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51화 (51/96)

#51

“아까는 얼굴 보고 뭐라고 하더니.”

“말은 바로 해. 뭐라고 한 게 아니라 걱정한 거야. 그러고 일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화나.”

평소와 같은 말투지만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내 안색을 살핀 강세현은 안타까운 눈을 했다.

“아픈데 이런 이야기 하면 뭐가 좋다고. 그냥 나중에 해.”

등을 돌리려 하는 강세현을 불렀다. 아쉬움에 한 번 더 그를 붙잡았다.

“그래도 말해 봐. 너 이대로 가면 마음 불편해.”

“신세 지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왜 불편해.”

“……이거 봐. 그 말, 싫은 거잖아.”

“어. 싫어. 전엔 괜찮았지만 지금은 싫어.”

목소리가 퍽 단호했다. 갑자기 왜 싫은 거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당연히 그다음은 바뀐 관계에 대한 설명이 따라올 게 분명했다.

“다 들어준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잠깐 앉아서 얘기하고 가.”

“무슨 얘기.”

“불만이나 요구사항.”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대고 앉았다. 그러자 짧은 한숨을 한번 내쉰 강세현은 내가 시키는 대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내가 이렇게 오는 게 왜 나한테 신세 지는 게 되는지 설명해 봐. 딱히 폐가 될 일도 없는데.”

“도움받는 것도 신세 지는 거야.”

“난 도와준다고 생각 안 하는데. 내가 도와준 적이 없는데 넌 왜 그렇게 생각해.”

“…….”

“앞으론 신세란 말 금지.”

“알았어.”

“그런 생각도 금지.”

“그건 좀…….”

“왜.”

“생각이 마음대로 되냐?”

“왜 안 돼. 뭐든 빚이라고 생각하는 걸 고쳐. 차라리 고맙다고 생각해.”

“고맙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거고. 근데 나 때문에 안 해도 되는 일을 하는 건데 미안한 마음도 들지.”

“오히려 상대가 좋아서 한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미안해할 필요 없어.”

“이미 너무 빚을 져서 그게 잘 안 되는 거야.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특히 너한텐.”

“다른 사람한테도 하지 말고 특히 나한텐 더 하지 마.”

내 말을 제대로 듣고는 있는 건지.

머릿속으로 자연스레 떠오르는 게 하지 말라고 해서 안 되는 게 아닌데. 그걸 아는 놈이 무작정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근데 어차피 너도 나 빚쟁이라고 저장해 뒀잖아.”

계속 억지를 부리던 강세현은 그 말에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인상을 쓴 채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모습이 왠지 싫었다.

“알겠어. 그렇게 할 테니까 인상 좀 펴라.”

짜증 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자 이번엔 또 뭐가 맘에 들지 않는지 오히려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그것도 금지.”

“……뭘 말하는 거야?”

“대충 넘어가는 거.”

“그런 적 없는데.”

“방금 그랬어. 낮에 어쩔 수 없이 오라고 할 때도 그랬고. ‘일 복잡하게 만들 바에야 그냥 내가 참는다.’ 그렇게 생각했지?”

반은 사실이었다. 어차피 나만 알겠다고 하면 끝일 이야기를 더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알겠다고 했는데 그걸 귀신같이 알아챘다.

“참는다는 생각까진 안 했어.”

“대충 좋게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은 했겠지.”

“……모른 척 좀 해라.”

“지금까지 모른 척해 준 거야. 친구로 지내는 몇 년 동안. 근데 이제 안 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끝까지 얘기해야지. 양보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았는데 어떻게 그래.

뭐든 빚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조건 양보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 이렇게 살아야만 했으니까 생긴 나쁜 버릇이었다.

내 것이 아닌 건 모두 다 빚이다. 이유 없는 도움은 없다. 남에게 받은 호의는 무조건 돌려줘야 한다. 지금까지 새아버지를 통해 배운 건 그런 것뿐이었다. 이미 어릴 적부터 나 하나만 참고 넘어가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상황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제 와서 그런 생각들이 쉽게 고쳐질 리 없었다.

“오히려 넘어가 주는 게 너한테도 좋은 거 아냐?”

“딴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까지 그러는 건 싫어.”

물론 이것도 우리 관계가 변했기 때문이겠지.

이미 서로를 잘 알고 있고, 서로에게 익숙해져 있어서 과거 연애에 관련된 일이나 스킨십을 제외하곤 지금까지와 별다를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강세현의 요구대로라면, 앞으로는 상대가 무얼 해 주든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야 하고, 상대에게 맞추는 것 없이 최대한 끝까지 우겨야 한다. 누가 봐도 강세현에겐 전혀 좋지 않은 일인데 왜 굳이 강요해서 손해 보는 일을 하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난 가끔 널 이해하기 힘들더라.”

