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63화 (63/96)

#63

아침에 동이 트는 걸 보고 잠이 들었다. 알람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오전 11시였다. 혹시나 해서 맞춰 둔 알람이 아니었으면 점심 약속에 못 갈 뻔했다.

덜 풀린 피로 때문인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벌겋게 충혈된 눈과 칙칙한 안색. 거울 속 내 모습은 형편없었다.

강세현을 생각하느라 잠을 자지 못했고, 잠드는 마지막 순간까지 강세현을 생각했다.

왜 연락이 없을까. 혹시 날 잊은 건 아닐까.

하지만 결론은 강세현이 그럴 리 없지- 였다.

강세현이 한순간이라도 나를 잊을 리가 없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강세현이 그동안 내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보여 주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자신할 수 있을 정도로 내겐 믿음과 확신이 있었다.

잠을 자지 못한 건 그것과는 별개로 단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혹시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떠올리다가 덜컥 겁이 나 잠을 잘 수 없었다.

너무 늦은 새벽, 전화를 걸어 볼까 말까, 수십 번, 수백 번 생각하다 마지막엔 아무 일 없을 거야.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지. 그렇게 믿고 잠을 청했다. 그 시간까지 대체 어떻게 버틴 건지 눈을 감자마자 1분도 되지 않아 잠이 들었다.

알람을 끌 때 빼고는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았다. 소식 없는 상대를 잠깐 잊었다가 준비를 다 마친 후에 확인했다.

강세현: [일어나면 연락해.]

오전 7시 23분에 도착한 메시지였다.

집을 나서며 전화를 걸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신호가 끊어질까 봐 일부러 계단으로 내려갔다. 딱히 숨이 찰 일도 없는데 이게 뭐라고 괜히 긴장돼 심장이 빨리 뛰었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 내내 생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바랐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한참 동안 가던 연결음 끝에는 메시지를 남겨 달라는 모르는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회스러웠다.

아……. 5분만 늦게 잘걸.

***

“세현이는 왜 못 온대?”

평소 같았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답이 나왔을 텐데 오늘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니까.

일어나면 연락 달라던 강세현은 그 후에도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았고,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처음에 문자를 봤을 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고 심지어 반갑기까지 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자 이제는 좀 짜증이 났다.

이럴 거면 자세한 설명이라도 해 주지. 아무 설명도 없이 그냥 일어나면 연락 달라던 짧은 문자에 더 화가 났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어제 누나 온다고 그랬어요. 며칠 전에 출장 왔나 봐요.”

“흠, 그래?”

다들 놀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시큰둥했다.

“그럼 뭐…….”

“바쁘겠네. 세현이 원래 가족 오면 연락 잘 안 되잖아.”

“……그랬어요?”

“어. 너 몰랐어?”

당연히 몰랐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으니까.

“성하는 모를 수 있지. 대학 와서 알게 됐잖아.”

“아. 맞다.”

“지금은 거의 안 오는데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가족이 자주 왔었어. 뭐, 그때는 오피스텔에 관리인이라는 사람이 수시로 드나들기도 했고.”

그게 뭐야. 설마 지금도 그런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가 그랬으면 진즉에 들켰겠지 싶어서 생각을 바꾸었다. 실제로 주중이나 주말에도 누군가 왔다 간 흔적은 전혀 없었다. 강세현은 그 넓은 곳의 청소조차 자신이 할 만큼 집에 누굴 들이는 걸 싫어했다.

“와. 예전 강세현 생각나네.”

오늘의 주제는 이 자리에 없는 강세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 물어보고 싶었는데, 항상 당사자가 함께 있거나 맞는 타이밍이 없어 꺼내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

“혹시 집이 엄한 편이에요?”

“어. 엄청 엄하지. 얘기한 적 없어?”

“네. 먼저 말 안 하길래 안 물어봤어요.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맞아. 안 좋아해. 아니, 아마 엄청나게 싫어할걸? 사실 우리도 우연히 알게 된 거야. 우리랑 있다가 연락 안 돼서 난리 난 적 있었거든. 아니었으면 강세현이 절대 먼저 말하진 않았을 거다.”

그 후에는 굳이 묻지 않아도 형들이 먼저 말을 해 주었다.

“세현이네 집 엄청 부자인 거 알지?”

기현 형이 그렇게 묻자 준성 형이 왜 당연한 걸 묻냐며 화를 냈다.

“대충은 알고 있어요. 할아버지 때부터 사업 크게 한다고.”

“그래서 그런지 어릴 적부터 많이 통제받고 자랐나 봐. 집에서 나오려고 유학도 가고 싶다고 졸랐대. 그나마 형제 중에선 본인이 제일 자유롭다고 하던데 솔직히 첨엔 놀랐어. 말했잖아. 난리 난 적 있었다고. 영화 본다고 한 30분인가? 연락 못 받은 건데 그때 관리인이란 사람이 처음 본 우리를 죽일 듯이 노려보더라.”

“와. 기억난다. 우리한테도 완전 깍듯이 존댓말 썼는데 그게 더 소름 돋았어.”

형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때 이야기를 했다. 내가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관리인이 없어졌어. 아마 세현이 한국 나이로 미성년 딱지 뗐을 때부터일걸.”

“맞을 거야. 세현이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 다닐 때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처음 만나기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아무튼 예전에도 가족 중 누가 오면 며칠 동안 연락 안 되고 그랬어. 아마 지금도 그럴걸.”

“너도 눈치챘겠지만, 세현이네 회사 이름 들으면 알 만한 대기업인가 본데 그 이상은 세현이도 말 안 해 주더라. 우리끼리 추측은 여러 번 했어.”

