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85화 (85/96)

#85

또 일주일이 흘렀다.

평소보다 바쁜 월요일이었다. 며칠 간의 출장에서 돌아오자 오전과 오후, 회의 일정이 연이어 잡혀 있었다. 잠깐 시간이 빈 틈에 사무실에 들러 결재 서류를 검토하는데 뒤늦게 비서가 문을 두드렸다.

“이사님. 말씀하신 거래처 관련 자료입니다. 담당자가 오늘 오전에 주고 갔습니다.”

사양서를 포함한 자료가 족히 책 몇 권은 되는 것 같았다. 물론 며칠 동안 밤을 새워서라도 전부 다 확인할 생각이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급한 유압 아이템을 먼저 확인했다.

자동차마다 들어가는 부품이 전부 다 다르니 같은 유압 부품이라도 꽤 여러 군데에 발주를 하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 한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곧바로 담당자를 불렀다.

한 15분쯤 지나자 긴장된 표정이 역력한 남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저, 부르셨습니까.”

“유압 펌프나 모터가 제일 중요한데 굳이 다른 것까지 합쳐서 한성한테 발주하는 이유가 뭡니까.”

애초에 한성의 주요 품목은 유압 쪽이 아니었다. 유압 부품을 구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유압 펌프나 모터는 권성하가 다니는 성진 기업에서 만들어졌고, 한성은 그걸 구매해서 본인들 이름으로 납품하는 일밖에 하지 않았다. 그렇게 중간 업체가 끼면 단가가 더 올라 구매하는 입장에서도 손해였다.

“아, 그게……. 아시다시피 작은 기업들은 자금 여력이 안 돼서 은행 보증서를 받기가 힘들어서요. 그런 경우에는 큰 기업이 작은 회사들 여러 군데를 대표해서 입찰 참여를 합니다. 한성이 그런 업체 중 하나고요. 근데 왜…… 그러십니까?”

상대가 초조한 듯 손을 꼼지락거렸다.

“부장님은 한성 제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한성이 납품하는 제품 말입니다. 벌써 몇 년째 저희랑 거래 중인.”

“아……. 무, 물론 제품은 굉장히 훌륭합니다. 특히 유압 펌프는 국내 업체 중에서 제일 품질이 좋고요.”

“그러면 한성이라는 회사는요?”

“……네?”

한 번 말해서 알아들으면 참 좋으련만, 대놓고 내 눈치를 보느라 혼이 빠져 버린 구매 부장은 자꾸만 같은 말을 반복하게 했다.

“여기 나와 있는 실적만 가지고는 경쟁력 있다고 보기엔 힘들 것 같은데 어떻게 뽑혔는지 궁금해서 그럽니다.”

“…….”

“보니까 은행 보증서도 모회사 이름을 빌려서 발행했던데. 자금력 빼고는 괜찮은 게 없는데 어떻게 이 업체가 됐냐는 말입니다.”

상대의 눈동자가 바쁘게 굴러갔다. 그리고 뭔가 생각하더니 실적이 많아 보이진 않지만 꽤 큰 프로젝트를 맡았었다며 몇 가지 지나간 자료를 보여 줬다. 전혀 핑계가 되지 않을 만큼 형편없는 자료였다.

이렇게 신용 없는 업체랑 거래하다니. 몇 년 전 입찰에서도 뒷돈이나 접대를 받아 뽑아 줬던 게 분명했다. 한숨이 나왔다.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아서.

“그래도 그, 전대 사장이 꽤 훌륭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니까…….”

“돌아가신 분 이야기 듣자고 부른 게 아니라는 거, 아실 텐데요.”

계속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해 대서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 이 이상 이야길 나눠 봤자 그저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꾹 참고 상대를 내보냈다.

“가 보세요.”

곧바로 한 비서를 불러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다음 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4층에 있는 회의실로 가자 매번 보던 얼굴들이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숙박은 거기 말고 상암동에 있는 호텔이 더 좋아요.”

“진짜요? 내년엔 거기로 예약해야겠네.”

