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55화 (55/96)

#55

누군가 했더니.

늘 하나로 묶고 다니던 머리가 잘 세팅되어 어깨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거기에 진한 화장과 화려한 옷까지 입은 모습이 완전 다른 사람 같았다. 조명이 조금만 더 어두웠으면 못 알아봤을 만큼 놀라운 변신이었다.

“너도 이런 데 와?”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저 멀리서 보고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어. 여기서 만나니까 더 반갑네.”

그녀가 가까이 오자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도 확 향수 냄새가 풍겼다. 그녀는 나를 보던 시선을 돌려 내 옆을 힐끗 쳐다봤다. 아마 누구랑 같이 왔냐고 물으려다 만 것 같았다.

“먼저 들어가 있을게.”

따로 얘기할 것도 없는데 무슨 얘길 하라는 건지. 권성하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자릴 피해 주는 무심한 뒷모습을 보며 당장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권성하…… 맞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할 새도 없이, 상대의 입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당황했다. 그저 다른 이가 이름을 말한 것뿐인데 이렇게 기분 나쁠 수 있나. 가장 놀라운 건 그런 나 자신이었다.

“나 아는 오빠가 친하다고 몇 번 이야기하는 거 들었었거든. 그리고 워낙 유명하잖아.”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어떻게 유명한데?”

“어?”

“유명하다며. 대체 뭐라고들 하는지 궁금해서.”

내가 생각해도 말투가 시비조였다. 상대의 얼굴에 아주 잠깐 당황함이 스쳤지만, 다행히 물음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나쁘게 소문난 게 아니라, 완전 그 반대야. 좋은 쪽이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

그래도 기분 나쁜 건 마찬가진데. 나쁘게 소문났을 리가 없다. 권성하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아니까. 하지만 역시 나 혼자만 알고 싶었다.

절대 사진을 남기지 않는 나와는 달리 권성하는 형들이 찍자고 할 때마다 요청에 전부 응해 줬다. 그래서 매번 모일 때마다 형들의 sns에 사진이 올라왔다. 거기에 권성하를 아는 사람들이 열심히 댓글을 남겨 주었으니 소문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아. 그리고 너랑 친하다며.”

대체 그런 건 또 어떻게 아는 건지. 그 말에 또 기분이 풀렸다. 모르는 곳에서 소문이 나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아야 맞는데, 모순된 감정이 일었다.

“그럼 안에서 봐.”

그 후에도 몇 마디 더 이어 가던 대화는 금방 끝이 나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꽤 많은 테이블이 거의 다 차 있었다. 시끄러운 음악과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실내는 요란스러웠다.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이 눈앞에 권성하의 등이 보였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 있어도, 많은 사람 사이에 섞여 있어도, 가장 먼저 찾았다.

“벌써 얘기 다 끝났어?”

“얘기할 것도 없었어. 기현 형은?”

“저기.”

권성하가 가리킨 곳에는 기현 형이 누군가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후줄근한 후드티를 벗은 형의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보면 참 나쁘지 않은 얼굴인데, 이럴 때만 빛날 수 있는 외모가 안타까웠다.

그리고 조금 후, 형이 테이블에 돌아오자마자 자리가 소란스러워졌다.

“욜, 너 아는 사람 만났다며! 여자라며!”

“어.”

“헐……. 진짜였어. 믿을 수 없다. 강세현이 이런 데서 여자랑 이야기를 하다니……. 당장 말해. 누구야, 누군데. 누군데 우리 성하를 버리고 바람을-”

“그런 거 아니니까 오바하지 마. 나도 아는 사람 정도는 있어.”

“그래도 궁금해. 대체 누군데? 어디 앉았어?”

이런 곳에서 아는 사람과 인사 나눈 게 뭐가 그리 신기한지 기현 형과 기재 형은 번갈아 가며 캐물었다.

“같은 학교 다니는 애야. 별로 대단한 거 아니니까 그만하지?”

“야. 네가 같은 학교 다닌다고 다 아는 척하냐? 아니니까 대단한 거지.”