“가끔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걸. 보통은 아예 이해 못 하겠다고 하니까.”

“너한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어? 형들이 그래?”

“아니. 우리 가족.”

“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럼 불만은 그게 다야?”

“아니.”

“와. 너 내가 이상형이라던 거 뻥이지?”

피식, 하고 얇은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이상형이랑 상관없는 거야.”

그렇게 말한 강세현은 다음 말을 꺼내기까지 망설임이 없었다.

“주는 대로 받지 마.”

“……그건 또 뭐냐.”

부담 갖지 말고 다 받으라더니, 이제는 주는 대로 받지 말라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강세현은 나를 보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동시에 기다란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책상 의자였다. 정확히 말하면 의자 헤드에 걸쳐진 기재 형의 스트라이프 목도리였다.

“저게 왜 여기 있어.”

“잠깐 빌린 거야.”

“어쨌든.”

“괜찮다고 했는데 추워 보인다고 막무가내여서 어쩔 수 없었어. 감기기도 했고.”

“그러니까 오늘은 봐주는 거야.”

참 어울리지 않는 독점욕이었다. 본인이 주는 건 전부 받으라고 하면서 남의 것은 빌리는 것도 안된다니.

진짜 날 좋아하는구나.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강세현은 오히려 쿨한 편에 속했었으니 새삼 놀라웠다. 그러고 보니 질투하는 것도 최근에 알게 된 거였다.

불과 10분 전까지만 해도 또렷했던 정신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조금씩 흐릿해졌다. 등이 따뜻해서 그런지 노곤하게 잠이 오기 시작했다. 눈만 감으면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고 싶지 않아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눈을 감으면 강세현을 볼 수 없으니까.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자 그걸 본 강세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다 했으니까 자. 가 볼게.”

그 말을 듣고 미적미적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강세현은 흐트러진 이불을 여며주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손길을 멈췄다.

“아. 너 내일 일은?”

“……가야지.”

그 말을 들은 강세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불만 있다고, 그 한숨 쉬는 것 좀 고치는 게 어떻겠냐고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귀를 의심할 만한 말이 들려왔다.

“내가 대신 갈까.”

……와.

“나 엄청 사랑 받나 본데.”

말은 안 되지만 기뻤다.

“그걸 이제 알았어?”

“어.”

“왜 지금 알았어, 나름 잘해 준다고 생각했는데.”

“잘해 주긴 하지. 근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그럼 지금부터 알아.”

강세현은 날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툭, 내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머리를 쓰다듬는 건 최근에 생긴 버릇 같았다. 오히려 잘했다고 쓰다듬어줘야 할 사람은 나 같은데.

“강세현이랑 사귈 만하네.”

큰맘 먹고 내뱉은 진심에 강세현은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말해 봐.’ 그렇게 말하곤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나랑 사귀는 게 어색해 죽을 것 같은데도?”

“……알고 있었네.”

“모르는 게 이상해. 오늘 아침에도 도망갔잖아.”

연애에 대한 걸 고민하느라 너무 당연한 걸 잊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강세현은 항상 내 거짓말을 귀신같이 눈치챘다. 그만큼 나에 대해 잘 아는데 내가 어색해한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어제 일부러 잠들 때까지 기다려 줬더니.”

그것도 어제부터 내가 어색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고민은 대체 뭐였을까.

“내가 말했던가, 난 가끔 네가 좀 덜 똑똑했으면 좋겠더라.”

강세현은 또 웃었다.

“어쩔 수 없잖아. 익숙해져.”

“익숙해질 게 너무 많아서 뭐부터 익숙해져야 할지 모르겠다.”

딱히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데, 웃어넘길 줄 알았던 강세현은 퍽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빨리 적응해. 길게는 못 기다리니까.”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진짜 다 했으니까 자. 열두 시 넘었어.”

어느새 강세현이 처음에 가겠다고 말한 시간으로부터 30분이 넘어있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붙잡고 싶었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이별이 아쉬웠다.

“그냥 자고 갈래? 피곤할 것 같은데.”

강세현은 묘한 표정을 나를 바라봤다.

“정 원한다면 그래도 상관없지만 안 되지 않을까.”

“왜?”

“너 또 잠 못 잘걸. 어제도 못 잤잖아, 너.”

……아.

잊고 있었다. 늘 그랬듯 강세현이 소파에서 잘 거라고만 생각했지, 나와 함께 잘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내 표정을 본 강세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심하게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까 일부러 하나 말 안 했는데,”

“뭘?”

“불만 사항이나 요구사항.”

왠지 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듣고 싶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강세현의 입에선 절대,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말이 나왔다.

“키스 정도는 지금 하고 싶은데.”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