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52화 (52/96)

#52

11. 이성

강세현

“키스 정도는 지금 하고 싶은데.”

그 말에 예상했던 대답이 나왔다.

“……미친.”

언젠가부터 권성하는 속마음을 입 밖으로 뱉어놓고 본인이 알아차리지 못했다. 방금도 속으로만 하려던 말을 들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정신이야?’

난 완벽히 제정신인데.

“안돼?”

“그럼 된다고 말할 줄 알았냐?”

“지금 말하면 다 들어줄 수 있다더니.”

“그래도 그건 무리.”

“왜.”

“당장은 무리야.”

“그러니까 왜. 빨리 적응한다며.”

“빨리라고 했지 지금 당장이라곤 안 했어.”

“적응하려면 이것보다 빠른 길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뭔가 더 말하려던 권성하는 입을 다물었다. 열 때문에 발개진 얼굴을 하고 당황한 모습이 이상하게 사랑스러웠다.

아. 역시 키스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시작으로 자꾸만 야릇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주 얄팍한 이성으로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본능을 겨우겨우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을 모르는 권성하는 요리조리 피해갈 변명만을 고민하고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불안한 듯 흔들렸다.

“노력은 해 볼게. 근데 지금은 안 돼.”

그리고, 쫓겨났다.

“졸리니까 너 가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

권성하와의 연애가 결코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으나, 그걸 실제로 깨닫게 된 건 어제였다.

어제 오후, 사귀고 나서 처음으로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는 자리에서부터.

예상보다 늦어진 미팅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오피스텔로 향했다. 권성하가 이미 와 있다는 생각만으로 고작 몇 분 되지 않는 거리가 마치 몇 시간 떨어진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왔어?”

얼굴을 보는 순간 단순한 반가움이 아닌, 그 이상의 감정이 일었다. 그런 낯선 감정을 숨기기 위해 평소에는 묻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뭐 하고 있었어?”

“책 봤어.”

“공부할 거 있었어?”

“아니. 저거 잠깐 빌렸어.”

정말 어울리지 않는 책을 손에 들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나 내가 몰랐던 취향도 있나 싶어서 계속 대화를 이어가는데 바로 그게 문제였다.

“이런 거 좋아했어?”

“아니. 처음 봤어. 보이길래.”

“어땠는데?”

“아직 잘 모르겠어. 솔직히…… 이해가 좀.”

“그런데 왜 봐. 다른 거 읽지.”

“전혀 모르는 분야라 신기해서. 넌 다 읽었어?”

“아니. 내 거 아냐.”

“책장에 꽂혀있던데, 그럼 누구 거야?”

“여자친구.”

말하자마자 아차 싶었다. 이제는 우리가 친구가 아닌 연인이란 사실을 완전히 잊은 채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했다. 특히 상대가 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면 그만큼 더 조심해야 했는데.

“어쩐지. 의외의 취향에 놀랄 뻔했네. 내가 모르는 네 취향도 있는 줄 알았어.”

권성하의 어설픈 거짓말은 늘 알아챘다. 억지로 수습하려는 그를 보며 더 무거운 죄책감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손님도 아닌데 그 방에 갈 필요 없어. 앞으로는 여기.”

게스트룸으로 가는 걸 말리자 권성하는 별말 없이 순순히 따라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진 건 차분한 발걸음이 침대 앞에서 멈칫했을 때였다.

“서 있지 말고 얼른 누워.”

“어……. 알았어.”

침대로 올라서는 몸짓이 유독 느릿했다. 따라올 때까지만 해도 별생각 없었다가 침대를 보고서야 현실을 깨달았다는 걸 무척이나 티 내는 움직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표정이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이런 애를 데리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먼저 자고 있어.”

무심하게 말했지만, 속으론 애가 달았다. 내 침대에서, 내 이불을 덮은 권성하를 보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던 광경이었다.

권성하는 내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머리통이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가슴 한편이 간지러웠다.

아. 만지고 싶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미 내 손은 허공에 떠 있었고, 순간 보드라운 뺨을 쓸어내리려다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도 아니고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당장 키스 그 이상을 해도 모자란 나이에 거북이 걸음마 수준밖에 안 되는 스킨십이라니. 말간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주춤,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방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후회했다.

먼저 자긴 뭘 먼저 자.

여태껏 손도 안 잡아본 등신처럼 굴러들어온 기회를 발로 차버렸다. 분명 내 어딘가 고장 난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지금껏 쉬웠던 일이 갑자기 어려워진 이유는 권성하가 남자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 것보다는 사람 자체의 문제였다.

내가 아는 권성하. 일탈 한번 없이 언제나 바른길만 가는 권성하.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권성하. 그런 그에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도대체 감이 오질 않았다. 심지어 머리를 쓰다듬는 것만으로 저렇게 당황하는데.

