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80화 (80/96)

#80

“그러면 사람이 그새 엄청 변할 줄 알았어? 너도 여전하면서, 뭘.”

난 여전히 하기 싫은 대답은 농담으로 얼버무리기만 했다.

강세현은 픽 웃었다.

“난 그대로 아닌데.”

아니. 그대로야, 너. 지금 웃는 모습까지 그대로야 넌.

너무 변함없어서 기쁘면서도, 예전 생각이 그대로 나 서글프다는 걸 너는 알까.

진짜 하고 싶은 질문은 끝까지 하지 못하고 엄한 질문을 던졌다.

“너는 혼자 왔어?”

“어.”

“왜? 일행 있지 않았어?”

“그거야 일할 때만 있는 거고. 지금은 없어.”

목소리가 퍽 단호했다. 같이 출장 왔으면 함께 식사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 말을 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래도 혼자서 오긴 좀 그렇잖아.”

“말했잖아. 너 있을까 해서 왔다고. 근데 누굴 데려와.”

“……만약에 나 없었으면 어쩌려고 그랬냐.”

“그래도 상관없었을걸.”

그래. 그렇겠지.

하마터면 착각할 뻔했다. 강세현에겐 그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정도의 궁금함이었는데. 마치 나를 보기 위해, 나를 기다린 것처럼 생각할 뻔했다.

강세현은 그 이후 별말 하지 않았다. 조용히 담배를 문 옆모습이 예전 그때와 너무나 똑같았다. 이번에도 알 수 없는 가슴 통증이 느껴졌다.

“성하 어딨어?”

“밖이요. ……어? 담배 피울 거라고 했는데? 저 뒤쪽에 있나?”

멀찍한 곳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님이 나를 찾는 걸로 보아 직원 누나가 그새를 못 참고 가서 얘기한 모양이었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강세현은 피우던 장초를 비벼 껐다.

“먼저 간다.”

“그래.”

아쉬움에 붙잡고 싶었지만, 내겐 그럴 자격도, 핑계도 없었다.

“또 보자.”

미련 없이 등을 보인 강세현은 말을 걸 때 그랬듯이 헤어질 때 역시 늘 보던 사이처럼 말했다.

그 말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여 놓고 나중에 깨달았다. 또 보긴 뭘 또 봐. 당연하게도 우리는 서로의 번호조차 모르고 있었다.

***

그날로부터 일주일. 무척 힘들었던 출장을 끝내고 온 후 처음 출근하는 월요일이었다.

직원들에게 선물로 사 온 초콜릿을 나눠 주고 자리에 앉자 사장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성하야.”

“아, 사장님.”

“한 대 피울까.”

사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는 꼭 따로 둘이서만 할 말이 있을 때였다. 좁은 사무실에선 아무리 조용히 말해도 모두가 알게 되니 이럴 땐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들어선 안 되는 사적인 이야기일 때가 많았다.

“잘 다녀왔어?”

“네.”

“사장님이 맛있는 거 안 사 주시더냐. 왜 더 마른 것 같아?”

“많이 사 주셨어요.”

많이 못 먹어서 그렇지.

그리웠던 음식들을 눈앞에 두고도 많이 먹지 못한 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접대하는 자리에선 신경 쓸 게 많아 음식을 느긋하게 먹을 수 없었고, 사장 부부와 함께하는 식사는 왠지 방해꾼이 된 느낌 때문에 불편해서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리 맛있는 걸 먹어도 강세현이 없는 곳에서 먹는 음식은 예전 그 맛이 나질 않았다.

“잘 끝났어? 사장님이 아직 연락 없으시던데 일부러 내가 먼저 안 해 봤다. 어련히 잘하고 왔을 것 같아서.”

“네. 특별한 일 없이 잘 끝났어요. 전시회 방문도 잘했고, 입찰 담당자랑 식사도 여러 번 했고.”

“여러 번? 한 번 접대하고 끝난 게 아니야?”

“아. 그게…….”

어디 식사뿐일까.

처음부터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사장의 계획은 그날 잔뜩 취한 구매 부장의 말실수로 인해 첫날부터 물거품이 됐다. 애초에 잘될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어서 놀랍지 않았다.

다만 그 이후에 한성 사장과 구매 부장은 마당발이라는 입찰 담당자를 잘 구슬려 현세 쪽에 아들에 관한 소문을 좀 좋게 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냥 처음부터 그러지.

물론 이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그 부탁을 들어주는 데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머무는 내내 낮 동안은 사장 부부의 관광을, 저녁에는 매일 접대를 다니느라 쉴 새 없이 바빴다.

내 이야기를 들은 사장님은 그야말로 해괴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어휴, 좀 특이해도 못 배운 양반은 아닌데…….”

왜 그렇게 병신 같은 짓을 했냐는 말을 곱게 돌려 하셨다.

“그건 그렇고 입찰 건은 어떻게 될 것 같아?”

“잘될 것 같아요. 사실 그쪽이 진짜 목적이었는데, 며칠 동안 계속 봤더니 거의 절친이 되셔서요.”

“그래. 잘됐네.”

그 이유가 아니었으면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들어주기는커녕 쫓아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성이 이번 입찰을 따 내면 우리 회사에 들어오는 물량도 그만큼 늘고, 매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게 분명했다.

