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74화 (74/96)

#74

“그, 박 사장. 며칠 전에 말했던 거 알지? 현세가 요즘 자동차 쪽 애쓰는 거.”

“그럼요.”

“내가 얼마 전에 그것 때문에 구매 부장하고 얘길 좀 나눴는데, 조만간 그쪽 입찰 담당자 소개를 해 준다더라고.”

“예.”

“근데 원래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지? 나 정도 되니까 해 주는 거지, 원래는 누군지 알려 주는 것도 안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이 얘긴 우리끼리만 알자고, 응?”

비밀로 할 내용이면 좀 조용히 말해 주면 좋으련만 밖까지 전부 들릴 만큼 큰 목소리였다.

“어쨌든 그렇게 약속했는데 알다시피 대기업이라 그쪽이 좀 깐깐한가 봐. 얼마 전엔 라이터 불 좀 잠깐 빌렸다가 그걸로도 한 소리 들었다는 거야. 한국에선 눈이 많아서 밥도 맘대로 못 먹는다잖아.”

“아, 요즘은 좀 까다롭죠. 특히 현세가 기업 이미지 때문에 심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맞아. 하여튼 그래서 좀 눈치를 살피고 있었는데 다음 주에 미국에서 무슨 유명한 전시회를 한다네?”

“오토쇼……, 말입니까?”

“몰라. 뭐 그 비슷한 거였던 것 같아. 일단 그쪽에서 소개를 받기로 했는데…….”

미국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절대 평범한 심부름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리고 이런 예감은 늘 틀리는 법이 없었다.

“같이 갈 사람이 좀 필요해서 말이야.”

노골적인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아주 찰나에 사장님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딱히 다른 말씀은 하시지 않았지만, 눈치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저로 괜찮으시면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 말하자 상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날짜랑 전시회 일정만 알려 주시면 필요한 건 미리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항공권이랑 호텔 같은 것도 혹시 알아보셔야 하면-”

“아니, 아니. 그건 이미 다 알아봤어.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런 건 필요 없고…….”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거들먹거리던 말투가 갑자기 공손해졌다.

“김 사장도 알잖아. 나 아들 있는 거.”

“예. 이사님으로 계시죠.”

“그…… 원래는 우리 아들이랑 갈려고 했거든. 입찰 담당자한테도 부자가 같이 인사하는 쪽이 좋을 거라고 그래서. 항공권도 다 끊어 놨고 사전 등록도 다 해 뒀는데, 그 녀석이 좀…… 하여튼 사고가 있었어.”

사고라는 말을 들으면 놀랄 만도 한데 사장님과 나는 놀라지도 않았으며 무슨 사고냐고 묻지도 않았다. 한성 사장의 늦둥이 아들은 나이 서른에 일찍 이사 직함을 달고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각종 안 좋은 소문을 달고 살았다. 이번엔 대체 무슨 사고를 쳤길래 그러는지 몰라도 어쨌거나 함께 가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물론 나 혼자 가도 되겠지만, 알다시피 내가 영어가 좀 짧잖아. 유학 갔다 온 아들 있다고 자랑까지 해 놨는데 혼자 덜렁 가기도 좀 그렇고.”

“아……. 그러면…….”

“어차피 구매 부장이야 이미 우리 아들 만난 적 있어서 속여도 속을 사람도 아니고 대신 사정을 말했더니 아무나 데려오라네.”

“아니, 그렇지만 그러고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어찌합니까.”

“어차피 입찰 담당자는 한 번 보고 말 사람인데 뭐.”

“아무리 그래도…….”

사장님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는 소릴 하고 싶으신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랬으나 이번에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나중에 들키시면 오히려 곤란하시지 않겠습니까.”

“음……. 그런가?”

“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냥 사장님만 인사하셔도 충분할 것 같은데 꼭 그래야 한답니까?”

가장 이상했던 부분이었다. 단순히 유학 다녀온 아들을 자랑했다는 이유만으로는 꼭 아들과 가야 한다고 고집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았다.

“아니, 뭐. 그러면 보기 좋을 거라고만 했지 꼭 그래야 한다곤 안 했어. 그럼 그냥 같이 가기만 해 줬으면 좋겠는데.”

“네. 그럼 자세한 건 누구랑 연락하면 될까요?”

“어. 저기, 밖에 임 차장이라고 있어. 일단 그쪽 가서 말해 봐.”

“네.”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기회가 왔을 때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까지 예의를 차리고 돌아서려는 순간.

“아, 그리고-”

‘어이야.’ 사장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 ‘어이’든 ‘야’든 어느 쪽도 듣기 좋진 않았다.

“내 양복 한 벌 해 줄 테니까 그것도 임 차장한테 얘기하고.”

“그건-”

괜찮다고 하려다 순간 입을 다물었다. 생색내기 좋아하는 상대일수록 이럴 땐 넙죽 받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하마터면 실수를 할 뻔했다.

“감사합니다.”

예상대로 상대는 무척 만족한 듯 웃었다. 그러곤 농담처럼 말했다. 공짜로 미국 데려가 주는데 오히려 내가 양복을 얻어 입어야 하는 게 아니냐며. 너무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자 새까만 고급 승용차 앞에서 누군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저런 사람을 모시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존경심이 솟았다. 가까이 다가가 깍듯이 인사를 건네자 대뜸 이런 말이 돌아왔다.

