 약통이었다. 입을 꾹 다문 채 다소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가방 안에 그걸 집어넣고 있었다.

강세현이 이렇게 다정히 대하는 상대가 얼마나 부러웠던가. 그런 생각이 들자 잘해 나갈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게 다 바보같이 느껴졌다.

“받는 게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이러다 진짜 버릇 나빠지겠다.”

“넌 좀 나빠져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왠지 오늘 일을 두고 한 말 같아서 뜨끔했다.

“더 필요한 거 없지?”

“없어.”

“그럼 갈 테니까 이제 쉬어.”

벌써? 라고 물을뻔했다. 분명, 있으면 불편하다고 한 사람은 나면서.

“아까 나한테 할 말 있었던 거잖아. 지금 해.”

다른 말로 가려는 강세현을 붙잡았다.

“아프니까 나중에.”

“아프니까 지금이지. 지금 말하면 뭐든 다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아.”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지금이라면 강세현이 원하는 건 다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강세현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난 사양 안 할 건데.”

“어. 안 해도 돼. 그러니까 말해 봐. 나한테 불만 있잖아.”

“있었는데 없어졌어.”

“그게 어떻게 갑자기 없어져.”

강세현은 조금 전까지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데 지금은 또 괜찮아 보였다. 아니, 오히려 좋아 보였다. 날 보는 눈빛이 너무 다정하니까.

그런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얼굴 보니까 그렇게 되네.”

이 정도면 강세현의 솔직함이 무섭다.

@MINT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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