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15. 재회
머릿속은 곧 백지가 되고 굳어 버린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수백 번, 수천 번 상상해 왔던 일이 눈앞에 벌어졌는데 여태껏 했던 연습은 모두 부질없었다. 막상 눈앞에 닥치자 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고객님, 이쪽입니다.”
승무원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이 돌아왔다. 좌석 사이로 슬쩍 보이는 뒷모습을 보곤 덜컥 겁이 났다.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천천히 발을 옮겼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얼굴이 조금씩 시야에 들어왔다. 살짝 올라간 눈썹 아래 또렷한 갈색 눈동자. 그 아래 그린 듯한 오뚝한 코와 도톰한 입술. 원망스럽게도, 가지런한 옆모습은 단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다만, 조금 더 깊어진 이목구비가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너무 똑같았다. 언젠가 그려 보았던 미래의 강세현과. 깔끔하게 넘긴 포마드 헤어와 핏이 잘 맞는 그레이 색 정장이 소름 돋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울컥, 속에서 뜨거운 게 올라왔다.
이런 나를 눈치채지 못한 상대는 살짝 눈을 내리깐 채 영자 신문을 읽고 있었다.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지금 내 꼴이 어떻지.
급하게 뛰어오느라 엉망인 몰골과 흐트러진 옷차림 따위가 뒤늦게 신경 쓰였다. 지금이라도 어떻게 해 보고 싶었지만 팔에 걸고 있던 재킷은 구겨져 있었고, 셔츠 소매는 볼품없이 둘둘 말려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 다른 곳으로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 따뜻한 수건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흐트러진 호흡을 정리할 틈도 없이 승무원이 다가와 수건을 내밀었다. 당연하게도 내가 마지막이었다. 준비해 준 수건을 받아 들고 죄송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툭.
그때였다. 옆자리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 건.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갔다.
“……!”
커다랗게 치켜뜬 눈 위로 반듯했던 이마가 푹 패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선명한 눈동자가 하릴없이 흔들렸다.
따뜻한 수건을 들고 있는데 손끝이 차가워졌다. 이내 긴장으로 입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그새 제대로 호흡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아 속이 답답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몇 초간 가만히 그렇게 있었다.
“…….”
오랜만이네. 넌 여전하구나. 잘 지냈어? 궁금했었는데. 수많은 말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지만, 그 어느 것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상대 역시 그랬다.
몇 초 후, 놀란 얼굴이 서서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고 그 후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강세현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신문을 바라봤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내가 예상했던 반응 중 가장 높은 확률을 가진 답이었다.
우리가 다시 만나면 과연 너는 어떻게 할까. 수없이 한 상상 속에 강세현은 열이면 아홉은 나를 무시했다. 길을 걷다가, 카페에서, 심지어는 영화관에서 마주친 적도 있었으나 항상 내가 안녕이라고 말하면 강세현은 말없이 지나갔다.
현실에서 나는 안녕이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지만, 강세현이 나를 무시하는 건 정답이었다.
아주 오래전, 강세현과 그의 전 여자친구의 헤어짐을 보며 그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다정하기만 했던 연인이 한순간에 차갑게 변하면 어떨까. 그때 나는 분명 원망스러울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아니었다.
마지막 이별의 순간까지 다정했던 이가 차갑게 나를 무시했는데, 나는 이 순간까지 그리웠다. 따끔, 하고 어딘가 짓눌린 듯 아프지만 그래도 이런 것까지 너무나 강세현다워서. 냉담한 눈빛조차 속없이 좋았다.
그 이후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번 돌아간 시선이 다시 내게 돌아오는 일은 없었고, 상대가 관심을 두지 않으니 내가 말을 붙일 일도 없었다.
하지만 실례라는 걸 알면서 자꾸만 보고 싶어서 수시로 옆을 힐끔거렸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게 잘 안 돼서. 그리고 같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꿈같은 이 상황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참 뻔뻔하다.
헤어지자고 한 사람도 나고, 보지 말자고 한 사람도 나면서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미련을 두는 걸까.
지금까지 강세현과 재회하는 상상을 수십 번 넘게 했지만 늘 스쳐 지나가는 정도에 그쳤다. 이렇게 바로 옆에서 계속 지켜볼 수 있으리라고 감히 생각하지 못했었다. 나중에 이 기억을 잊는 데 또 얼마가 걸릴지 모르지만, 평생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복했다.
이륙하고 얼마 후, 나는 이어폰을 꽂고 영화를 봤다. 신문을 보던 강세현은 노트북을 꺼내 일을 하는 듯했다. 살짝 구겨진 미간은 그가 지금 엄청 집중을 하고 있다는 걸 뜻했다.
보는 영화가 20분은 지나갔는데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애초에 그쪽으로 신경을 쓸 수 있을 리 없다.
“하아…….”
마우스 휠을 움직이던 손이 멈추고, 한참 동안 모니터를 보던 이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 버릇은 아직 못 고쳤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이사님. 불편하신 건 없으십니까.”
