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첫 키스 때가 생각났다.
시작부터 너무 급해서.
내 말이 끝나자마자 강세현은 목덜미를 움켜쥔 채 바로 입을 맞췄다. 다짜고짜 다가온 입술이 이번에야말로 내 입술을 집어삼킬 듯 비벼 댔다.
짙은 열기를 품은 숨이 벌어진 틈 사이로 훅 밀려들어 왔다.
“읍……!”
꼿꼿하게 선 혀끝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내 혀를 휘감고 강하게 빨아 당겼다. 그에 맞춰호응하듯 상대의 움직임을 쫓자 여린 안쪽 살을 훑어 낸 살덩이가 안을 휘저었다. 혀를 옥죄이는 두툼한 살점이 입천장을 내리누르자 자연스레 고개가 위로 젖혀졌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키스를 하는 동안 힘으로 밀린 몸이 벽에 부딪혀 금세 등이 서늘해졌다.
상상보다 더 엄청난 악력에 붙잡힌 어깨가 아팠다. 흥분할수록 다리 사이를 눌러 오는 허벅지에도 힘이 들어갔다.
내가 시작한 만큼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다. 멈출 생각도 없었다. 애원하듯 혀를 물리는 대신 강세현의 속도에 맞춰 혀를 움직였다. 말로 쉽게 옮기지 못하는 내 마음을 상대에게 전하려는 나름의 노력이었다.
긴 키스가 이어졌다. 어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려 하면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드문드문 눈꺼풀을 들어 올릴 때마다 내리깐 두 눈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상대의 손이 골반 위를 지나 허리를 움켜잡았다. 자유로운 두 팔을 강세현의 목에 둘렀다. 살결에 닿은 온기는 따뜻하기보다는 뜨거웠다. 델 듯이 뜨거운 기운이 몸의 굴곡을 따라 올라오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읏…….”
빈틈없이 안을 꽉 채운 뜨거운 숨결에 얼마 지나지 않아 호흡이 거칠어졌다.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 호흡이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조급했던 움직임이 더 급해졌다. 허겁지겁 떨어진 입술은 귀, 목덜미를 차례대로 내리누른 뒤 다시 입술에 짧게 부딪혔다. 동시에 내 몸에서 손을 뗀 강세현은 빤히 나를 바라봤다.
“오늘은 부탁해도 안 봐줘.”
웃음이 났다.
“쓸데없는 걱정은.”
종일 몇 번이나 생각했다. 강세현이 보고 싶다고.
매일 보는 얼굴을 왜, 어째서 쉼 없이 생각하게 되는 건지 고민한 결과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머리가 마음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강세현을 좋아한다. 강세현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 이상 ‘왜’라는 물음에 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벅차올라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런 감정을 품고서 겁쟁이처럼 피할 수만은 없었다. 모든 걸 상대에게만 맡기는 이기적인 짓은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숨 쉴 때마다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꺼졌다. 숨 막힐 만큼 긴장했지만, 그만큼 더 큰 기대가 따라왔다. 강세현을 만나러 오는 길,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딜 때처럼.
늘 부담스러울 정도로 넓게만 보였던 침대에 망설임 없이 올랐다. 폭신한 침구에 등을 대고 강세현을 바라보자 다시 입술이 삼켜졌다. 달콤한 자극이 쉴 새 없이 입 안을 오가는 동안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허울들이 차례로 떨어졌다.
“하아…….”
노골적인 시선이 몸 전체에 닿았다. 단지 그것만으로 몸 어딘가가 저릿해졌다. 쿵쿵, 쉴 새 없이 뛰는 심장 소리에 귀가 먹먹해졌다.
단단한 손바닥이 허리를 붙들어 당겼다. 제대로 누군가와 닿아 본 적이 없는 내게 타인의 살이 닿는 감촉은 어떤 말로도 표현하지 못할 만큼 벅찬 감동이었다. 미칠 정도로 기분 좋은 감각이 등을 타고 몸 전체에 흩어졌다. 뻣뻣하게 굳었던 몸에 힘이 풀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눈 감지 마.”
갈색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불안한 것 같기도,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낯선 눈빛은 몸속 어딘가를 꽈악 조여 왔다. 조금의 여유도 남아 있지 않은 강세현의 얼굴이 더 큰 흥분을 일으켰다.
“……어차피 아까워서 못 감아.”
끊임없이 부딪쳐 오는 상대를 보며 이성이 본능을 따라가지 못했다. 머릿속으로는 이다음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내려 애썼지만, 고장 난 판단력은 만취한 사람처럼 상대에게 온몸을 내어 줬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수치심을 이겨 내자 지금 눈앞에 둔 사람이 강세현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몸을 두드리는 아릿한 통증과 거칠게 부딪쳐 오는 자극을 견디게 하는 건 오로지 그 사실 때문이었다.
연속되는 심장의 두드림이 가슴을 아프게 때렸다.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이성을 놓는 순간, 행복이 찾아왔다. 이 순간을 덮을 수 있는 그 어떤 추억도 남아 있지 않아서,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강세현이라서 다행이었다.
나의 ‘처음’이었다.
