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영광이네.”
띵-.
그렇게 말하자마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왜 일찍 왔어?”
“한 명이 급한 일이 생겼나 봐. 좀 먼저 가 봐도 되냐길래 그냥 다 같이 일어섰어.”
긴 손가락이 먼저 24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아무도 타지 않았다.
“난 또 나 보고 싶어서 일찍 온 줄 알았는데.”
“넌 왜 날이 갈수록 캐릭터가 변하냐.”
“마음에 안 들어?”
“안 들면 어쩌게.”
“다시 바꿔야지. 차일 순 없으니까.”
널 찰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다정한 손이 내 머리를 쓸어내렸다. 처음엔 그렇게 어색하던 손길도 이제는 꽤 적응했다.
집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어깨에 온기가 닿았다. 아직 신발도 벗지 않았는데 강세현은 현관문에서부터 나를 껴안았다. 무거운 몸으로 가둬 놓고 내 목덜미에 제 얼굴을 마구 비벼 댔다.
오늘따라 강세현이 이러는 것도 이해가 갔다. 월요일 아침에 잠깐 얼굴을 본 후로 목요일인 오늘까지 보지 못했으니 이렇게 얼굴을 보는 게 사흘 만이기 때문이었다. 남들에겐 겨우 사흘일 뿐일지라도 매일 보던 우리에겐 굉장히 긴 시간이었다. 만약 오늘까지 내가 일을 빼지 않았다면 강세현은 분명 오지 말라고 해도 지금쯤 내 아파트에서 기다렸을 것이다.
“네가 개냐……. 일단 좀 들어가지?”
손을 들어 등을 두어 번 두드리자 뺨에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개는 주인한테 발정 안 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강세현은 그러고도 한참이나 입을 맞추다가 배가 고프다는 내 말에 그제야 팔을 놓아주었다.
저녁은 피자를 시켰다. 둘 다 딱히 먹고 싶은 게 없기도 했고, 그게 가장 빠를 것 같아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야속하게도 시험 기간이었고, 밖에 나가서 저녁을 먹는 시간마저 아깝게 느껴졌다. 차라리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얼굴을 보거나 대화를 나누는 게 나았다.
“아.”
도착한 피자 상자를 열어본 강세현의 이마가 심하게 구겨졌다.
“왜?”
“잘못 왔어.”
주문한 피자가 아니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둘 다 싫어하는 파인애플이 군데군데 올려져 있었으니까.
“그냥 먹자.”
“그래도 싫어하잖아.”
“또 기다리는 것도 좀 그래. 배도 고프고.”
“정말 괜찮겠어?”
“너야말로 괜찮아?”
“난 어차피 그 전에 많이 먹어서.”
만약 강세현이 그 대답을 하고 난 뒤 가만히 있었다면 나도 몰랐을 텐데, 순간 찡그린 얼굴에 당황함이 비쳤다.
아. 전 여자친구가 파인애플 들어간 피자를 좋아했구나.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아냈다. 이럴 땐 눈치 빠른 게 좀 원망스러웠다.
하긴 5년 넘도록 오랫동안 사귀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놈이니까. 강세현이라면 자신이 싫어하더라도 상대의 취향에 맞췄을 게 분명했다.
강세현이 내게 잘해 줄 때면, 문득 나에게만 특별히 더 잘한다는 우월감 같은 게 생기곤 했다. 실제로 전 여자친구와 사귀는 모습을 직접 옆에서 본 게 아니니까 그때보다 더 잘해 주는 거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면 착각 아닌 착각을 한 게 부끄러워졌다.
이젠 전 여자친구와 비교까지 하다니.
나도 참 중증이다.
지금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상대로 질투할 정도이니 여자친구라는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았던 처음을 생각하면 신기했다.
강세현은 여전히 미안한 얼굴이었다.
“파인애플 빼 줄까.”
“됐어. 뭘 그렇게까지 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려다 되려 말투가 퉁명스럽게 나갔다. 상대가 내 기분을 알아채기 전에 피자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음료는 맥주 대신 콜라라는 사실이 무척 아쉬웠다.
“아직 할 거 많아?”
“어. 벌써 목요일이라니 믿기질 않는다.”
“오지 말래서 일부러 안 갔더니. 나 없는 동안 뭐 했는데.”
요 며칠 강세현과 만나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집중이 안 돼서. 습관처럼 같이 하던 공부를 더는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없어서.
지난 학기에 이미 한 번 경험해서 알았다. 강세현과 함께 있으면 평소의 집중력의 반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전처럼 같이 공부하려 책상에 앉아도 결국 마지막엔 함께 침대 위에서 깨어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요일부터 시작한 시험공부는 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결국, 눈을 떴을 땐 월요일이 와 있었고 그에 책임을 느낀 강세현은 며칠간 혼자 공부하고 싶다는 내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뭐 했긴, 공부했지. 근데 그냥 양이 많은 거야.”
“흠…….”
“그러는 넌 꼭 할 거 없는 것처럼 말한다? 논문 제출할 것도 있다며.”
“그거 오늘 냈어. 공부할 거는 이제 두 과목 남았고.”
“똑같이 노는데 결과가 왜 이렇게 차이 나지.”
“너 없는 동안 한 건데.”
“그러니까, 같은 시간이 주어졌는데 너는 왜 그걸 다 했냐고.”
