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그날 이후로도 우리 사이는 변함없었다.
여전히 서로밖에 몰랐고, 아무리 바빠도 서로에게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학교에 있는 동안에도 수시로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매일 함께 공부했다.
다만, 강세현에는 변화가 생겼다.
드르륵-. 드르륵-.
시험을 하루 앞둔 일요일, 강세현의 오피스텔에 있을 때였다. 저녁 먹는 동안 식탁에 올려 둔 강세현의 핸드폰이 바쁘게 울렸다.
“전화, 아까부터 계속 오는 거 아냐?”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이는데. 그럴 거면 꺼 두면 될걸, 강세현이 그러지 않는 데엔 분명 이유가 있었다.
“그러지 말고 받아 봐.”
“됐어.”
“나 때문에 그래? 오히려 지금 이러는 게 더 불편하니까 그냥 받고 오지?”
“……받으면 한참 걸려.”
“괜찮으니까 오래 걸려도 받고 와. 천천히 먹고 있을게.”
“다 먹을 때까지 안 끝날 수도 있어.”
“난 상관없는데, 혼자 먹어도.”
정말 상관없어서 한 말이었는데 강세현은 한결같이 탐탁잖은 표정이었다.
“아니면 차라리 기다릴까?”
“……최대한 빨리 끝내고 올게. 천천히 먹고 있어.”
강세현은 핸드폰을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순간까지 좁혀진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괜찮은 건가.
요즘 강세현은 바쁘다. 그러니까 정확히 일주일 전, 누나가 돌아간 그날부터 하루에도 몇 통씩 한국에서 전화가 걸려 오거나 메시지가 왔다. 전부 회사에서 온 연락이었다. 당장 시험이 코앞인데 수시로 오는 연락 때문에 공부를 하다가도 몇 번씩 자리를 비웠다. 나와 있을 때만 해도 이 정도니 아마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굉장히 이상한 일이었다. 아직 대학생밖에 되지 않는 사람에게 회사 일의 일부를 맡긴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강세현의 배경을 눈치채고 나서는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뭐가 모자라서? 지금도 네가 원하면 얼마든지 다른 데랑 자리 만들 수 있어.’
세진 그룹과 견줄 만할 정도라면 그냥 일반 대기업이라고만 생각하기 어려웠다. 대기업 중에서도 계열사를 수십 개 가지고 있는 곳일 테니까. 그런 기업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먼저 일을 배워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왜 강세현이 방학 때마다 일하러 다닌 건지 알 수 있었다.
30분이나 걸려서 완성한 파스타는 평소보다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탓에 영 별로였다. 안에 들어간 양송이버섯만 좀 먹다가 결국 포크를 내려놨다.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전화가 올 때마다 자꾸만 거리감이 느껴져 잊으려 했던 사실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졸업 후 한국에서의 삶. 사람들의 눈을 신경 써야 하는 생활. 그리고 사회에 내던져진 우리의 미래. 어느새 슈트 차림으로 출장을 다니는 강세현의 모습을 상상하는 게 괴로워졌다.
우리는 과연 함께할 수 있을까.
겨우 붙잡고 있던 희망이 어느새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강세현은 말한 대로 꽤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사이 겉면에 양념이 다 말라 버린 파스타는 도저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싱크대에 버렸다. 그리고 내가 먹은 접시를 정리하고 있는데 그제야 통화를 마친 강세현이 나왔다.
“다 먹은 거야?”
“어. 아, 파스타 다시 해 줄게. 좀 전에 한 건 못 먹을 것 같아서 버렸어.”
찡그린 얼굴이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이나 고쳐 달라고 했으나 유일하게 고쳐지지 않는 강세현의 버릇이었다.
“그냥 샌드위치 꺼내 먹을게. 번거로우니까 하지 마.”
왠지 그럴 거라 예상해서 알겠다고 말하고 식탁에 앉았다. 강세현이 샌드위치를 먹는 동안 말 상대를 해 주려고 앞에 앉았지만, 한동안은 말이 없었다.
“내일도 바로 올 거지?”
“어.”
“저녁은 어떻게 할까.”
한참 만에 꺼낸 말이 먹는 이야기라니. 저녁을 먹는 동안 내일 저녁 이야기를 한다는 게 마치 권태를 앞둔 연인들의 대화 같지만, 새삼 우리의 관계를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아서 오히려 기뻤다.
어쩌면, 내가 강세현과 그리는 미래의 한 장면이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10년쯤 지나도 지금처럼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으면 했다. 서로가 없는 곳에서 완전 다른 삶을 살게 되더라도, 함께할 때만큼은 보통의 사람처럼, 보통의 연인처럼.
나보다는 더 일반적이지 않을 강세현의 일상에 나 하나만큼은 쉬는 곳이 되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복잡한 이야기 말고, 내일은 뭐 먹을까, 시답잖은 말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음, 오랜만에 그거 먹을래?”
“뭐.”
“핫도그.”
기숙사 옆에서 파는 싸구려 핫도그는 그저 소시지와 볶은 양파가 들어갔을 뿐인데 짭조름하고 달곰한 그 맛이 가끔 생각나곤 했다. 형들이 모두 졸업한 후 기숙사에 갈 일이 사라져 벌써 반년째 먹지 못했다. 사실 가려면 얼마든지 갈 수 있는데, 몇 분 걸리지 않는 그 거리를 움직이는 게 귀찮아 사러 가질 못했다.
