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권성하
또렷한 눈동자가 거의 노려보듯 나를 바라봤다. 그 순간,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다정한 손이 삽시간에 목덜미를 붙잡았다. 휙 잡아당기는 손길에 순순히 끌려갔다.
뭘 하려는 건지,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지만 더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서 눈치 없이 기다려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허락 없이 다가온 입술이 내 입술을 내리눌렀다. 마냥 부드러울 줄 알았던 녀석의 입술은 닿는 순간 까슬한 감촉이 먼저였다. 하지만 그건 아주 찰나, 말캉한 감각이 주는 부드러움은 처음 느껴 보는 것이었다. 생소한 자극이 맞닿은 곳을 통해 전해졌다.
“눈은, 감아야지.”
눈두덩이를 채웠던 서늘한 한기가 따뜻함으로 덮였다. 커다란 손바닥이 더 캄캄한 어둠이 불러오자 생경한 감각이 더 또렷해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밀려 들어왔다.
이내 굳게 닫힌 틈을 억지로 파고든 살덩이가 내 안을 헤집었다. 그 어떤 예고도 없이 쳐들어와 내 혀를 휘감은 채 집어삼킬 듯이 잡아당겼다.
강세현이 하는 대로 어설프게 흉내 냈다간 되려 망칠까 봐 제멋대로 얽어 대는 그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너무 능숙한 상대에 비해 모든 게 처음인 나는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숨을 뱉어야 하는데 자꾸만 삼켜졌다. 상대의 숨결에 정돈되지 못한 호흡이 턱을 타고 올라왔다. 백 미터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숨이 달려 고개를 물리려 하자 상대의 손이 뒤통수를 지그시 눌러 왔다. 다른 한 손으로는 자꾸만 내려가는 내 턱을 들어 올렸다.
“음……!”
닿은 입술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려 하면 아랫입술이 삼켜졌다. 뜨겁게 혀가 엉켜들수록 내 몸을 꽉 붙잡은 손이 더 단단해졌다. 배려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거칠고 사나운 입맞춤이었다. 간혹 치아가 부딪히기도 했지만 조급한 움직임은 계속됐다.
적막이 내려앉은 차 내부에는 타액이 부딪히는 소리와 허덕임에 가까운 호흡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드문드문 조절하지 못한 호흡으로 흘러나온 신음이 들리기도 했다.
늦은 새벽, 마치 누군가 훔쳐보는 것 같아 불안함이 치솟았다. 딱히 잘못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마치 내 도덕심이 방망이질 당하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그 스릴감에 더 열이 올랐다.
내가 생각했던 입맞춤은 조금 더 차분하게 이루어질 줄 알았다. 어차피 이성보단 본능에 충실한 행위라 영화에서처럼 달콤할 거라는 환상은 없었지만, 적어도 이렇게 정신없이 몰아치는 건 아니었다.
안 그래도 감기 때문에 멍하던 머릿속이 키스 한 번 했다고 새하얘졌다.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좀, 잠……깐만.”
턱 끝까지 차오른 숨 때문에 결국, 손으로 강세현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그러자 겨우 입술을 떼어 낸 강세현은 젖은 입술 위를 혀로 핥아 내고 몇 번이나 더 짧게 입을 맞췄다.
이마를 맞대고 몰린 숨을 내쉬었다. 나만 숨이 찬 줄 알았는데 바로 코앞에서도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나를 보는 눈빛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흥분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혹시 나도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강세현의 처음 보는 표정 앞에서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친구와 연인의 경계가 완벽히 무너진 순간 앞으로 내가 적응해야 할 이 현실이 얼마나 엄청난 건지 또 한 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됐지?”
“어?”
끝난 줄 알았으나 끝이 아니었다.
가쁜 숨이 채 진정되기도 전에 갑자기 다가온 입술이 다시 입을 틀어막았다.
이번에도 바로 눈을 감지 못했다. 볼록하게 올라온 얇은 눈꺼풀 위로 가지런한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이렇게 또렷하게, 강세현을 눈 안에 담을 수 있다니. 쿵쿵대는 심장 박동이 머리를 울렸다.
이윽고 꼭 감긴 눈꺼풀이 조금씩 올라갔다. 얇게 접힌 쌍꺼풀 아래로 선명한 갈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게슴츠레 내리뜬 시선이 이내 나를 응시했다.
“말 안 듣지.”
살짝 벌어진 틈새에서 짓눌린 음성이 새어 나왔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또 한 번 심장을 꽉 쥐어 맸다.
“그게,”
그에 비해 내 입에선 기운 빠진 형편없는 목소리가 띄엄띄엄 갈라져 나왔다. 그 순간, 젖은 입속을 위로하듯 달래던 상대가 아랫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그게 아니라 네가 너무 잘생겨서 그래. 끝맺음하지 못한 뒷말은 그저 속으로만 삼켰다.
다시 비집고 들어온 혀끝이 내 혀를 매끄럽게 감아 당겼다. 아까보다 움직임이 조금 부드러워졌다고 생각했지만, 상대가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반대로 고개를 기울이며 더 깊이 혀를 밀어 넣었다. 뜨거운 혀가 입 안을 훑은 후 천장을 타고 미끄러져 방황하는 내 혀를 다시 휘감았다.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뺨을 감싸 안은 손이 델 듯이 뜨거웠다.