“고생했다. 네가 할 일도 아니었는데, 괜히.”

“왜요. 그래도 상대가 현세니까 알아 두면 좋죠, 뭐.”

우리는 한성에게 매달려야 살고, 한성은 현세에게 매달려야 사니까. 갑의 갑에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었다.

“입찰 공고는 곧 열릴 거래요. 근데 생각보다 기간이 길지 않아서 지금부터 자료 잘 준비해 놓으라고 하더라고요.”

“우리 쪽에서는 뭘 해야 한대?”

“회사 기본 정보랑 한성에 납품하는 사양서 같은 것만 챙겨 두면 될 것 같아요. 저희는 하청 업체니까요. 한성이 문제죠, 뭐.”

“빠짐없이 잘해야 할 텐데.”

“잘될 거예요.”

미국까지 가서 그렇게 애를 썼는데 잘돼야지.

그날 오후, 한성 사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사장님에게 전화해선 대뜸 나를 바꿔 달라 한 사장은 담당자에게 들었던 입찰 정보를 박 대리에게 말해 달라고 했다.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들어 놓고 본인이 기억을 못 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단순히 귀찮아서 나를 시키는 건지 모르겠으나 결국 난 또 거절하지 못했다.

“대리님, 안 가세요?”

“먼저 가요. 제가 문 잠글게요.”

“식사하셔야 하잖아요. 얼른 가세요.”

“네. 30분만 더 하고 갈게요.

일주일 만에 사무실로 복귀했으니 그것 말고도 밀린 일이 많았다. 대부분 정시에 퇴근했으나 나는 오래도록 혼자 남아 자리를 지켰다.

벽에 걸린 시계가 어느새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전히 남아 있는 일이 많았지만, 갑자기 피곤이 밀려와 그 이상 했다간 사무실에서 잠이 들것 같았다. 텅 빈 사무실 불을 끄고 퇴근을 했다.

오늘도 역시 날이 추웠다. 훨씬 추운 곳에 있다 왔어도 시카고의 겨울이나 한국의 겨울이나, 추운 건 마찬가지였다.

너무 늦어서 오늘은 걷는 걸 포기하고 가까운 정류장에서 내렸다. 뒤늦게 배가 고파 마트에 들를까 망설이다가 무언가를 해 먹는 것조차 귀찮다는 생각에 오늘만 특별히 시켜 먹기로 했다.

집으로 가는 언덕을 오르며 지난번 과감하게 지워 버렸던 배달 앱을 받았다.

한동안 배달 음식을 여러 차례 시켜 먹은 적도 있었는데, 매번 버리는 양이 너무 많은 데다 계속 이렇게 먹다간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일 년에 열 번이라는 횟수 제한을 뒀다. 올 한해 사용한 게 6번. 아직도 4번이나 남아 있었다.

몇 달 만에 늘어난 식당 정보를 확인하며 오늘 저녁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에도 계속 입맛이 없어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기에 오늘만큼은 많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고르려고 했다.

차라리 고기보다 해산물이 나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거의 집에 다다랐을 때, 고개를 들자 익숙한 건물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완벽한 정장 차림에 단정한 코트. 머리부터 발끝까지 갖춰진 행색으로 미동도 없이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갑자기 눈이 마주쳤다. 나를 알아본 상대가 서너 걸음 떨어진 내게 다가왔다.

“가짜 아들 역할은 잘하고 왔어?”

순간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뭘 시키든 오늘도 제대로 먹긴 글렀구나. 밥보다는 왠지 술이 마시고 싶었다.

짧은 시간 동안 이럴 땐 대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고민했다. 여기는 어쩐 일이냐, 하고 물었다간 혹시 왜 왔냐는 식으로 오해하고 가 버릴까 봐. 두려워서 차마 묻지 못하고 한참 만에 그가 묻는 말에 대답했다.

“……실패했어.”

그렇게 말하자 강세현은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런 말도 했다.

“일단 가자.”

“어딜?”

“너희 집.”

“……왜?”

“그러면 여기서 계속 말해? 좀 추운데.”

“그러니까 다른 곳도 많은데 왜 우리 집이야.”

“제일 가깝잖아.”

기다란 손가락이 허름한 건물 벽을 가리켰다. 기가 막혔다.

“여기 사는 거, 어떻게 알았어?”

“열심히 조사했어.”

“왜?”

“뭐가?”

“왜 조사했는데?”

“또 보자고 그랬잖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도대체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지.

“다른 데로 가.”

“어딜.”

“카페나 식당이나.”

“나 사람 많은 곳 싫어하는 거 알잖아. 지금은 얼굴까지 팔려서 더 안 되고.”

“……그렇다고 집에 가냐.”

“집이 왜. 이상해?”

“어.”

“너랑 나, 매번 집에서 봤는데 그럼 그때도 이상했겠네.”

그때랑 지금이랑 같냐.

하지 못한 말이 입 안을 맴돌았다.

“어차피 네 성격에 더럽게 지낼 것도 아닌데 그런 걱정 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아니지만…….”

“그럼 그냥 가. 아니면 계속 여기 서서 얘기하든가. 춥고 다리 아픈데.”

역시 강세현은 그대로였다. 본인 말로는 변했다는데 다른 건 몰라도 뻔뻔한 성격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MINT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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