“좋아. 근데,”
흔쾌히 수락한 강세현은 뒷말을 붙였다. 조건을 걸 만한 일이 아닌데 ‘대신-’ 이라는 말이 따라왔다.
“귀찮으면 가지 마. 다른 거 먹어도 되니까.”
무뚝뚝한 말투에선 살가움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 그 말을 듣는 내 심장 한 켠이 간지러웠다.
새삼 다시 느꼈다. 이런 강세현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강세현은 내게 차일까 봐 두렵다고 했지만, 언젠가 이 사랑이 나를 향하지 않으면 어쩌나, 더 걱정되는 건 바로 나였다.
그래서일까. 툭하면 헤어지자고 했던 강세현의 전 여자친구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런 말 못 할 텐데. 아니, 생각조차 못 할 텐데.
“무슨 생각해?”
“어?”
“요즘 자꾸 딴생각하더라.”
딴생각이 아니라 네 생각이야, 인마.
그렇게 말해 주려다 뚱한 얼굴이 얄미워서 그냥 웃었다. 그러자 강세현은 먹던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벌써 걱정인데…….”
“뭐가?”
“방학 동안 어떻게 떨어져 있나 해서.”
“어차피 작년에도 그랬잖아.”
“그때랑 상황이 다르잖아.”
물론 그때는 사귀기 전이었지만, 그래도 강세현이 나를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아, 근데 하나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
“뭐.”
“그때, 며칠간 연락 안 된 적 있었잖아. 내가 보낸 메시지도 씹고.”
“아-아.”
“그때도 혹시 일 때문이었어?”
묻고 싶은 게 있다는 말에 다소 화색이 묻어나던 강세현의 얼굴이 일순 묘하게 변했다. 살짝 접힌 눈썹이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펴졌다. 완전히 찡그린 것도 아닌, 곤란한 표정이었다.
“아니.”
“그러면?”
“그땐 그냥 좀,”
“……좀?”
“생각을 안 해 볼까 해서.”
설마 일부러 그랬던 거냐는 내 물음에 강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근데 안 되더라.”
그 말 한마디에 욱해서 하려던 말을 쏙 집어넣었다.
하긴, 나도 안 되더라.
* * *
시험을 끝내고 오랜만에 기숙사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냥 차로 갔다가 거기서 바로 오피스텔로 가면 더 빠를 테지만, 아쉽게도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잠깐 정차한 것만으로 딱지를 끊긴 사람이 주변에 여러 명 있었다.
낯익은 운전기사의 얼굴을 보자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맨 처음 기숙사에 갔을 때가 떠올라야 정상인데 기현 형이 마중 나왔던 그때보다 강세현이 서 있었던 다른 날이 더 생각났다. 지금 가면 똑같이 강세현이 서 있을 것도 아닌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 정거장 남아 내릴 준비를 하는 도중에 강세현에게서 연락이 왔다.
강세현: [좀 늦어]
아무런 설명이 없다는 것은 늦는 이유가 정말 별거 아니거나 약속 시간과 거의 차이가 없을 만큼 조금만 늦을 거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잠깐 도서관이나 연구동에 들르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곤 일부러 묻지 않았다.
알았다는 메시지를 보낸 뒤 기숙사 정류장에서 내렸다. 그 뒤엔 예정대로 핫도그를 사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이미 어둑해졌을 즈음에 출발했으니 오피스텔에 도착했을 때는 어둠이 완연히 내려앉아 있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것도 무척이나. 고작 핫도그 하나 사 들고 가는 게 강세현을 위해 거창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만족스러웠다. 어제에 이어 문득 떠오르는 미래에도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곧 있으면 도착할 강세현을 기다리는 일조차 행복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서 메시지를 보내고, 복도를 걸을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나: [난 도착]
강세현: [나도 곧 도착해]
짧은 메시지에 괜히 웃음이 났다. 곧바로 다시 답장을 보내느라 항상 아무도 없던 문 앞에 누가 있는 줄도 모르고 핸드폰 액정만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건 또각, 하이힐 소리가 복도에 울렸을 때였다.
낯익은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기껏해야 두 번밖에 보지 못했는데 이미 익숙해진 실루엣이 나를 향해 서 있었다.
순간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닌지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상대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매우 흥분했었고, 화가 나 있었고, 그야말로 감정적인 상태라서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서로 몇 초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1초, 2초,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채 2m도 되지 않는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상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예전과는 완전 다른 모습이었다. 살포시 미소 짓는 얼굴에는 그날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여유나 자신감이 차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강세현에게 다른 말을 전해 듣지 못했으니 그때처럼 상대가 약속 없이 찾아온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바뀐 비밀번호를 누르며 욕을 내뱉는 대신 금테가 둘린 녹색 상자를 두 손으로 가지런히 들고 집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자에는 뉴욕에서 무척 유명한 베이커리 로고가 박혀 있었다.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자그마한 마카롱 하나가 햄버거 가격보다 비싼 곳이었다. 미슐랭 3스타를 받은 셰프가 운영한다는 그 베이커리는 줄을 서고도 쉽게 살 수 없을 만큼 맛있기로 소문나 있었다.
그 앞에서 핫도그를 든 내 손이 무척 초라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