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연락 못 했어. 미안.”
왜 그랬는지 아무런 설명 없는 깔끔한 사과. 변명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텐데 강세현은 어떤 구실도 대지 않았다.
“어. 알았어.”
들어오라는 의미로 먼저 뒤를 돌았다. 그런데 따라 들어와야 할 인영이 현관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들어와.”
“…….”
“왜.”
왜 네가 상처받은 얼굴이야.
눈이 마주치자 강세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안 물어봐?”
“이럴 땐 물어보는 게 좋냐?”
“어. 항상 물어봐 주는 게 좋아.”
“알겠으니까 들어와.”
멈춰 있던 걸음을 재촉하자 기다란 다리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먼저 왼쪽 소파에 팔을 기댄 채 앉자 강세현은 중간에 앉았다.
“사정이 있겠지 싶었어.”
“그 사정이 뭔지 왜 안 물어봐.”
대충 알 것 같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들킬까 봐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어차피 누나랑 있었을 거잖아. 형들이 너 가족이랑 있으면 연락 잘 안 된다고 하길래 그런가 보다 했지.”
“그래도 궁금한 척이라도 해 주지.”
원망 섞인 말이었지만, 말투에서는 오히려 허탈함이 느껴졌다. 엎드려 절받기라지만 우선은 물었다.
“그래서, 연락 못 한 사정이 뭔데?”
“일하느라.”
“일?”
“어. 하루밖에 시간 없대서 오자마자 붙잡혔어. 새벽 다섯 시쯤 잠깐 자고 너한테 문자 보냈을 때 일어났는데 그때부터 또 좀 전까지 하느라고.”
“그냥 네 얼굴 보러 온 거 아니었어?”
“큰누나면 모를까 작은누나는 그런 거 없어. 본인이 필요한 게 있어서 온 거야.”
“아…….”
친누나인데도 필요할 때만 만나는 사이라니. 아까 봤던 기억을 더듬었다. 확실히 일반적인 남매가 할 만한 대화가 아닌 느낌이었다.
‘말이 안 돼도 해. 네가 언제부터 하고 싶은 대로 했어?’
강세현이 어떤 집안에서 자랐는지 상상이 갔다. 형들에게 이미 들었었지만, 실제로 본 느낌은 또 달랐다. 그나마 강세현을 아끼는 큰누나를 본 적이 있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 처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할 뻔했다.
“어쨌든 일한 건 맞는데 그것도 핑계야. 중간에라도 연락하면 되는 걸 빨리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다 보니 잊은 것도 있어. 미안.”
“됐어. 괜찮아.”
자꾸만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게 불편했다. 듣지 말아야 할 것을 훔쳐 들은 것 때문에 안 그래도 양심에 찔리는데 되려 사과를 받자 강세현을 속이는 기분이었다.
“괜찮은 얼굴이 아닌데.”
“그럼 어떤데. 나 원래 이렇게 생겼다고 몇 번을 말하냐.”
“흠.”
농담으로 넘어가려 했지만 따라붙는 시선은 거둬지지 않았다.
“혹시 화났어?”
“……나 지금 화난 얼굴이야?”
“못 봤으니까 모르겠는데 그런가 해서.”
“아닐걸. 화 안 났거든.”
사실 이럴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것뿐이었다. 화나지 않았다고 해서 갑자기 웃을 수도 없었다.
“혹시 또 궁금한 거 없어?”
있어. 많아, 아주.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형들에게 들었던 지나간 일도 묻고 싶었고, 조금 전 누나와 나누던 이야기에 관해서도 묻고 싶었다.
집이 엄하다던데 너의 어릴 적은 어땠었는지, 관리인이 있었다던데 갑자기 왜 없어진 건지, 평범하지 않은 너희 집이 하는 사업은 무엇인지, 전 여자친구 집안과는 어떤 사이인지, 네가 먼저 걸었다는 조건이 무엇인지.
