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세현이 친구분, 맞죠?”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한 번 더 듣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 다른 사람에게 우린 그저 친구일 뿐이었지.
그런 거면, 내가 여기서 전혀 곤란해할 이유가 없었다. 친구를 보러 왔다가 우연히 친구의 전 여자친구를 마주친 게 예상치 못한 일이라 조금 당황스러울 순 있어도, 절대 곤란할 일은 아니었다.
뒤늦게 나도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무렇지 않은 척은 자신 있었는데 혹시라도 목소리가 떨렸을까 봐 인사를 한 후 바로 상대의 눈치를 봤다. 다행히 상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다음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갑자기 상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땐, 정말 미안했어요.”
너무나 솔직한 사과였다. 표독스럽게 나를 노려보던 이와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숨김없고 바른 사과였다. 당연히 반말이 나올 줄 알았던 그녀의 입에서는 깍듯한 존댓말이 나왔다.
“그날 제정신이 아니었어서……. 민폐였죠, 저. 불쑥 찾아간 것부터가 예의가 아니었는데, 미리 약속한 사람한테 폐 끼치고 인사도 없이.”
“……괜찮아요.”
괜찮지 않아도 그렇게 말했다. 그때 그 상황보다는 지금이 더 최악이었다.
그날 일을 떠올려 보면 나는 사과를 받아야 하는 게 맞았다. 도와주고도 오히려 욕을 먹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데 왜 사과를 받고 그전보다 더 기분이 씁쓸한 건지 모르겠다.
차라리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나았다. 세진 그룹 회장의 손녀라는 사실이 명확히 인식될 만큼 예의 바른 지금 모습보다는 차라리 무례하고, 당돌하고, 제멋대로인 그 모습으로 기억하는 게 나았다. 그녀가 좋은 사람이 될수록 내가 더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나만큼이나 본인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강세현은 친구로 지내는 동안에도 좀처럼 먼저 여자친구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나 또한 잘 묻지 않았지만, 언젠가 꽤 취한 술자리에서 물은 적이 있었다.
‘어떻게 사귀게 된 거야?’
‘친구였어.’
‘진짜?’
‘어. 친했어. 그것도 꽤.’
그때 강세현은 매번 싸우면서도 계속해서 사귀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화낼 때 빼고는 괜찮은 애거든.’
이제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얇은 눈꼬리가 예쁘게 휘었다. 전보다 훨씬 캐주얼한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단정한 외모만큼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필이면 그럴 때 마주쳐서 추한 꼴만 보였어요.”
“아니에요.”
“오히려 감사 인사를 해도 모자라는 상황이었는데, 창피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했었나 봐요. 그래도 그러면 안 됐어요. 미안해요.”
요즘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강세현도 그렇고, 이젠 강세현의 전 여자친구까지. 미안하다는 말만 들으면 되레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들에게 잘못한 게 없고, 사과받아야 마땅한데 왜. 미안하다는 말이 반복될수록 속에서 돌아가던 톱니바퀴가 덜거덕거리며 멈추는 느낌이었다.
“사실 세현이가 친구라고 가까이 두는 사람 없는데, 계속 궁금했었거든요.”
나도 궁금했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전에는 같이 있어도 누구랑 연락하는 법이 없다가 어느 날부터 통화도 하고 문자도 주고받고 그러길래…… 그래도 설마 그렇게 가깝게 지내는 줄 몰랐어요.”
“아…….”
“알았으면 미리 아군으로 만들어 놓는 건데 아쉬워요. 우리도 친해질 수 있었을 텐데.”
아군은커녕 적군이 되어 버린 내가 그녀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속으로 기도했다. 한시라도 빨리 강세현이 도착하기를. 1초, 2초 흘러가는 시간이 더디게만 느껴졌다. 곧 도착한다던 녀석은 왜 이리 안 오는 건지,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멈춰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이럴 때 여유롭게 웃으며 거짓말로라도 그랬냐고 맞장구쳐 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오히려 얼굴이 빳빳하게 굳어 갔다. 대답이 늦어지는 걸 눈치챈 그녀는 말을 돌렸다.
“세현이는 아직 안 왔나 봐요.”
“네. 근데 거의 다 왔다고 했어요.”
“먼저 들어가세요. 비밀번호 알고 있는 거 맞죠?”
“어……. 여기서 기다리게요?”
내 물음에 그녀는 맞물린 입술을 꾹 눌렀다.
“그게 나을 것 같아서요. 오늘도 연락 없이 온 거라서 아마 화낼 것 같아요.”
“…….”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안으로 들일 수도 없고, 그녀와 함께 여기에 서서 강세현을 기다리는 건 더 웃긴 일 같았다. 다시 차로 돌아가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그거야말로 가장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색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왜 안 들어가고 있어?”
