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아휴, 역시 미국은 좀 멀다.”
“지겨워 죽는 줄 알았네.”
출구 앞에서 다시 만난 한성 사장 부부는 반나절 동안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가장 많이 한 말이 지루하고 지겨웠다는 말이었고, 그다음 불만은 밥이 맛이 없었다는 말이었다. 그 와중에 대체 술은 얼마나 마신 건지 사장이 입을 열 때마다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다.
“짐부터 찾으러 가시죠.”
“어, 어. 그래야지.”
일등석이었으니 짐은 거의 맨 처음으로 나왔다. 손도 까딱 안 하고 수다를 떨고 있는 부부 대신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날랐다.
고작 3박 4일 일정에 무슨 짐을 이렇게나 챙겨 온 거야.
짐을 부칠 때도 했던 생각을 찾을 때도 똑같이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화물로 부칠 만큼 큰 캐리어를 들고 오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꽤 무거운데 뭐예요?”
“카탈로그 좀 챙겨 왔지.”
“카탈로그요?”
“어차피 전시회 갈 거면 부스 좀 돌아다니면서 나눠 줘 보려고.”
이 중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결국 나더러 하라는 뜻이었다.
진즉 좀 알려 주든가.
입국 수속을 밟을 땐, 저 멀리 강세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운이 좋았다. 잠깐이나마 볼 수 있어서.
당당한 뒷모습을 눈에 새기는 한편, 우리 사이의 절대 좁힐 수 없는 거리를 상기하며 마음을 정리하려 애썼다.
호텔로 가기 전, 꼭 한식을 먹어야 한다는 부부의 요청으로 공항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한식당에 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을 주문하고, 그사이 중요한 대화를 시도했다.
“바로 전시회장으로 가실 거면 호텔에 얘기해서 미리 택시를 불러야 할 것 같아요. 가자마자 요청할까요?”
“응? 아, 됐어. 오늘은 피곤해서 못 가지. 쉬다가 저녁에 밥이나 먹으러 가면 돼.”
첫날부터 일정이 정해진 대로 행해지지 않았으나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이 출장은 업무를 위한 출장보다는 사장의 개인적인 욕심을 채워 주기 위한 거라고 생각했었다. 어느 쪽이든 시중을 들기 위해서 온 건 마찬가지라서 굳이 따질 이유도 없었다. 거기에 혹까지 달고 왔으니 3박 4일 일정 중 전시회에 가는 하루를 제외하곤 부부의 여행 가이드라고 봐야 했다.
결국, 첫날인 오늘은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아, 그리고 말이야. 내가 좀 따로 부탁할 게 있는데.”
부인이 잠깐 화장실을 간 사이, 사장이 내게 몰래 속삭였다. 말이 부탁이지 사실은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떤 말을 해도 거절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지난번에 말했던 거 말이야……. 김 사장은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고 하지만, 내 아무리 생각해도 그쪽이 더 어필하기 좋을 것 같단 말이지.”
“어떤 거 말씀하시는 거예요?”
사실 알면서 물었다. 어쩌면 이런 부탁을 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었다.
‘솔직히 나라도 쪽팔려서 내놓겠어? 미친 생각 같아도 이렇게라도 해야지. 이번에 현세 쪽에 들어간 소문 수습 못 하면 지금까지 만들어 뒀던 혼담 다 깨진다는데.’
임 부장이 말했던 사장 아들 노릇을 하라는 거였다.
“어차피 그냥 지나가면서 인사나 할 건데, 그렇게 꼼꼼히 따지지도 않을 거야. 어차피 나이도 비슷하고 잘 모를 테니까 그냥 내 아들인 척 옆에만 서 있으면 돼. 무슨 말인지 알지?”
“네.”
“내 우리 권 대리가 맘에 드니까 이런 제안도 하는 거야.”
여태 계속 이상하게 부르길래 아예 모르는 줄 알았더니 그래도 내 성이 권 씨라는 것과 대리라는 직함은 기억하는 모양이다. 이럴 때 그렇게 말해 봤자 전혀 기쁘지 않았다.
“진짜 내 아들 같기도 하고. 응?”
그건 더더욱 싫은데.
사장이 대타를 쓰면서까지 이토록 숨기고 싶어 하는 사장 아들은 그야말로 개차반이었다. 보통 다른 집 망나니 아들들을 보면 뒤에서 하는 짓이 양아치 같아도 겉모습만큼은 그럴듯한데 이 집 아들은 아니었다.
우리 사장님의 말대로라면 밝게 염색한 머리나 옷차림새는 둘째 치고 서 있는 폼부터가 빼딱하다고 했다. 게다가 입만 열면 비속어와 반말이 쏟아진다고 했으니 말하는 본새는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았다.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현실에서 이런 일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싫다고 말하지 않은 건 단순히 귀찮아서였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말이 통하지 않을 걸 알아서. 아마도 내가 알겠다고 대답할 때까지 설득은 계속될 것 같았다.
강세현이었다면 이런 내 성격 가지고 뭐라고 했겠지.
이럴 때 불쑥 또 생각났다.
장장 두 시간이나 되는 식사를 끝낸 후 곧바로 호텔로 향했다. 호텔은 오토쇼가 열리는 다운타운 맥코믹 플레이스 근처에 있었다.
두 사람은 밥을 먹은 후부터 시차 때문에 계속 힘들어했다. 체크인을 하고 한동안 따로 방에서 쉬기로 하고 헤어졌다.
