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나: [일어났어?]
날이 밝자마자 강세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강세현은 오늘 오전에 마지막 시험이 하나 있었다.
강세현: [이미 학교야]
나: [벌써?]
강세현: [도서관에서 밤샜어]
강세현: [끝나면 오피스텔 들렀다가 갈게]
시험이 끝나면 강세현이 아파트로 오기로 했지만, 그새를 참지 못하고 내가 먼저 오피스텔로 갔다.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빨리 내 상황을 설명하고 싶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우리의 관계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길 원했다. 당장 휴학 절차도 밟아야 하고, 지금 사는 아파트 계약에 관한 문제도 남아 있지만 그런 것들보다 우선은 이게 더 급했다.
그전엔 할 수 없었던 말도 왠지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전까지는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안 했으나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놓이자 오히려 부담이 덜어졌다.
어떤 표정을 지을까.
강세현이 새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친구인 소라조차도 나를 대신해 매번 불같이 화낼 정도니 강세현은 어쩌면 그보다 더 나를 안타까워할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알리고 싶지 않은 사실까지 알게 해서 나 혼자 괴로울 일을 상대까지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동정이든 위로든, 강세현이 어떻게 느끼든 간에 무조건 알려야 했다. 휴학을 해야 할 다른 핑곗거리가 없었고, 있다 한들 믿어 주지도 않을 게 분명했다.
‘만약 한쪽이 다른 데로 가게 되면 어쩔 거야?’
‘그럼 장거리 연애가 되는 거지.’
어느 정도 떨어져 있다 해서 틀어질 사이는 아니지만 그것과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 강세현이 사회인이 되고 난 뒤, 내가 얼마 동안 계속 학생으로 남아 있을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정말 운이 나쁘면 꽤 오랫동안 그럴 수도 있었다.
한쪽만 사회로 나가면 여전히 학생으로 남아 있는 한쪽이 상대를 따라가지 못해 생길 갈등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어차피 우리는 그런 고민조차 필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부터 강세현은 내가 감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에 있었으니까.
‘너랑 절대 못 헤어지니까 그렇게 말한 거야.’
그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는데 이제 와서 그때 대답을 들어 놓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와 절대 못 헤어진다고 말해 줬으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시련을 조금은 나눠도 괜찮겠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기적인 건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이 왔으니 이제는 말해도 괜찮다는 생각부터가 나쁘다는 것도. 강세현이라면 반드시 이해해 줄 거라고 확신하는 내가 비겁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순전히 내 욕심이었다. 너와 같은 길을 갈 순 없는데, 너를 포기하고 싶진 않으니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해 달라고.
내게 없는 여유가 네겐 있으니까.
꽉 막힌 고속 도로에서 빠져나와 다운타운으로 들어서자 좁은 골목마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에겐 최악의 날이 남들에겐 똑같은 하루일 뿐이었다.
강세현의 오피스텔에 도착할 때쯤, 그 근처에 작은 가방을 멘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흰색 밴을 도로가에 세워 놓고 두리번거리는 이도 있었고, 얼굴만 한 크기의 카메라를 들고서 담배를 피우는 이도 있었다. 오피스텔 앞을 기웃거리는 모양이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도착한 후에 허둥대는 주차 관리인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나요?]
[아, 네. 그게 좀…….]
확실히 무슨 일이 있는지 평소 두 명밖에 없던 경비가 몇 명 더 늘어 있었다. 슬쩍 쳐다본 백미러에는 인자하기만 했던 마이클이 입구로 들어오려는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모습이 보였다.
[들어가도 괜찮은 거죠?]
[번거로우시겠지만 그대로 지하 주차장으로 가 주시겠습니까? 올라가는 게이트에서 내리시면 그쪽에서 저희 직원이 주차를 도울 겁니다.]
더 묻고 싶었으나 지금은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도 설명할 여유가, 그리고 내게도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안내를 받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핸드폰이 울렸다. 혹시나 타이밍 좋게 강세현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하지만 시간을 떠올리곤 이내 아닌 걸 알았다. 강세현의 시험이 끝나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그럼 이 시간에 누구지.
지금처럼 오전 시간에 내게 전화를 걸 이는 강세현 말고는 없었다.
지하에서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 주차 관리인이 서 있었다. 바로 주차를 맡기려다가 핸드폰 화면에 뜬 번호를 보고 핸들을 꺾었다. 서둘러 빈 곳에 차를 꽂아 놓고 우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접니다.
평소보다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건 이는 새아버지의 비서였다. 어젯밤 내가 했던 이야기를 그새 전하고 답을 받아 온 것 같았다.
- 당장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역시 바로 오라고 하던가요?”