놀란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해도 상대는 꿋꿋하게 제 할 일을 했다. 서툰 나를 어르고 달래 요리조리 숨어 있는 혀를 강하게 빨아 당기고 놓아주기를 반복했다. 강세현은 내가 버거워할 때마다 슬쩍 입술을 떼어 내었다가 금세 다시 비비며 입맞춤을 이어 나갔다. 뒤늦게 온몸을 가득 채운 열기가 감기 때문인지 강세현 때문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강세현을 하나 더 찾아냈다. 연인에게 미치도록 다정한 이 남자는 이럴 때만큼은 다정하지 않다는 것을.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그런 생각도 뒤늦게 입술을 완전히 떼어 내고서야 떠올랐다. 참고 있던 숨을 다 토하고 나자 그제야 중앙에 있는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강세현은 빳빳하게 경직되어 있던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방금까지 진한 키스를 해 놓고 고작 포옹에 심장이 제멋대로 뛰어 댔다.
“다행인 줄 알아.”
여전히 남아 있는 키스의 여운을 떨쳐 내려 노력하던 중 어깨너머로 정말 뜬금없는 말이 들렸다.
“뭐가?”
“오늘인 게.”
그러니까 뭐가.
영문 모를 소리에 곰곰이 다시 생각을 짚고 있는데 따뜻했던 어깨가 휑해졌다. 강세현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픈 걸 감사하라고.”
강세현은 여전히 내 감기가 다 낫지 않은 걸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 이해하고 나자 그다음에 나올 말을 알게 됐다.
“아니면 여기서 안 끝났어.”
***
그날로부터 일주일, 강세현은 시도 때도 없이 엉겨 붙었다.
오늘도 언제 어디서 그런 느낌이 온 건지 현관에서부터 손을 뻗었다.
“으음…….”
허리를 붙잡은 손 위로 상대의 등을 껴안았다. 조심스레 입을 벌리자 입술 끝을 가볍게 두드리던 혀가 매끄럽게 들어왔다.
매번 숨도 못 쉬는 거친 키스를 했다면 이렇게 갑작스레 다가올 때마다 꽤 큰 결심을 해야 할 텐데 다행히 그사이 강세현은 꽤 뭉근한 입맞춤을 할 줄 알게 됐다. 그때보다 훨씬 느릿하고, 여유로운 입맞춤을.
하지만 그것도 입술이 닿고 나서 5분 동안만이었다. 그 시간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눈빛이 돌변하고, 거칠고 다급한 키스가 시작된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느리든 급하든 양쪽 다 완벽히 적응하지 못했다.
숨이 살짝 차오를 때쯤 단단한 손이 허리를 더 꽉 붙들었다. 아닌 척 다가온 하체가 내 허벅지를 꾹 눌렀다.
“아.”
상대를 밀어낼 때였다.
고개를 돌리고 몸을 뒤로 물렸다. 억지로 붙잡으려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텐데 강세현은 언제나 순순히 내가 하는 대로 그냥 두었다. 최근 들어 그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긴 하지만, 오늘도 별말 없이 입술을 떼어 냈다.
“할 거면 한다고 말 좀.”
매번 예고 없는 접촉에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일일이 분위기를 챙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적어도 슬쩍 눈치라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한 말인데 내 말을 들은 강세현의 반듯한 이마가 순식간에 구겨졌다.
“뭐를? 키스를?”
“어. 미리 말 좀 해 달라고.”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어.”
강세현은 픽, 삐딱한 웃음을 흘렸다.
“차라리 안 할래.”
그 정도로 싫은 걸까. 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 예상외로 극단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리 바보라도 그 말이 절대 지켜질 리 없다는 건 알 것이다.
“그건 좀 서운한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말한 건데 강세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놀란 듯 동그랗게 떴던 눈이 가늘어지며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따라왔다.
“그래도 안 하는 건 아쉽나 보네.”
“당연하지.”
“그렇게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처음이라서 단순히 하는 걸 좋아하는진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너랑 하는 건 좋아.”
사실이었다. 조금 거칠었던 첫 키스도, 그 후의 다정한 키스도, 강세현과 하는 입맞춤은 늘 설렜고 늘 좋았다.
한참이나 대답이 들려오질 않았다. 이번엔 아예 말을 잇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들리기까지 몇 초의 시간이 더 지났다.
“……나한테 왜 그러지.”
그렇게 중얼거린 강세현은 대뜸 내 뺨에 다시 손을 올렸다.
“할까.”
이런 식으로 물어보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뭔가 잘못된 오해를 만든 것 같지만 일단 설명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내 허락을 기다리는 강세현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뭐든 다 괜찮겠다 싶었다.
천천히 고갤 들어 얼굴을 마주했다. 예쁜 눈이 나를 보며 휘었다.
역시.
강세현과 하는 입맞춤은 시작 전에도, 끝난 후에도, 늘 설렜고 늘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