평소와 다름없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뒤를 돌자 익숙한 인영이 걸어오고 있었다. 강세현의 시선은 오롯이 나에게만 박혀 있었다. 분명 여기까지 왔다면 내 뒤에 있는 이가 보이지 않을 리 없는데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
“추운데 왜 여기 서 있냐고.”
그걸 몰라서 묻냐.
네 눈엔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안 보이냐는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바로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온 강세현은 아무렇지 않게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렀다. 진짜로 안 보이는 건 아닐 테니 백 퍼센트 모른 척하는 게 분명했다.
억지로 입을 열었다.
“저기,”
“모르는 사람처럼 부르지 마.”
“있잖아.”
“안 친한 사람처럼 부르지도 말고.”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키패드를 누르는 팔을 붙잡았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강세현은 나를 천천히 내려다봤다.
혹시 화났나 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놀랍게도 강세현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확실한 무표정이었다.
조금 전 그녀와 단둘이 서 있으면서 강세현이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잠깐 생각했었다. 보자마자 짜증을 내거나 한숨을 쉬거나, 심하면 화를 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전부 틀렸다. 사람은 끊임없이 배워 나간다던데 그만큼 봐 왔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강세현을 잘 모르고 있었다.
정답은, ‘무시’였다.
“누가 왔는데…….”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곧았던 시선이 삐뚜름해졌다. 나를 향해 있던 진갈색 눈동자가 내 뒤편을 향했다.
“그래서.”
“……어?”
“그래서 이번엔 어떻게 해야 하는데. 같이 들어가기라도 할까.”
묻는 말이었으나 단단한 어조였다. 마치 무언가를 경고하는 것처럼. 단지 어색하기만 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
“…….”
차라리 진짜 볼일이 있는 사람이 말을 걸어 주면 좋을 텐데, 나와 있을 때 그렇게 말을 잘하던 강세현의 전 여자친구는 정작 기다리던 사람의 등장에 더 얼어붙었다. 하는 수 없이 이번에도 입을 뗀 사람은 나였다.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하냐, 인마. 지금 제일 뻘쭘한 사람이 나인 거 알지?”
그러니까 어떻게 좀 해 보라고.
내 표정을 읽은 강세현은 예상대로 한숨부터 쉬었다. 그리고 나를 몇 초 동안 응시하더니 문을 열었다.
“들어가 있어. 금방 올게.”
그리고 마지못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 내려가자.”
내가 남겨지고 강세현과 그녀가 떠나는 건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었으나 몇 가지가 달랐다.
그때는 이 현관문 안이었고, 지금은 밖이라는 것.
그때는 새벽이었고, 지금은 저녁이라는 점.
하지만 가장 다른 것은 역시나 우리 관계였다.
그때는 강세현을 내보내려 설득하던 친구였고, 지금은 오히려 강세현을 붙잡아야 할 연인이었다.
서둘러 문을 닫았다.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모순적인 감정이 일었다. 어떻게 해 주길 바랐으면서 이제 와서 붙잡고 싶다니.
하지만 당연하게도 나설 수 없었다.
굳게 닫힌 문 안에서 강세현을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 * *
삐- 삐- 삐-.
오랜 적막을 뚫고 짧은 기계음이 여러 번 울렸다. 그리고 몇 초 후, 문이 열렸다.
강세현은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 시계가 한 바퀴를 다 돌기도 전에.
“갔어?”
순수하게 궁금해서 한 질문에 반듯했던 이마가 구겨졌다. 그제야 갔냐는 말보다는 왔냐는 말을 먼저 해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권성하.”
높지도 낮지도 않은 언성이 왠지 위협적이었다. 아니, 그보다 이름이 문제인 건가. 강세현이 날 저렇게 부르는 건 항상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뿐이었다.
이럴 때 난 항상…….
“무시할 수가 없었어.”
강세현이 말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그쪽에서 먼저 말 걸었거든.”
“무슨 말.”
“네 친구냐고.”
핑퐁처럼 계속 오갈 줄 알았던 대화가 초반에 뚝 끊겼다. 아마 강세현도 그 순간 내가 생각한 것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친구가 아니더라도, 절대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전에 일 사과하더라. 그날 미안했다면서.”
거짓말은 전혀 보태지 않았다. 내가 강세현과 이렇게까지 친한 줄 알았더라면 아군으로 만들어 둘 걸 그랬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과받았으면 들어가지, 왜 거기 있었어?”
“일부러 서 있었던 거 아냐. 들어가야 하나, 기다려야 하나 고민하는데 마침 네가 온 거야.”
“처음부터 그런 고민을 왜 하냐고. 그냥 내버려 두고 들어가면 되지.”
“그게 그렇게 쉽냐.”
다 네 기준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붙이려다 말았다. 여기서 한마디 더 했다가는 괜히 화를 돋울 뿐, 불만이 가득한 강세현의 기분을 조금도 낫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인의 전 여자친구랑 이야기 나누는 것보다는 쉬울 것 같은데.”
역시나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