- 그게…… 그렇게 됐습니다. 일이 좀 복잡하게 되어서…….
그럼 남은 짐은 어쩌지. 버려야 하나.
새아버지가 보내 준 돈으로 산 것들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아마 몇백만 원짜리 액자가 걸려 있더라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단번에 머릿속에 떠오른 건 강세현이 사다 준 것들이었다. 소파, 테이블, 티브이, 커피 머신, 그리고 그 밖에도 강세현이 두고 간 자잘한 물건들이 꽤 많았다.
처음 시카고에 왔을 때는 언제라도 떠날 수 있게 준비해 뒀었는데.
일부러 늘리지 않았던 짐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늘어 버렸고, 곳곳에 강세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지금의 공간은 미련투성이가 되었다.
- 오셔서 사모님과 좀 있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당분간 사장님께서 옆에 있어 드리기 힘들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많이 바쁜가요?”
- ……지금 많이 힘드십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그 사람이 하루라도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하는 이유는 엄마 때문일 거라고 예상했다. 엄마가 나를 많이 의지하는 걸 아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처럼 정신없는 때에 일부러 비서를 시켜 내게 전화를 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엄마를 챙길 것 같은 사람이 당분간 옆에 있어 주기 힘들다는 게 의아했다.
“옆에 있기 힘들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질 않는데요. 집에 못 들어간다는 건가요?”
- 아마…… 일단 한동안은 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한동안이 어느 정도인데요?”
- 자세한 건 저도 다 말씀드릴 수 없어서…… 우선은 그렇게만 알아 주십시오. 오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비서는 정말 본인 할 말만 전하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통화 시간은 채 5분도 되지 않았다. 우습게도 그토록 하고 싶지 않을 때는 늘 길었던 통화가, 지금처럼 가장 중요할 때는 너무 짧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 서둘러 인터넷 창을 열었다. 어제 찾아보았던 포털 사이트에서 회사 상호와 새아버지 이름을 검색하자 이번에도 역시 기사가 먼저 올라와 있었다.
다시 한번 느꼈지만, 참 편리한 세상이었다. 수없이 많은 중견 기업 중 하나일 뿐인데 고작 몇 번의 클릭 하나로 내부 사정을 전부 알 수 있다니.
「……V사 강현석 대표는 실적 없는 기업에 독점 권한을 넘기면서 경제법 위반 혐의가 지적되었다. 이에 내부 임원 및 주주는 위와 같은 중대 사안에 대해서 경쟁력 이점, 실적 등이 사전에 면밀하게 조사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약을 체결한 것은 대표자의 직권 남용이며 회사의 실을 야기하는 범법 행동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브랜드와 가치를 저하시킨 강 대표에 대해 고소를 시행하며 그에 대한 손해 배상을 엄중히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추가로, 강 대표와 주변 측근이 해당 기업과 관련해 비리나 부적절한 인사가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루어지고……」
새아버지는 주주들에게 업무상 배임죄와 횡령죄로 고소당해 경찰 조사를 받고 있었다. 사업 확장을 계획하는 단계에서 이미 다른 이들의 반대에도 무리한 리스크를 안은 채 진행했고, 득보다 실이 발생하는 상황이 왔으니 그들에겐 당연한 조치였다.
‘엄마가 어떻게든 너 졸업은 시켜 줄게.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어젯밤, 걱정하지 말라던 엄마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걱정할 건 내 졸업이 아닌데. 이 상태로 대체 어떻게 나만 생각하라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로써 강세현에게 말해 줘야 할 사실이 한 가지 더 늘었다.
내가 어쩌면 범죄자의 자식이 될지도 모른다고.
일부러 동정을 바라는 것도 아닌데 마치 신파극의 주인공처럼 불운이 하나둘씩 늘었다.
나는 한참을 그곳에 앉아 있었다.
내가 가려던 곳이 강세현의 오피스텔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여러 가지를 생각하느라 어두컴컴한 지하 주차장에 한참을 있었다.
드르륵-.
그러다 갑작스러운 진동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소리가 들리는 쪽보다 시계로 먼저 눈이 갔다. 거의 30분이 지나 있었다.
핸드폰 액정엔 기현 형의 이름이 떠 있었다. 형에게 단체 채팅창이 아닌 개인 메시지를 받아 보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서기현: [혹시 세현이랑 같이 있어?]
강세현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내게 연락한 것 같아서 아니라고 답을 보내려 했다. 아마 곧 시험이 끝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보라는 말도 함께.
그런데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서기현: [세현이 괜찮대?]
이게 무슨 말이지.
기분이 싸했다. 이 이상 더 최악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불안함은 똑같이 밀려왔다.
@MINT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