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진짜 문제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그것이었다.
오늘도 커다란 침대를 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올 뻔했다. 그 앞에 선 나는 주춤, 올라가기를 망설였다.
“금방 씻고 나올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평소와 다름없었다. 알겠다는 대답 대신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표정이 얼마나 굳었는지는 나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왜, 어째서 이렇게 긴장되는 거지.
처음 오는 곳도 아닌데 이 방에만 들어오면 대단한 일이라도 앞둔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지금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차분하게 잘 헤쳐 나가는 편이었는데 아무래도 나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다. 크게 심호흡을 해 봐도 도무지 차분해지질 않았으니까.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떻게든 당장 자러 가지 않을 방법을 생각해 봤는데, 도착하자마자 샤워도 했고, 옷도 갈아입었고, 그 후에 보고 싶은 영화도 다 봤으니 남은 건 술밖에 없었다.
나오면 술이나 한잔하자고 할까.
하지만 그것도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았다. 만약 취한다면 혹시라도 더 예상 못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전, 벼르고 별렀던 첫 키스 후 나는 며칠을 더 앓았다. 괜찮다며 고집을 피우고 외출한 벌을 톡톡히 받은 셈이었다.
‘그래도 너한테 안 옮겨서 다행이다.’
‘난 좀 억울한데.’
‘왜?’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할걸.’
그렇게 억울해하던 강세현은 내 감기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 참지 못하고 몇 번 더 입을 맞추긴 했지만, 함께 잠을 자진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불편해한다는 걸 알고 배려한 것 같았다.
그리고 사흘 전,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침대에 강세현과 함께 누웠다. 두 번째였다. 그나마 처음에는 자다가 중간에 깨서 상황이 바뀐 걸 알았지 두 번째엔 아예 처음부터 함께 눕는 바람에 몇 시간을 뜬 눈으로 있었다.
강세현과의 연애는 차차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다. 연인일 때의 다정함, 서로에 대한 독점욕, 그리고 입맞춤을 포함한 신체접촉까지. 하지만 여전히 전혀 익숙해지지 못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순간이었다.
강세현과 한 침대에 누워 같은 이불을 덮고 자는 것.
남들이 알면 키스까지 나눈 마당에 백 허그 정도야 뭐 어떠냐고 생각하겠지만,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뜨거운 숨이나 등에 닿는 심장 소리가 키스를 할 때보다 훨씬 더 묘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그래서 언제든 밀어낼 수 있는 키스와 침대 위에서 몸 전체를 꽉 붙잡힌 포옹은 긴장의 정도가 달랐다.
“하아…….”
진짜 미치겠네.
일단 이불 끄트머리를 붙잡고 미적미적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폭신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차라리 먼저 자자.
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지만, 그게 뜻대로 될 리가 없었다. 며칠 연속으로 일한 데다 토요일인 오늘 가장 무리했으니 잠이 올 만도 한데 원망스럽게도 이럴 때만 정신이 지나치게 맑았다.
강세현과 맞닿는 게 마냥 두렵기만 한 건 아니었다. 작은 손길에도 가슴 설레고 다정한 포옹에 엄청난 안정감이 느껴지는 건 당연히 좋은 거였다. 물론, 키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더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걸지도 모른다. 점점 가까워지고, 점점 더 닿을수록 지금보다 더 강세현이 좋아질까 봐.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멍하니 들은 지 10분쯤 지났을까, 어느 순간 소리가 뚝 끊겼다.
달칵.
문이 열리자 뿌연 김이 공중에서 흩어졌다. 그리고 보이는 형체는 살색투성이었다.
넓은 어깨를 따라 이어진 탄탄한 팔 근육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목을 타고 내려와 가슴까지 이어진 물방울이 잘 짜인 복근 위에 멈춰 있었다. 놀랍게도 그 아래에는 달랑 수건 하나만 두르고 있었다.
강세현, 이 자식.
일부러 이러는 거냐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내가 의식하고 있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 백 퍼센트 고의로 이러는 게 분명했다.
획 벽 쪽으로 몸을 돌려 그냥 못 본 척을 했다.
“안 자는 거 아니까 일어나.”
반협박 같은 말에 상체를 들어 올렸다. 강세현은 빤히 나를 보고 있었다.
“……대체 뭘 노린 거냐.”
씻었다고 남 앞에서 훌떡 웃통을 벗고 있을 놈이 아니었다. 우리 집에 왔을 때도, 본인 집에 있을 때도, 여태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이렇게 행동한다는 건 분명 이유가 있어서였다.
“너. 봐달라고 애쓰는 건데 반응이 이러면 서운하지.”
황당한 소리도 정도가 있지, 그 정도를 넘어서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남자라서 좋아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벗은 몸을 어필해서 뭘 어쩌자는 건지. 이런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다는 게 가장 기가 막혔다.