강세현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친 듯이 공부만 했어.”
거짓말. 삼십 분이 멀다 하고 메시지 보내던 사람이 누군데.
강세현의 이런 낯간지러운 말은 적응했다기보다는 싫지 않아서 참는다는 게 맞았다. 만약 다른 사람이 했다면 정말 싫었을 말도 강세현이 하면 괜찮은 이유는 무뚝뚝한 말투 때문이었다.
보고 싶다거나 목소리가 듣고 싶다는 달콤한 말도 이상하게 강세현이 하면 담백하게 느껴졌다. 툭, 하고 뱉은 말은 언제 들어도 진심처럼 느껴졌다.
“강세현.”
이름을 부르자 상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 이번 방학에도 한국 들어가는 이유, 일 때문이랬지?”
“어.”
“일이라는 거, 집안 사업 맞아?”
“어.”
“그래서 말인데.”
방금까지 부드러웠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집안이라든가 일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그랬다.
“졸업하고 나면 어떡할 거야?”
“뭐, 취업 같은 거 말하는 거야?”
“그런 것도 포함해서 이것저것. 왠지 당연한 걸 묻는 것 같지만, 혹시나 해서 묻는 거야. 여태 이런 이야기는 해 본 적 없으니까. 그래도 사귀는 사이에 서로 어디 있을지 정도는 알아 둬야겠다 싶어서.”
“알아 두기만 하면 돼?”
“……최대한 맞춰 봐야지.”
심각했던 얼굴은 금세 날 보며 웃었다.
“거기까지 생각했다니까 기특한데.”
“뭐가?”
“전에 내가 물어봤을 때는 그때 가서 본다고 했잖아. 졸업해도 한국에 갈지 미국에 있을지 모른다고. 그래서 먼저 물어볼 줄 몰랐어.”
“그땐 사귀기 전이었잖아.”
“그래도 맞추겠다는 말은 예상 못 했어.”
강세현은 어딘지 모르게 기뻐 보였다.
“졸업하면 한동안은 서울에 있을 거야.”
“한동안이면 다른 데 갈 수도 있는 거네.”
“거의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출장은 좀 자주 다닐 수도 있어.”
머릿속으로 상상을 했다. 단정한 수트 차림으로 출장 가는 강세현. 순간 탄성이 나올 정도로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넌?”
“말했잖아 맞춘다고. 어차피 서울에 있을 거였지만.”
“다행이네.”
일단은 별문제 없이 잘 지낼 수 있겠다고 안심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만약 한쪽이 다른 데로 가게 되면 어쩔 거야?”
“그럼 장거리 연애가 되는 거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뱉은 대답에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해 봤으니까 잘할 자신이 있어서 저렇게 대답하는 걸까 – 이런 생각 때문에. 강세현과 사귀는 동안 속이 너무 좁아진 것 같아 나 자신이 싫어질 정도였다.
“너랑 절대 못 헤어지니까 그렇게 말한 거야. 이상한 오해하지 마.”
내가 눈치가 너무 빠른 것도 문제지만, 상대가 눈치 빠른 건 더 문제였다. 나름 잘한다고 생각했던 표정 관리가 강세현 앞에서는 늘 실패했고, 이번에도 역시 이런 기분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강세현이 먼저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덕분에 그때그때 오해가 쌓일 일이 없어서인지 강세현과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 친구일 땐 몰라도 연인이 되고 나서는 아무리 잘 맞는 상대라도 싸울 수 있을 텐데 우린 사소한 다툼조차 없었다.
기재 형의 말대로라면 연인 사이라도 밀고 당기는 게 적당히 오가야 오래 간다던데 우리 사이엔 전혀 그런 게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걸 할 줄 모르기도 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서로의 눈치를 보거나 자존심을 세울 일이 없었다. 연인 사이에 싸우게 되는 이유가 대부분 그런 일 때문이라면 우리 사이엔 싸움이 만들어질 일이 없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이마를 꾹 눌렀다.
“인상 좀 펴 봐. 불안하니까.”
그래. 이런 놈이 무슨 밀당이야.
나도 모르게 웃었다. 그러자 이번엔 반듯했던 강세현의 이마가 살짝 접혔다.
“그렇다고 갑자기 웃으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웃을 만해서 웃었어.”
“뭐가 그렇게 좋은데.”
“역시 사귈 만하다 싶어서.”
“하.”
나는 아무래도 간혹 보이는 강세현의 당황한 얼굴을 좋아하는 것 같다.
“강세현.”
또 한 번 이름을 부르자 뚱한 얼굴이 아직도 뭐가 남았냐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혹시 나한테 바라는 거 없냐?”
“있어.”
강세현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는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나를 만나면서 불만이나 바라는 점이 있다면 진지하게 들어 볼 생각으로 물었는데, 막상 있다는 말이 막힘없이 나오자 이번엔 내가 당황했다.
“바라는 거 없냐고 물어 놓고 왜 뭔지는 안 물어봐?”
왠지 안 들어도 될 것 같아서.
하지만 기대에 찬 눈빛을 보고 끝내 물었다.
“뭔데.”
시원스러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강세현은 대답 대신 조심스레 다가와 입을 맞추었다.
오늘도 공부하긴 글렀구나. 머릿속으로는 알아도 몸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나는 여전히 강세현의 웃는 얼굴에 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