한숨이 나왔다.

“그냥 우연히 이번에 같이 과제 하게 돼서 그래. 별거 없어.”

“아.”

갑자기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만난 사람이 그때 말했던 걔야?”

“어.”

그저 그렇게 대답한 것뿐인데 권성하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러나 왜냐고 묻자 아무것도 아니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우린 아까 안주 하나 시켰어. 너네도 메뉴 보고 좀 골라 봐. 계란말이는 빼고 골라라.”

찜찜한 기분에 권성하에게 뭔가 더 물어보려 했으나 계속 말을 시키는 형들 때문에 대화를 이어 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 넷의 대화는 더는 계속될 수가 없었다. 틈만 나면 나타나는 방해꾼 때문이었다.

“어? 기현이 너 오랜만이다?”

“아, 형! 안녕하세요.”

“한동안 안 오지 않았냐?”

“졸업 때문에 바빴어요.”

“오, 졸업했어? 축하한다. 술 한잔해야지. 이따 잠깐 들러.”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다. 워낙 당연하다 여겼던 일이라서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그리고 기현 형뿐만 아니라 기재 형 역시 아는 얼굴이 꽤 많았는데 그중 반 이상이 전 여자친구와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시카고에 오래 있었던 형들이야 그렇다 쳐도 권성하는 왜.

“와, 이게 누구야.”

“헐. 성하 오빠. 여기 웬일이에요? 누구랑 왔어요?”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장면이 계속해서 눈앞에 펼쳐졌다. 말 그대로 남녀 할 것 없이 와서 말을 걸었는데 그중 학교 사람이 아닌 사람도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거냐고 묻자 ‘그냥 건너 건너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권성하를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속이 끓었다. 내게 이런 감정이 있는 것도 권성하를 통해 처음 알았다.

오랫동안 만났던 여자친구는 매번 내게 말했었다.

‘넌 내가 다른 남자애들이랑 놀면 질투도 안 나?’

‘그런 걸 꼭 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그건 아니지만…… 이상하잖아.’

질투가 없는 나를 이상하다고 했었다. 그런데 연인이 다른 이성과 어울려도 괜찮던 내가 모르는 사람이 권성하를 아는 것만으로 질투를 한다. 권성하를 만나기 전까지 이상했던 내가 이제야 정상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울컥하는 이 싫은 감정을 더 쉽게 인정할 수 있었다.

“역시 괜히 왔나.”

형들이 잠깐 자리를 비우고, 둘만 남아 있을 때 권성하가 말했다. 몸 상태 때문인지 묘하게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아무리 티를 내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안 좋으면 말해. 먼저 가도 되니까. 어차피 형들은 우리 없어도 잘 놀아.”

“딱히 그런 것도 아닌데 별로 재밌지가 않네.”

“갈까.”

“일단 조금만 더 있어 보고.”

권성하는 감기 때문에 종일 피우지 않았던 담배를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담배를 피우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을 때는 놀랍게도 우리 테이블 앞에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내가 없을 때 불쑥 찾아왔을 리는 없고, 자세히 보니 상대는 기현 형과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흔한 이야기였다. 내가 아는 사람이 알고 보니 내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었다- 뭐 이런 이야기.

그럼 그렇지. 내가 아는 사람을 기현 형이 모를 리 없었다.

“뭐야, 세현이 네가 아는 애가 현아였어?”

영어 이름으로만 알고 있어서 현아라는 한국 이름이 오히려 낯설었다. 몰랐는데 그녀 역시 꽤 아는 사람이 많은지 기현 형과 기재 형뿐 아니라 정우 형까지 잘 알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과도 눈빛 교환을 여러 번 했다.

“세현이 너 차 가져오지 않았어?”

형들과 짧게 대화를 나눈 그녀가 내 손에 든 술잔을 보고 놀란 눈을 했다.

“어.”

“근데 술 마셔도 돼?”

“갈 땐 내가 안 해.”

“그럼 한잔 받을래? 내가 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술 한잔은 같이 마시고 사라져야겠다.”