5성급 호텔답게 객실 내부는 깨끗하고 깔끔했다. 미니바나 어매니티도 부족함 없이 잘 갖춰져 있었다. 대충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은 후 침대에 누웠다. 비행기에서 많이 잔 탓에 잠은 오지 않았지만 그냥 잠시 쉬고 싶었다.
나 혼자 왔으면 이런 곳은 꿈도 못 꿨겠지.
폭신한 침구에 파묻혀 작년에 시카고에 왔던 기억을 떠올렸다.
4명이 룸 쉐어를 하는 곳에 들어가 모든 공과금 포함 한 달에 200불을 내고 넉 달을 살았었다. 그러니 하룻밤에 200불 가까이 하는 이 호텔은 이럴 때가 아니면 절대 묵을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비행기도 그렇고, 옷도 마찬가지였다.
한성 사장이 아무리 미운 짓을 해도 그 사람 덕에 강세현을 만날 수도 있었고, 그나마 부끄럽지 않을 만한 꼴을 보일 수 있었다. 사실 그것만으로 그 사람의 부탁을 들어줄 충분한 이유가 됐다.
지금쯤 넌 뭐 하고 있을까. 벌써 날 만난 기억은 까맣게 잊어버렸겠지.
한때는 무슨 자신감인지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나만큼이나 강세현도 나를 잊지 못할 거라는 생각. 헤어진 지 1년 되던 해, 강세현의 열애설이 터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강세현이 꿈속에 몇 번이나 나타났다. 강세현의 손길이 닿을 그 누군가가 부러워서 질투로 잠을 설쳤다. 도저히 단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군대에 다녀온 후 강세현의 약혼 발표가 나고서부터 강세현의 행복을 빌어 줄 수 있었다.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과 평생 행복하기를.
그렇게 되기까지 몇 년이 걸렸는데. 겨우 단념한 마음이 다시 일어선 건 얼마 전 있었던 강세현의 파혼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그 후로 다시 강세현은 꿈에 찾아왔다. 성하야.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면서.
정말 다행인 것은 지독할 만큼 냉정한 현실은 그가 감히 만날 수조차 없는 상대라는 걸 너무나 잘 알려 주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닿지 않는 상대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오늘 다시 깨달았다.
역시 넌 닿을 수 없는 사람이구나.
다시 만나게 돼서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던 내 주제를 다시 알게 되어서.
삐리리-
객실 내 놓여 있는 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갑작스러운 벨소리에 화들짝 놀라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화면에는 사장의 방 번호가 찍혀 있었다.
“네, 사장님.”
- 어. 자고 있었나?
자고 있냐고 묻는 이의 목소리야말로 잠에서 덜 깬 듯한 목소리였다.
“아니요. 말씀하셔도 됩니다.”
- 현세 부장한테 연락 왔는데 저녁 같이 먹자네.
“오늘이요?”
- 그래, 그래.
“그럼 식당을 알아볼까요?”
- 아니, 그것도 구매 부장이 예약하겠대. 우리는 가기만 하면 돼.
“사모님은요?”
- 어차피 오늘은 피곤하다고 룸에서 시켜 먹겠대. 우리 둘만 갈 거야. 곧 연락해 준댔으니까 연락 오면 다시 알려 줄게.
“네.”
정확히 10분 후 사장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예약 장소는 여기서 상당히 떨어진 일식집이었다. 놀랍게도 내가 일했던 식당과 똑같은 이름이었다.
***
[어서 오세요.]
비록 일하는 사람은 바뀌었지만, 외부나 내부는 변한 게 없었다.
무려 7년 만인데도 바로 어제 왔던 것처럼 편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안쪽에 있는 실내 예약석은 일식 홀에 하나밖에 없었고, 일식 쪽 테이블을 맡은 사람 중에서는 나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철판 요리 홀에는 사장님과 다른 셰프들이 있었으나 워낙 바빠 이쪽을 돌아보질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어? 왔나 보네. 손 부장, 여기!”
사정을 전부 알고 있는 구매 부장과의 식사라서 별 긴장 없이 나왔다. 어차피 내가 아들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멀리서 걸어오는 구매 부장 옆에 다른 이가 서 있었다.
“사장님. 멀리 오시느라 피곤하셨겠습니다.”
“아니, 뭐. 이 정도야 우습지. 그나저나…… 이분이신가?”
“예. 인사하십시오. 이번에 입찰 담당하는 우리 김 차장.”
설마 했던 이는 역시나였다.
그냥 지나가면서 인사만 하면 된다더니. 예고도 없이 자리를 만든 사장은 뻔뻔하게 웃었다.
“반갑습니다! 하하. 이쪽은 우리 아들.”
“아. 이분이 아드님이시구나!”
“어이구, 인상이 너무 좋으네.”
갑자기 쏟아지는 관심에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곤란한지 전혀 모르는 한성 사장은 껄껄대며 거짓말에 구색을 맞추기 시작했다.
“허허. 또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얘가 절 닮아서 그런 말을 많이 듣긴 합니다만.”
사장은 힐끔 내게 곁눈질을 했다. 인사를 하라는 신호였다.
미치겠네.
한성이 우리 회사에 가져다주는 발주 금액을 생각하며 두 눈을 꼭 감았다.
“안녕하세요.”
도저히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가짜 미소를 만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였다.
“쯧.”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