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53화 (53/96)

#53

“안 가.”

분명 나는 핸드폰 화면에 뜬 반가운 이름을 보고 전화를 받았는데, 정작 들리는 목소리는 내가 기다렸던 사람이 아니었다.

- 아, 왜. 가자.

“싫어.”

- 그러지 말고 한 번만 가자. 이번만.

누가 들으면 마치 이런 제안을 처음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지금까지 ‘이번만’이라는 말만 수도 없이 들었다.

-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권성하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기현 형이었다. 오늘 점심시간에 맞춰 학교에 간듯했다. 나라면 졸업한 학교에 절대 다시 가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뜬금없이 안부를 묻기 시작한 기현 형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전화를 건 진짜 목적에 대해 말했다.

내일 만날 장소를 오피스텔에서 한인 술집으로 바꾸자는 것. 핑계는 준성 형과 제이슨 형, 그리고 정우 형까지 못 오게 되면서 네 명만 모이면 좀 심심할 것 같으니 새로운 곳에 가자는 것이었다.

애초에 심심할 것 같으면 안 모이면 될 텐데. 이렇게 말하면 분명 서운하다며 또 한참을 괴롭힐 것 같아 억지로 다음 말을 삼켰다.

“차라리 그냥 일반 펍에 가. 아니면 바에 가든지.”

- 그런 데는 이미 많이 가 봤잖아.

“형은 한국 술집도 많이 가 봤으면서 뭘.”

- 야, 나는 많이 가 봤지만, 너랑은 많이 안 가 봤잖아. 가서 우리끼리 조용히 술만 먹고 오자.

“지금껏 그래놓고 한 번도 그 약속 지킨 적 없는 거 알지?”

- 이번엔 진짜야. 약속 지킬게. 진짜라니까.

“형만 약속 지킨다고 소용없는 거 알잖아.”

워낙 아는 사람이 많은 기현 형은 그런 곳에 가기만 해도 유명인이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와서 말을 거는 사람이 여러 명이었고 본인들 자리로 부르는 건 그나마 양반이지, 개중에는 아예 우리 테이블로 와 술을 따르려는 사람도 있었다.

“어차피 한 명은 술 안 마시고 운전할 사람 필요하잖아. 차라리 끝나면 데리러 갈게. 다 놀고 전화해.”

- 야. 그러려고 가자는 거 아니야, 인마. 운전은 기재가 한댔어.

“말했잖아. 차라리, 그렇게 한다고. 어쨌든 난 안 가.”

- 진짜, 진짜 마지막이라니까. 어차피 열두 시쯤 가면 다들 클럽 간다고 사람 많이 없어.

그 말을 믿고 갔다가 한 번도 좋았던 기억이 없는데.

-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그냥 너네 집에서 보는 거로 하자…….

“불쌍한 척해도 소용없어. 그렇게 말하면 내가 간다고 할까 봐? 절대 안 가.”

- 아. 강세현, 진짜.

형은 몇 번인가 더 졸랐지만, 끝까지 안 간다고 못을 박았다. 대신 나중에 데리러 가겠다고 약속하자 그것마저도 싫다며 잔뜩 토라져서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을 때까지 핸드폰 주인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어? 벌써 왔어?”

끊어진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며 다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골치 아픈 일 중 하나의 주인공이었다.

“아직 아무도 안 와서 기다리는 중?”

화려한 옷차림으로 등장한 이는 최근 함께 과제를 하게 된 팀 멤버였다. 유일한 한국인으로, 함께 모일 때면 항상 먼저 말을 걸었다.

매주 금요일, 점심시간에 맞춰 잠깐 비는 타임에 짧은 미팅을 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미리 카페에 와 앉아있었는데 약속 시간까지 아직 30분이나 남아있는 지금, 하필이면 다음으로 오는 이가 가장 마주치기 싫었던 사람일 줄이야. 샌드위치를 사 온 상대는 역시나 예상대로 내 바로 앞에 앉았다.

“혹시, 나 있어서 불편해?”

당연히 불편했다. 담배를 핑계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다 얼마 전 권성하에게 들었던 말이 기억났다. 그냥 알고 지내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던 말.

‘아는 사이가 되기 싫으면 적어도 적은 만들지 마.’

‘왜. 말 섞지 않으면 소문 날 일도 없는데.’

‘그래도. 누가 속으로라도 너 욕하는 거 싫거든.’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딱 생각나는 바람에 일어서는 대신 앉아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어.”

내 말에 상대는 놀란 눈을 했다.

“다행이다.”

그 후, 꽤 오랜 시간 단둘이 앉아있었다. 학교나 과제를 주제로 시작된 대화는 독백이라고 해도 될 만큼 상대의 비중이 높았으나 그럭저럭 괜찮았다. 얼마 전 권성하에게 말했듯이 알고 지내는 이를 더 늘리는 게 별로일 뿐, 말을 거는 상대의 성격이 별로라는 건 아니었다.

“보통 주말에 뭐 해?”

사적인 질문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알아서 뭐하냐는 말로 이 대화는 끝났을 테지만, 이유 없이 적을 만들지 말고 잘 지내보라던 권성하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떠올랐다.

“혹시 데이트?”

대답을 하기도 전에 상대가 불쑥 던진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 아니면 미안. 그냥 친구 만날 수도 있는데.”

이전 같았으면 데이트를 한다거나 친구를 만난다고 확실히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쪽이 정답인지 헷갈렸다.