딱히 술을 받고 싶진 않았지만, 가겠다는 말에 별생각 없이 손을 내밀었다. 마치 신기한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쳐다보던 형들은 그녀가 가자마자 곧바로 입을 열었다.

“와. 나 강세현이 친절하게 다 대답해 주는 거 처음 봤어.”

“그것도 안 지 별로 안 된 사람한테. 너 학교 사람이라도 이렇게까지 안 하잖아.”

대답해 준 건 맞지만 친절하다는 부분은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솔직히 그녀와 나눈 대화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일부러 적을 만들지 말라는 권성하의 말이 아니었다면 흥미 없는 말에 말을 섞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정도면 처음부터 완전 마음에 든 거 아니냐?”

전혀.

거기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그런 사람은 성하밖에 없어.”

***

형들과 술을 마셔도 역시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같이 잔을 부딪치고 싶은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데 그러지 못한다는 건 정말 곤욕이었다. 중간중간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시끄러운 공간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중간에 형들이 다른 친구들과 근처에서 놀다가 알아서 집에 가겠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피곤하다는 핑계로 권성하와 나는 그곳에서 나왔다. 그래도 결국, 두 시간이 지나서야 벗어난 셈이었다.

권성하의 아파트로 가는 길은 짧았다. 하지만 차 안의 공기가 너무 어색해서 유난히 그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술집에서부터 이상했던 권성하는 오늘따라 유난히 말수가 적었다.

차가 코너를 돌아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공간에 도착하자마자 물었다.

“왜 이렇게 조용해.”

차를 세우고 완전히 주차를 끝낸 권성하는 핸들에서 손을 떼고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는 내내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충격받아서 그래.”

“……갑자기?”

“어. 갑자기 내가 얼마나 바보인지 알게 됐거든.”

대체 뭐 때문에.

어떤 대답을 해 줘야 하나 고민할 새도 없이 다음 말이 들려왔다.

“몰랐어.”

“뭘 몰라.”

“네가 말한 그 애. 여자일 거라고 완전히 생각도 못 해서…….”

“누구 말하는 거야.”

“아까 그 현아라는 애.”

나도 모르게 아, 뭐야.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그거였어? 그게 왜. 여자든 남자든 무슨 상관이야. 그런 거로 심각해하지 마.”

“……너 바보냐?”

뜬금없이 화살이 갑자기 내게로 날아왔다. 위로를 해 주려다 오히려 바보냐는 소리를 들었으니 억울함이 앞섰다.

“상관있지, 어떻게 없겠냐? 이제 우리 친구 아니라며. 언제는 제발 의식 좀 하라더니 이럴 땐 왜 상관없대.”

“지금 네가 무슨 말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

“걔가 여자인 줄 알았으면 알고 지내란 말 안 했을 거라고.”

“그러니까 그게-”

“너는 왜 이럴 때만 눈치가 없냐.”

한숨을 한 번 내쉰 권성하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반쯤 포기한 말투였다.

“……괜히 신경 쓰이더라. 내가 널 좋아하긴 하나 보다.”

다른 설명 없이 그렇게 말했을 뿐인데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권성하가 했던 말을 이해하고 나자 이번엔 내가 충격을 받았다.

“그런 뜻이었어?”

“그래.”

“……너도 그런 걸 하는구나.”

이전 연애를 하면서 수도 없이 경험했던 건데도 몰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권성하가 질투라니. 시작 전부터 속을 태우거나 조급하게 군 건 내 쪽이라서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런 생각이 아예 머릿속에 없었다고 말하자 권성하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지금부터 잘 알아 둬.”

밖에서 술을 마시면서 처음으로 좋은 기억이 생겼다. 그것도 다시는 잊지 못할 중요한 일이었다.

나 때문에 안달 나고, 속 태우고, 후회하는 권성하. 나를 좋아하는 권성하.

손을 뻗어 새까만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불빛이 반짝이는 예쁜 야경도 없고, 잔잔한 음악도 없었지만 곧바로 알았다.

‘그런 분위기일 때.’

아. 지금이구나.

툭,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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