“나는 관광업에 한 표 던진다.”

“나는 건설업. 근데 식품업이면 좋겠다. 만두, 라면, 이런 거.”

“너네는 헛소리하지 말고 좀.”

형들이 농담을 던지며 장난치는 동안에도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지나간 시간 속 어린 강세현이 안타까워서.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나눴었다.

‘미국엔 왜 왔는데.’

‘……엄마가 가라고 해서? 다 똑같지 않나, 너는 아니냐?’

‘난 내가 간다고 했어.’

우리의 입장이 조금만 섞였더라면 좋았을걸.

관심의 부재로 외로웠던 내가 애정을 갈구하는 동안, 과한 간섭으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어린 강세현은 지나친 애정을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내겐 유학이 지옥이었고, 강세현에겐 유일한 탈출구였다. 결국 방임도, 참견도, 어느 쪽도 옳은 것은 없었다.

나는 참 외로웠는데, 너도 많이 외로웠을까.

다시 슬쩍 쳐다본 핸드폰은 여전히 잠잠했다.

“성하 넌 여태 이런 것도 몰랐으면, 당연히 세현이 회사 모르겠네?”

“몰라요, 전혀.”

“와, 난 너희 둘은 엄청 친해서 비밀 같은 거 없는 줄 알았어.”

“그러게. 넌 알 줄 알았는데. 네가 말해 달라 그러면 세현이가 다 말해 줄 것 같았거든.”

“그게……, 물어본 적이 없어요.”

“헐. 진짜?”

강세현과 친구일 때도, 그리고 연인이 된 지금도, 우리의 사이는 변함없이 완벽하다. 사소한 다툼이나 서운한 일 없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좋아하고, 서로를 위해 준다.

그런데 아주 가끔 느껴지는 어색함은 언제나 이런 이야기가 오갈 때였다. 남들이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모든 걸 알고 있는 우리가 지금까지 이런 사실을 털어놓지 않는 건 서로 다른 쪽의 눈치를 보느라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상대가 먼저 말하면 그다음에 내가 말할 거라는, 고백의 순서를 가지고 유치하게 자존심을 세우는 게 절대 아니었다.

그냥,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그랬고 강세현도 그랬다.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묻지도 않는다. 묻지 않으면 말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리고 상대도 그랬으면 했다. 상대가 먼저 말하지 않아야 나도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직원이 카트를 밀며 들어왔다. 한 상 가득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차려졌고, 언제나처럼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모두가 제 몫을 다 먹고도 음식이 많이 남았다. 꽤 많은 양을 먹는 강세현이 빠진 자리에서 매번 시키는 만큼 시킨 탓이었다. 부른 배를 소화시키는 동안 남은 음식을 포장해 달라고 했다.

“오랜만에 다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다.”

일 때문에 한동안 유럽을 다녀온 정우 형은 무려 넉 달이나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기현 형이 우리가 시험 기간인 걸 알고도 일부러 오늘 모이자고 한 것도 정우 형을 위해서였다.

“세현이도 보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요.

한 침대에서 눈을 뜬 게 바로 어제 아침.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몇 달은 보지 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보고 싶다.

미치도록 보고 싶다.

조금 전까지는 하다못해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도 사라졌다. 어차피 목소리를 들으면 더 보고 싶을 게 분명했다.

그사이 짜증 났던 사실도 잊었다.

모든 사람의 연애는 이런 건지 모르겠다.

처음에 연락이 되지 않을 때는 조금 의아했고, 그다음엔 걱정이 되었고, 결국엔 화가 났다. 분명 사정이 있을 거라는 걸 알고도 내 부름에 응답하지 못하는 상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보고 싶다. 다른 감정들이 널뛰며 머릿속을 괴롭히는 동안에도 보고 싶지 않은 적이 없었다.

결국, 형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성하 넌 어쩔 거야? 시험 준비해야 하지?’

‘네. 먼저 들어가 볼게요.’

‘그래. 열심히 해.’

심지어 힘내라며 등까지 도닥여 주는 정우 형의 얼굴을 차마 마주 보지 못했다.

시험 준비는 무슨.

집으로 가는 길과 정반대 방향으로 핸들을 돌렸다. 내가 향한 곳은 강세현의 오피스텔이었다.

고민 끝에 보고 싶으면 보러 가면 된다는 간단한 결론이 나왔다. 어젯밤에도 혹시나 민폐가 될까 바로 연락하지 못하고 수백 번 고민만 했었는데, 오늘은 그런 바보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가서 연락해 보고 혹시나 안 받으면 차 안에서 기다리면 되는 거였다. 그러고도 끝까지 연락이 오지 않으면 다시 집으로 가면 그만이었다.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오늘은 그냥 제가 주차할게요.]

[그러시겠습니까? 지금은 대체로 여유로우니 아무 데나 대셔도 될 겁니다.]

[고마워요.]

발렛을 거절하고 직접 주차장으로 갔다. 마이클의 말대로 주차장 안쪽엔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였다. 엘리베이터와 가장 가까운 곳에 주차를 하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즐겨찾기 맨 위에 저장된 강세현의 번호를 누르려다 웃음이 났다. 원래 맨 위에 저장되어 있던 번호는 소라였고, 그걸 알게 된 강세현의 뚱한 표정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강세현의 즐겨찾기 목록에는 오로지 내 번호뿐이었다.

“만나만 보라니까?”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차창 너머로 들리는 한국어에 순간 멈칫했다. 이 오피스텔에 강세현 말고는 한국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이사 온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너무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싫어.”

그토록 듣고 싶었던 강세현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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