하지만 가장 묻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내가 네 옆에 있어도 괜찮은 걸까.
차마 입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 말들을 억지로 집어넣었다.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 순서 없이 뒤죽박죽 섞여 버린 머릿속이 복잡했다.
“없어.”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아무 말 없이 나를 보고 있던 녀석의 입에서 갑자기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강세현의 시선이 고요하고 무거웠다.
“너,”
찰나의 정적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기다리기 힘들었다.
“나 좋아하는 거 맞지?”
갑자기 기운이 빠졌다. 심각하게 바라보기에 무슨 말을 하려나 했는데 겨우 저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인 건가 싶어서.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그거였어? 그렇게 내 눈치가 보이냐? 화 안 났다니까.”
“그래서 그래.”
“……뭐가?”
“정말 화 안 난 것 같아서 묻는 거야. 나 좋아하는 거 맞냐고.”
말뜻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내가 화를 안 내면 너를 안 좋아하는 게 되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이상해서.”
“뭐가 이상한데.”
“사정이 있었어도 결국 연락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연락 안 한 거잖아. 그럼 서운해하는 게 맞지 않나.”
“네가 이유는 충분히 설명했잖아. 그리고 왠지 그럴 것 같다고 예상했던 것도 있어.”
어딘지 모르게 다운된 분위기가 싫어 빨리 이 상황을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강세현은 이 대화를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근데 왜 궁금한 것도 없을까.”
“……뭘 궁금해했으면 하는데. 내가 안 묻는 게 너한테도 좋은 거 아냐?”
“좀 전에 말했잖아. 항상 물어봐 줬으면 한다고. 또 대충 넘어가려는 것 같아서 싫어.”
“대충 넘어가려고 하는 거 아니야.”
“진심으로 안 궁금한 거면 그건 더 슬픈데.”
“……그럼 내가 어쩔까. 어제오늘 뭐 했는지 꼬치꼬치 캐묻기라도 해야 해?”
“차라리 그게 낫지.”
이번에는 내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오전부터 계속되는 두통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아프던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일부러 이러는 거야?”
“뭐?”
“화내라고 일부러 이러는 거냐고.”
“무슨 말이 그래.”
“그러면 뭐야.”
내가 이런 사람인 걸 어쩌라고.
생각대로 모든 걸 다 쏟아 낼 수 있는 강세현과 달리 나는 참는 게 먼저인 사람이었다. 감정적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기 위해 매 순간 기분을 숨기는데 급급한 사람이 이럴 때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일수록 벽을 치는 습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졌고, 친구일 때 쉽게 꺼낼 수 있었던 말도 오히려 지금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음에 화를 내고 상대를 탓하는 건 내겐 여전히 너무나 낯선 일이었다.
“…….”
“…….”
서로 입을 다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각자 할 말만 난 뒤에 깔리는 침묵은 숨이 막혔다. 하지만 여기서 더 말했다간 다툼으로 이어질 것 같아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지금까지는 서로 눈치를 보거나 자존심을 세우는 성격이 아니라 싸우지 않는 줄 알았는데 그냥 그런 상황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사소한 일이 다툼이 되는 그런 상황이. 언제든 우리도 평범하게 싸울 수 있었는데.
살짝만 고개를 들어도 바로 마주할 수 있는 시선은 아까부터 일부러 피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강세현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성하야.”
꽤 오랫동안 계속될 것 같던 침묵은 예상과는 다르게 금방 깨졌다. 이럴 때 이름을 부르는 건 반칙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갑작스러운 부름에 움찔했지만, 여전히 시선은 깍지 낀 내 손끝으로 향해 있었다.
“그만하자, 이런 이야기. 이러려고 꺼낸 거 아니었어.”
그만하자는 말만 들었을 때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곧바로 뒷말이 딸려 오지 않았다면 그 짧은 순간 숨기지 못한 감정을 고대로 드러낼 뻔했다.
“……그만 못 하게 한 사람이 누군데.”