“몸 좋은 거 자랑 다 했으면 가서 옷 입어.”
“벌써 다 봤어? 더 봐도 되는데.”
강세현은 장난스레 웃었다. 그 얼굴을 보고 결국 나도 웃음이 터졌다. 늘 어른스럽다가도 이럴 땐 마냥 어린아이 같아서.
내가 더 어이없어하는 이유는, 강세현의 벗은 몸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재미로 요트장에서 일을 할 만큼 물을 좋아하는 강세현은 매년 날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면 레이크로 수영을 하러 갔다. 여름에는 꽤 멀리 있는 조용한 사유지를 빌려 형들과 다 같이 자주 놀러 가기도 했기 때문에 강세현의 벗은 몸이라면 질리도록 봐 왔다.
그러니 지금 와서 마치 처음인 것처럼 저런 말을 하는 건 너무 뻔뻔했다.
드레스룸으로 들어간 강세현은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침대 위로 올라와 내 옆으로 바싹 다가왔다.
“이렇게 넓은데 굳이 딱 붙어 잘 필요가 있을까.”
“어. 난 잘 때 너 필요해. 그러니까 이리 와.”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 강세현은 팔을 내밀었다.
뭐야, 이번엔 앞이야?
뒤에서 안기는 것도 여전히 어색한데 반듯하게 누운 강세현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자는 건 더더욱 상상할 수 없었다. 단호하게 거절하고 등을 돌리자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너무하네. 내 몸은 안 좋아해도 얼굴은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그래서 더 안 되는 건데.
내 무시에도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강세현은 오늘도 꿋꿋이 뒤에서 제 팔을 밀어 넣었다. 동시에 따뜻한 손이 허리를 붙잡았다.
또다. 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항상 긴장하는 건 나뿐이라 강세현은 금세 잠이 들곤 했다.
오늘도 그렇겠지, 속으로 불만을 토하고 있는데 금방 들려올 줄 알았던 고른 숨소리가 오늘따라 좀 늦었다.
아직 안 자면 말이라도 걸어 볼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목덜미에 부드러운 입술이 내려앉았다.
“……!”
단순히 짧은 입맞춤 수준이 아니었다. 끈적하게 입을 맞추는 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렸다. 그것도 아주 여러 번이나.
동시에 허리를 붙든 손이 불쑥 티셔츠 속으로 들어왔다. 아랫배를 스윽 쓸어내린 손이 점점 위로 올라왔다. 배꼽 부근을 머물던 단단한 손바닥이 가슴까지 올라오는데 한 치의 머뭇거림이 없었다. 살결에 닿는 낯선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너무 놀라 잠깐 참았던 숨을 뱉어 냈다. 부풀었던 가슴이 들썩이자 여기저기를 주무르던 손길이 더 야릇해졌다.
아……. 돌겠네.
잠든 척은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가만히 있으면 그만하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자극이 계속 이어지는 동안 등 뒤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열기를 끝까지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얇은 천 조각 아래 제멋대로 움직이는 손을 붙들었다. 밖으로 빼낼 작정이었으나, 커다란 손은 도리어 내 손등을 덮고 깍지를 꼈다. 억지로 손을 빼 보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좀…… 봐주라.”
피식,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까 옷 입은 거로 이미 봐준 거야.”
강세현은 목 언저리에 입술을 파묻은 채 뭉개진 발음으로 말했다. 쪽, 쪽,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맞췄다.
“……부탁이라고 치고 한 번만.”
일단 당장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게 먼저였다. 단지 만지는 거로만 끝날 것 같으면 조금만 더 참아 보겠는데 강세현은 도무지 이대로 그냥 멈춰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무리 무지한 나라도 이다음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다.
“들어주면 뭐 해 줄 건데. 이젠 술은 안 돼.”
“……그건 생각 좀 해 볼 테니까.”
내 대답이 별로 맘에 들지 않았는지 꽤 오랜 시간 고민하던 강세현은 ‘오늘까지 봐줄게’ 라는 말과 함께 깍지 낀 손을 풀었다.
끈질기게 달라붙던 손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반쯤 말려 올라간 티셔츠를 얼른 끌어내렸다. 허리에 둘린 손이 언제 또 옷 안을 파고들지 몰라 계속 심장이 두근거렸다.
애써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내 곧바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신 다음엔 할 거야.”
무슨 말을 하는지 단번에 알았다.
“지난번처럼 안 기다려 줄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지난번이라면, 대체 언제부터를 말하는 걸까. 사라진 줄 알았던 열기가 다시 찾아왔다. 무엇을 할 건지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강세현은 모른 척하지 말라는 듯 귓불을 깨물었다.
“할 거라고, 섹스.”
귓가에 닿는 낮은 음성에 또다시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