깍듯이 존칭을 쓰는 사람은 누가 봐도 강세현의 부하였다.
누군가 말을 걸었으니 나였으면 바로 대답했을 텐데 천천히 왼쪽으로 돌아간 고개가 몇 초간 상대를 응시했다. 그리고 나온 대답은 정작 상대가 물은 것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그냥 본부장이면 됩니다.”
이사든 본부장이든 대단한 건 똑같은데 아무래도 한쪽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부하로 보이는 사람은 곧바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입니까.”
“도착하시면 곧바로 그쪽 회사로 넘어갈 텐데 중간에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회의가 10시라면서요.”
“네.”
“중간에 어딜 들를 시간도 따로 없을 것 같은데 끝나고 합시다.”
“알겠습니다.”
방해꾼이 사라지자 무심한 시선이 다시 모니터로 향했다. 이제는 그의 얼굴에서 내가 좋아했던 뚱한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고작 서른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누군가의 상사이자 대단한 회사의 임원이구나.
이미 알고 있었으나 잠깐 잊고 있던 사실이 또 한 번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나만 제자리였지.
강세현은 내 예상대로 이미 저 멀리, 높은 곳에 가 있었다.
영화의 반이 지났는데 여전히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옆에 앉아 있는 이의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 조금 전부터 계속 느껴지는 작은 통증 때문이었다.
아까부터 속이 좀 아팠다. 처음에는 속이 너무 비어서 그런 건가 했는데, 그렇다고 배가 고프진 않았다. 아무래도 사장 내외가 식사하는 걸 기다리는 동안 마신 커피가 화근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스트레스를 받은 탓에 예민해진 속에 피곤하다고 진한 커피를 두 잔이나 들이부었으니 자극받은 위가 과도하게 수축된 것 같았다. 통증이 바늘로 쑤시듯 속을 들쑤셔 놓았다.
“식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하필 이런 타이밍에 밥이 나왔다.
승무원이 메뉴 두 가지 중 어떤 걸 먹겠냐고 물었지만 건네준 메뉴판 글씨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거나 받아 들고 같이 나온 샐러드만 깨작이다가 말았다. 도저히 넘어가질 않았다.
빨리 그릇을 치워 달라고 요청한 후엔 화장실에 다녀왔다. 양치질을 하는 동안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처음엔 그냥 버텼다. 자리로 돌아가 앞에 꽂혀 있는 쇼핑 책자를 꺼내 들고 괜찮은 척 앉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고통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고, 결국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승무원을 불렀다.
“죄송한데, 진통제 좀 주실 수 있나요?”
“어디가 안 좋으세요?”
“그냥 속이 좀 아파서요. 신경성이라서 심각한 건 아니에요.”
“잠시만요.”
가져다준 진통제 두 개를 한 번에 입으로 털어 넣었다. 그리고 일부러 이불을 덮고 이어폰을 꽂았다. 차라리 잠들면 괜찮겠지. 눈을 감고 괜찮아지기만을 기도하면서.
당연히 바로 괜찮아지진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통증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기분이 멍해졌다. 어제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한번 쏟아진 졸음은 금방 수마를 불렀다. 점점 멀어진 정신이 곧 잠에 빠지려 할 때, 기분 탓인지 누군가의 손끝이 이마에 닿는 것 같았다.
기분 좋아. 머리를 헤집는 손길이 한없이 다정했다. 분명 착각이겠지만 잠시나마 행복했다.
“……에서 ……그쪽으로 ……하는 게 …….”
“……그 얘길 꼭 지금 해야 합니까.”
나지막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강세현을 볼 기회를 날려 버린 게 후회됐다. 깨자마자 이런 생각부터 든 게 황당했지만, 정장 재킷을 벗은 강세현의 널따란 등을 보며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강세현은 바빠 보였다. 아까 봤던 그 사람과 몇 마디 나누는 것 같더니 결국 자리를 떠났다. 또 한 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잠깐 잔 줄 알았는데 눈을 뜨자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아픈 속은 괜찮아졌으나 이번엔 배가 고팠다. 자는 동안 간식 먹을 기회도 날려 버리고 이제 와서 먹을 걸 좀 달라고 하는 게 괜히 미안해서 일부러 맥주를 시켰다. 단지 함께 주는 안주를 먹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영화를 다시 봐야 할 것 같아 처음으로 돌려놓고 승무원이 가져다 둔 땅콩을 먹었다. 어차피 강세현이 돌아오면 또 집중하지 못하겠지만, 시작된 영화는 한 번 본 영화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재밌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갑자기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어폰을 꽂고 있어 몰랐는데 옆자리 주인이 돌아온 듯했다. 힐끗, 옆을 쳐다봤다.
“…….”
예상대로 강세현이었다. 그런데 여태 나를 쳐다보지도 않던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테이블 위 올려 둔 맥주캔을. 표정이…… 심상찮았다.
나도 모르게 툭, 말이 튀어나왔다.
“……마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