“그러게. 내가 뻔뻔했네. 처음부터 잘못한 사람은 난데.”
이런 상황이 오지 않아서 몰랐다. 고집을 먼저 내려놓는 사람은 강세현이었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만큼은 바로 되돌리기가 어려웠다. 이 상태로라면 계속 서먹한 분위기가 이어질 것 같은데 어떻게 해도 평상시의 표정이 나오지 않았다.
일부러 말을 돌렸다.
“공항에서 바로 온 거야?”
“어.”
“몇 시간 못 잤을 텐데 그냥 집에 가서 쉬지. 전화로 해도 되는데 뭘 일부러 왔어.”
“보고 싶어서.”
수십 번을 들었던 말인데 아직도 심장이 뛰는 건 고질병이었다. 수백 번 본 얼굴을 마주하면 여전히 감정이 흘러넘치는 것처럼.
“그러니까 나 좀 봐.”
계속 앞을 보고 있던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이런 표정이 보기 싫어서 안 쳐다봤던 건데. 강세현은 여전히 미안한 눈을 하고 있었다.
“너야말로 얼굴이 왜 그래. 표정 좀 펴라.”
“네가 계속 안 쳐다보니까 불안해서 그래. 이제 좀 낫네.”
그러면서 표정은 전혀 나아 보이지 않았다.
“화 안 낸다고 뻔뻔하게 따지던 놈이 불안하긴 뭐가 불안해.”
“불안해. 그것도 항상.”
남들이 들으면 놀랄 만한 말이었다. 다 갖춘 놈이 뭐가 그렇게 불안하다고. 의아하게 바라보자 알아서 대답이 들려왔다.
“너한테 차일까 봐.”
그건 더 못 믿겠는데.
고백 전부터 자신이 넘쳤던 녀석이었다. 인생이 바뀔 만큼 중요한 문제를 안고도 남자인 내게 쉽게 고백했고, 고백한 후에도 뻔뻔하게 자신을 좋아해 달라고 말한 대단한 녀석. 그런 강세현이 불안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종종 저런 황당한 말을 했다.
“하여간 말은 잘해.”
내가 피식 웃자 그제야 강세현의 얼굴에서 보였던 초조함이 사라졌다. 나를 물끄러미 보던 강세현은 대뜸 손을 내밀었다.
“뭐야?”
엉겁결에 그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몸이 휙 당겨졌다. 강세현은 방금까지 얼었던 분위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제 품속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아직 한기가 채 가시지 않은 품에서는 겨울 냄새가 났다. 뺨에 닿는 살결도 차가웠다. 그런데 입술이 내리는 곳은 이상하게 뜨겁게 느껴졌다.
“근데 아직 대답 안 했는데.”
“무슨 대답?”
“나 좋아하냐고 물었잖아.”
사실 가장 직접 전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지금까지 손에 꼽을 만큼 말한 적도 적고, 몇 번 말한 것도 ‘내가 너를 좋아하긴 하나 보다.’ 그저 흘려 지나가듯 한 게 다였다. 이번에도 그저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했다.
“좋아하니까 화 안 낸 거야.”
어깨 너머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두루뭉술한 내 대답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강세현은 속도 없이 웃었다.
“좀 아쉽긴 하다.”
“뭐가?”
“너 화내는 거 못 봐서.”
“……그게 보고 싶냐?”
“어. 우는 얼굴 빼곤 다 보고 싶어.”
“지금이라도 내줘?”
“아니. 잘못했어.”
무뚝뚝한 녀석이 어떻게 이렇게 나에게만큼은 다정하게 굴 수 있는지 궁금했다. 제 가족에게까지 차갑고 딱딱한 본성을 내보이면서 왜, 어째서 내게만.
등을 쓰는 손길이 부쩍 조심스러웠다. 온기가 지나간 자리가 욱신거렸다. 나를 향한 강세현의 애정이 곧으면 곧을수록, 무거운 죄책감이 마음을 묵직하게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