“아-아. 당신이야? 그 망나니 대타. 뭐 반반하니 괜찮네.”

잠깐이라도 존경심을 가졌던 내가 원망스러웠다. 일개 담당자가 심부름을 시킬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 회사는 단순히 뿌리만 썩어 있는 게 아니었다. 사장이나 직원이나 말하는 본새도 본새지만, 보자마자 반말하는 버릇은 상당히 짜증이 났다.

“근데 괜찮겠어? 사장 아들 노릇 하기 꽤 힘들 텐데.”

“아, 저는-”

“하긴 어떻게 해도 저 집 아들보단 나을 테니까, 뭐. 솔직히 나라도 쪽팔려서 내놓겠어? 미친 생각 같아도 이렇게라도 해야지. 이번에 현세 쪽에 들어간 소문 수습 못 하면 지금까지 만들어 뒀던 혼담 다 깨진다는데.”

사장 아들 노릇 하기 힘들겠다길래 단순히 사장 아들을 대신해서 사장을 보필하러 가는 거라고 말을 정정해 주려고 했다. 그런데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끊어 버린 상대는 내게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혼자서 떠벌리기 시작했다.

“구매 부장 그 새끼도 받아먹은 돈은 많은데 괜히 일 그르칠까 봐 같이 사기 치자는 거 아냐.”

“…….”

“버러지 같은 놈. 발주 두고 수천 해 먹더니 홀랑 노름으로 날려 먹고 나중엔 뚜쟁이까지 해. 뭐, 좋다고 주는 놈이 있으니 하겠지.”

“…….”

“이놈이나 저놈이나 내가 봤을 땐 다 똑같은 놈들이야. 안 그래?”

내가 봤을 땐 깃털보다 가벼운 당신도 만만치 않은데. 어차피 상대에겐 한낱 하청 업체 사원일 뿐인 내게 무슨 말을 해도 괜찮을 거라고 믿는 모양인데, 정말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쪼르르 달려가서 이를 일은 절대 없을 테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절대 모르는 거니까.

그나저나 그 덕에 왜 한성 사장이 자꾸만 아들 노릇을 하길 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까 사장님과 내게 했던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었다는 것도.

현세 쪽 높은 사람의 자제와 혼담이 오갔나 본데 그 후에 그쪽에 안 좋은 소문이 퍼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를 내세워 아들 이미지를 바꿔 보려고 하는 거고. 현실성 제로에 가까운 터무니 없는 생각에 속으로 실소가 터졌다.

“출국 날짜가 정확히 언제죠?”

어쨌거나 사장만큼이나 싫은 상대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 짧게 필요한 정보에 관해 물어봤다.

“다음 주 월요일.”

“……4일 후, 맞아요?”

“워낙 갑자기 결정한 일이니까. 항공권은 우리 쪽에서 알아서 바꿀 테니 여권 주고. 나머지는 문자로 넣어 주라고 할 테니까 이제 가서 일 봐요.”

이제 와서 존댓말을 쓰는 척하던 상대는 그러면서 내 번호를 받아 갔다. 그리고 양복에 관해서 이야기하자 삐딱한 웃음이 따라왔다.

“겨우 그런 거에 넘어간 거야?”

속으로 조금 전까지의 생각을 정정했다. 뻔뻔한 사장보다 그 밑에 당신이 더 싫다고.

자리로 돌아와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한성 사장은 사장님과 거의 두 시간 동안 점심을 먹은 후 고작 20분 공장을 둘러보고 갔다. 예상대로 사장님은 복귀하시자마자 내게 다가왔다.

“성하야, 괜찮겠냐.”

안 괜찮아도 어쩔 수 없었다. 이미 평범하지 않은 부탁을 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고, 내가 거절할 경우 사장님께서 곤란해질 게 분명했다. 사실 답을 알고 있는 사장님은 쓴웃음을 지으셨다.

아까 임 부장에게 들었던 말을 전하려 했는데 그 얼굴을 보고 말았다. 단지 통역이 아니라 정말 사람들 앞에서 사기를 쳐야 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 사장님의 마음이 더 무거워질 것 같았다. 진짜 이유를 알았어도 내가 억지로 출장을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그럴 이유가 없었다.

“이런 말 해도 별로 위로 안 될 테지만 내가 꼭 사례하마.”

“네. 전 옷보다 돈이 좋아요.”

“그럼, 알지.”

툭. 두어 번 어깨를 두드린 사장님은 다시 공장을 둘러보겠다며 가셨다.

오후 느지막이 한성의 박 대리라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세한 일정을 이메일로 보내 주겠다는 소릴 듣고 그의 말대로 5분 후에 메일함을 열었지만 아무것도 도착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러려니 신경을 끄고 있다가 퇴근 즈음에 한 번 더 확인하자 메일이 와 있었다.

「오토쇼 출장 일정」

본문에는 묵게 될 호텔 정보와 참관하게 될 오토쇼 정보가 적혀 있었고, 항공권은 파일로 첨부해 놨었다. 미국 내에서도 오토쇼는 워낙 많아서 어디로 가게 될지 궁금했는데, 항공권을 확인하곤 순간 얼어 버렸다.

항공 인천 ICN(12.3 월 09:20) → 시카고 ORD(12.3 월 08:05)

북미 최대의 오토쇼가 시카고에서 열린다는 걸 잊고 있었다.

마음이 술렁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