권성하를 만나지만, 데이트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우리 관계가 친구가 아니므로 친구를 만나는 것도 아니다. 그 어느 것도 정답이 될 수 없었다.

그런 걸 고민하느라 대답을 미루는 사이 테이블 위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잠깐 통화 가능해?]

이번에야말로 진짜 핸드폰 주인인 권성하가 보낸 메시지였다. 요즘 매일 같은 시간에 미팅이 있다는 걸 아는 권성하가 이 시간에 연락 온 게 의아했다.

“나중에 괜찮으면 주말에 한번-”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

일어서면서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조금 조용한 곳을 찾기 위해 흡연 구역으로 이동하던 중, 세 번째 연결음이 끊김과 동시에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아……. 아직 미팅 시작 안 했어?

“괜찮으니까 말해. 무슨 일 있어?”

-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왜.”

- 좀 부탁할 일이 있어서……?

“부탁할 일?”

내가 아는 권성하는 특별히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뜬금없이 전화를 걸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학교에 있는 동안 웬만한 대화는 메시지로 주고받는데 굳이 물어볼 만큼 통화를 원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 아니, 아까 기현 형이 말했던 거 있잖아. 이번 주에 가는 거.

“어.”

- 정말 안 올 거야?

“어.”

- 너 없이 셋이서 무슨 재미냐. 다른 형들도 못 오고 기재 형도 술 못 마시니까 기현 형이랑 나랑만 마셔야 하는데.

“그래서 내가 데리러 간다고 했잖아. 차 두는 게 걸리면 갈 때도 데려다줄 테니까 셋 다 마셔도 돼.”

- 그게 아니라 너랑 마시고 싶다는 거지. 마지막이라는데 한 번만 같이 가 주는 게 어때.

사람 많은 걸 좋아하는 형들이 가끔 부탁할 때는 있어도, 지금까지 권성하는 내게 한 번도 억지로 강요한 적이 없었다. 내 성격을 잘 아는 권성하가 이런 부탁을 할 리가 없는데.

“그게 부탁할 일이야?”

- 어.

“네 부탁 맞아?”

- 어…….

권성하는 평소와 다르게 말끝을 흐렸다. 그 이유는 분명,

“뭐야, 또 기현 형이야?”

딱히 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전화는 절대 권성하의 의지로 건 게 아니라는 걸.

지금 꼭 통화를 해야 하는 것부터가 이상했는데 평소 절대 먼저 부탁하는 일이 없는 권성하의 입에서 먼저 부탁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더 이상했다. 어쩐지 전화를 받을 때부터 태도가 묘하게 어색하더니 억지로 한 듯했다.

“그냥 형 바꿔. 어차피 옆에 있을 거 아냐.”

- 그건 좀.

“넌 왜 형 부탁은 거절 못 하는 거야?”

- 그러게.

수화기 너머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이없는 이 상황에서 우습게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 뭐야, 뭐래?

그새를 참지 못하고 말을 건 기현 형은 본인 나름 속삭인다고 낸 목소리가 내게 다 들린다는 걸 모르는 듯했다.

- 들켰어요.

- 에이, 벌써?

- 죄송해요.

- 어떻게 알았대? 강세현 이 무서운 놈.

들켰다는 걸 아는 순간 아예 목소리를 높인 형은 대놓고 내 욕을 하다가 그다음엔 슬픈 시늉을 했다. 실망하는 척이라도 하면 내 생각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날 그렇게 봐왔으면서 여전히 그렇게 믿는다는 것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후, 형의 목소리가 잠잠해졌을 때쯤 권성하는 내게 다시 말을 걸었다.

- 나중에 다시 걸까? 미팅 시간 다 됐지?

“아니. 괜찮아. 아직 5분 남았어.”

- 다행이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목소리, 신경 쓰이는데.”

분명 어젯밤까지 괜찮았던 목소리가 변해있었다. 그사이 감기가 더 심해진 건지 달라진 목소리가 영 마음에 걸렸다.

“감기, 이제 제대로 온 거야?”

- 그런가 봐.

“지금 토요일에 나더러 같이 가자고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 좀, 그렇지? 근데 목이 좀 덜 아파서 그런지 어제보다 오히려 오늘이 나아.

“약은.”

- 먹었어. 그렇게까지 챙겨 주는데 잊어버리면 큰일 날 것 같더라.

그렇게 말한 권성하는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 이야길 다시 꺼냈다.

- 근데 진짜 안 올 거야?

“몇 번 말해. 안 가.”

- 그래도 한 번 더 생각해 볼 순 없어?

“없어. 넌 지금까지 이런 적 없으면서 이번엔 왜 자꾸 물어봐.”

- 그냥 같이 갔으면 좋겠어서.

그냥 툭, 던진 말에 가슴이 쿵쾅댔다. 별 뜻 없이 그냥 건넨 말에.

하. 이젠 별게 다 설레네.

- 너 없으면 재미없어서 그래.

“넌 꼭 이럴 때만 그러지.”

또 한 번 웃음소리가 들렸다.

- 이번에 새로 생긴 곳이라서 형들이 진짜 가보고 싶나 봐. 어떻게 안 되겠냐.

“진짜 네 부탁이면 생각해 볼게.”

- 부탁이야.

한숨이 나왔다.

형들을 생각해서 내게 억지로 하는 부탁이라는 걸 알면서도, 권성하에게서 직접 부탁이라는 말을 들으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들었던 말이 결정적이었다.

- 별로면 둘이 따로 나오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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