***
습관처럼 눈이 떠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고요한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오고 있었다. 열린 블라인드 사이로 빛줄기가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기억이 몽롱해 정확한 상황을 알 수는 없지만, 멍한 정신에도 지금 내가 강세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어 안겨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맞댄 곳에서 들려오는 심장 소리와 너른 품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편안함을 가져다주었다.
단지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과 현실이 무척 다르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딱히 크게 움직인 것도 아닌데 잠깐 꼼지락댔다고 상대가 깨어났다.
지난번처럼 다시 자라고 말하는 대신 커다란 손이 등을 도닥였다. 토닥토닥, 일정하게 닿는 손길에 심장이 함께 두근거렸다.
그리고, 까무룩 다시 잠이 들었다.
“오늘 진짜 춥더라. 밖에 눈 와.”
2월 중순에 눈이 오는 건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보단 눈앞에 보이는 네모난 상자의 존재가 더 문제였다.
강세현은 내가 자는 동안 물건 찾을 게 있다고 밖에 나갔다 왔다. 돌아온 강세현의 손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가 들려 있었다.
꽤 단단해 보이는 까만색 상자와 사각 코너에 붙어 있는 하얀색 리본. 실버 엠보싱으로 마감된 커다란 로고.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겉면에는 Chocolate이라는 글자가 작게 새겨져 있었다.
설마.
“그렇게 놀랄 일이야?”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오전 일찍 외출하고 돌아온 강세현은 찬바람을 싣고 온 하얀색 패딩을 벗으며 웃고 있었다.
“오늘이잖아, 발렌타인.”
“누가 그걸 모르냐.”
“근데 뭐가 문제야.”
그게 문제야. 너만 준비하고 나만 만족해야 하는 이 상황.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냥 초콜릿이야. 일부러 제일 안 단 거로 샀는데 별로야?”
“아니, 별로라기보다는…….”
챙길 줄 몰랐어. 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아는 강세현은 연인에게 가장 다정한 사람이었다. 강세현이라면 당연히 준비했을 거라고 왜 예상하지 못했을까.
안일하게 그냥 넘어갔던 어제의 나를 원망했다.
“그럼 가져가. 생각보다 늦어져서 겨우 맞춰서 받았어.”
“어디서 산 건데?”
“텍사스.”
무슨 초콜릿 하나 사는데…….
가까운 미시간 아베뉴의 유명 백화점 정도를 생각했는데 설마 다른 주 명칭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마음이 더, 훨씬 더 무거워졌다.
미안함에 느릿하게 손을 움직여 포장을 뜯었다. 상자를 열자 생각보다 너무 평범한 초콜릿이 들어 있었다. 투박하게 조각난 초콜릿은 상자처럼 까만색에 가까웠다.
“잘 먹을게.”
“지금 안 먹어도 되니까 나중에 먹어. 가져가서 다른 사람들이랑 먹던지.”
“그래도 사 온 사람의 성의가 있지.”
“그럼 적어도 밥은 먹고 먹어.”
무심한 손이 내 손안에 있던 상자를 가져갔다. 줬다 뺏긴 기분이 들었지만 솔직히 지금은 그 무엇도 입에 넣고 싶지 않아 다행이기도 했다.
“일, 갈 수 있겠어?”
낯선 근육통으로 몸 여기저기가 뻐근하고 아팠으나 그렇다고 아예 걷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새벽 늦게 잠들어서 여전히 잠이 좀 부족했는데, 출근까지는 아직 시간이 여유로웠다.
“음……. 아마도.”
괜찮을 거라는 뜻이었는데 강세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내가 그래서 오늘까지 참으려고 했는데.”
“참을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 가지고 좀 살살해 주지 그랬냐.”
툭, 내던진 말에 얇은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그러게 누가 덤비래.”
겉옷을 다 벗은 강세현은 얇은 티셔츠 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내 옆으로 다가와 덜 마른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미리 오늘이라고 말을 해 주지. 그럼 나도 좀 참았을 텐데.”
“뭐, 그래도 12시는 넘었으니까 목표는 이뤘어.”
일부러 내가 다음 날 일도, 학교도 가지 않는 토요일을 노린 거라면 실패가 되어야 하는데 강세현은 어째서인지 결론이 성공이라고 말했다. 이해가 가지 않아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 이유 말고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
“애초에 2월 14일 날에만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발렌타인이라서?”
“어.”
다정한 놈인 줄은 알았지만, 처음을 특별한 날에 맞출 만큼 로맨티시스트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중 어느 때보다 심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야 매년 생각나지.”
매년.
당연하다는 듯 꺼낸 단어 하나가 마음을 술렁이게 했다.
앞으로도 매년 너와 함께할 수 있을까.
아직 한참이나 남은 확신 없는 미래가 궁금함과 동시에 기대됐다. 아무도 모르는 나중 일에 희망을 실으면 안 되는데 녀석과 함께하는 그 미래가 무척 행복할 것 같아서.
그래서 처음으로 욕심을 부렸다.
훗날 우리가 함께하지 못한다 한들, 적어도 평생을 살아갈 만큼의 추억을 만들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