“하아…….”

담배를 피우고, 누나가 읽으라고 통 사정하던 올해 사업 계획서를 훑어보다가 새벽 두 시가 훌쩍 넘어서 방으로 들어갔다. 권성하는 침대 바깥쪽으로 몸을 돌린 채 이불 끄트머리를 꼭 붙잡고 자고 있었다.

어떻게 자는 모습까지 너다울까.

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매일 보던 얼굴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만약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이런 거라면 아마도 난 지금까지 제대로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던 게 분명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참 대단했다. 단지 그 감정 하나만으로도 상대가 새롭게 느껴졌으니까.

연인이 된 권성하는 매일이 새로웠고, 그래서 내일이 궁금했다. 내일은 또 어떤 다른 권성하를 알게 될까, 하고.

뒤척임 없이 곤히 잠든 권성하의 옆으로 가 누웠다. 꽤나 큰 움직임에도 상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쿵. 쿵. 상대의 숨소리 하나에 심장이 들썩였다.

슬쩍 팔을 끼워 넣고 뒤에서 허리를 껴안았다. 생각보다 더 마른 느낌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몇 분 지나고, 손이 제멋대로 판판한 가슴과 단단한 어깨를 쓸어내렸다. 낯선 느낌에 오히려 더 열이 올라 환장할 노릇이었다. 고작 품에 안는 정도로 익숙한 감각이 눈치 없이 불쑥 일어섰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했다.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머릿속으로 계속 딴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한번 의식하자 한가지 생각만 끝도 없이 맴돌았다. 잠들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옆자리가 비어있었다.

혹시 내가 늦게 일어났나 핸드폰을 확인하자 권성하가 나갈 시간에 맞춰 맞춰둔 알람은 그대로였다. 8시도 되지 않은 시각, 권성하는 이미 없었다.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먼저 가버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참 우습게도, 매일 혼자 자던 곳인데 단 하루 만에 혼자임이 낯설어졌다. 차갑게 식어버린 시트를 보고 문득 허전하다고 느꼈다.

바로 그게 오늘 아침이었다.

그런데 도망치듯 가버려 놓고 아무렇지 않게 또 자고 가라니.

‘그냥 자고 갈래? 피곤할 것 같은데.’

심지어 그렇게 묻는 권성하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분명 내가 본인과 한 침대에서 잘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대체 어디까지 순수한 거야.

‘키스 정도는 지금 하고 싶은데.’

반쯤 놀릴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절대 빈말은 아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진심을 담아서 한 말이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정색하며 쫓아낼 줄은 전혀 몰랐지만.

단 하루 만에 깨달았다.

권성하와의 연애는 어렵다.

너무, 어렵다.

드르륵-.

오피스텔에 도착하자 어느새 새벽 1시였다. 막 현관에서 신발을 벗었을 때,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액정을 보고 순간 보낸 이를 잘못 본 줄 알았다. 내가 권성하의 아파트를 나선 지도 한참 지났는데, 지금쯤 곤히 잠들어 있어야 할 상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빚쟁이: [잘 도착했어?]

권성하와 관련되기만 하면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불과 몇십 분 전, 차갑게 날 내쫓은 상대에게 잘 도착했냐는 메시지를 받은 것만으로 마음에 조금 남아있던 원망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분명 곧 잠들 것 같았는데, 아직도 안 자고 대체 뭘 한 거지?

그걸로 모자라 이번엔 걱정이 됐다. 지친 권성하의 얼굴을 떠올리자 어떻게든 그래도 곁에 있었어야 했나, 죄책감마저 들었다. 이보다 더 바보 같을 순 없었다.

나: [왜 안자]

답장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몇 초 만에 도착했다.

빚쟁이: [잠안와서]

졸리니까 가라더니. 빤히 보이는 거짓말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쫓아낼 땐 언제고 막상 보내고 나니까 미안했던 모양이다.

나: [그래도 빨리 자]

빚쟁이: [안그래도 이제 자려고]

내 감정은 이미 권성하에게 마냥 끌려가고 있었다. 시작 전부터 그랬지만, 시작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신세 진다는 말 한마디에 서운함을 느끼고 고작 남의 것을 잠깐 두른 것만으로 화를 불렀지만,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 종일 들떴다.

조용했던 마음이 눈을 떠서 잠드는 그 순간까지 몸부림을 쳤다. 내겐 하루에도 몇 번씩 널뛰는 이 감정마저 행복이었다.

빚쟁이: [잘자]

잘 자라는 두 글자에 이토록 마음이 술렁일 수 있을까.

오늘 밤은 잠이 잘 오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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