“식사도 이번에 레스토랑 리뉴얼해서…….”

내가 들어서자마자 회의실 내부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어 곧바로 회의를 시작했는데 오늘따라 사람들이 영 집중을 하지 못했다. 원래라면 두 시간이면 될 회의가 점점 늦어지자 영업 팀장이 계속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결국, 회의는 6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끝이 났다. 사무실로 돌아가 몇 가지 결재 서류를 처리하고 나니 어느새 밖은 완전히 캄캄해져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곗바늘이 거의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제야 너무 늦었다는 걸 깨닫고 비서를 불렀다.

“입찰 담당자는 바꿨습니까?”

“네. 말씀하신 대로 아예 팀을 새로 꾸렸습니다. 데리고 올까요?”

“지금 말고 내일쯤 회의를 잡아 주세요. 입찰 참여 조건을 좀 확인해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영업 이윤만 남기는 한성이 빠지고, 성진 기업이 직접 입찰에 참여하면 실제 단가도 지금보다 훨씬 낮출 수 있어서 경쟁력이 상당히 높았다. 게다가 몇 년 동안 회사가 꽤 많이 성장해서 은행 보증 금액을 조금만 낮추면 입찰 조건을 갖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일하는 데 사적인 감정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으면서 도저히 모른 척을 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내가 권성하를 모른 척하는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아마도 평생 불가능하겠지.

생각했더니 보고 싶었다.

지난주 목요일에 보고 겨우 사흘 못 봤을 뿐인데 종일 그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한 비서님.”

보고를 끝내고 돌아서는 이를 붙잡았다.

“네.”

“괜찮은 식당 있으면 알려 주세요.”

“어떤 종류가 좋으십니까?”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괜찮은 곳으로 바로 예약하겠습니다.”

괜찮은 식당이 있으면 권성하에게 가져갈 음식 포장을 부탁할 예정이었다. 늘 옆에서 봐 온 한 비서라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는데, 갑자기 테이블을 예약하겠다 하는 게 의아했다.

“아니요. 포장할 겁니다. 가져갈 거라서요.”

“아.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준비해 달라고 할까요?”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부탁드리겠습니다.”

“……내일이요? 물론 내일도 괜찮지만, 그래도 오늘이 나을 것 같은데……. 조금 늦더라도 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아까부터 뭔가 어긋나는 대화가 거슬렸다. 왜 오늘이 더 낫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 무슨 뜻이냐고 묻자 대뜸 사과의 말이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좀 주제넘었네요. 하긴, 어차피 매년 챙기시지 않으셨죠.”

“뭐가…….”

말을 하려다 멈췄다. 순간 유난히 어수선하던 회사 분위기라든가, 오후 늦게 시작된 회의를 빨리 끝내려던 얼굴들이 생각났다.

크리스마스였다. 정확히는 내일이 크리스마스고,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하아…….”

아무리 바빠도 어떻게 잊을 수 있지. 매년 아무 의미 없는 날이었지만, 올해는 다르다는 걸 기억해야 했는데.

“혹시…… 모르셨습니까?”

“…….”

“……미리 말씀드릴 걸 그랬습니다.”

한 비서는 미안한 표정으로 자책했지만, 오랫동안 나를 보필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챙기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내년에 같이 보내면 되지.’

그렇게 말한 연인이 도망가는 바람에 싫은 기억이 되어 버린 크리스마스는 내게 아무 의미 없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을 뿐더러 다른 사람이 말을 꺼내는 것조차 싫어했다.

특히나 개인 비서인 한 비서는 내가 벌써 몇 년째 그날에도 일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바로 차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아래서 뵙겠습니다.”

“아니요. 한 비서님은 그대로 퇴근하세요. 운전은 기사에게 맡겨도 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혹시 말이 새어 나가면…….”

“어차피 집으로 갈 겁니다. 거기서부터는 제가 운전해서 가면 되니까 괜찮습니다.”

사적인 일마다 유능한 비서를 운전기사로 쓰는 것도 마음이 불편한데 가정이 있는 사람을 지금까지 잡아 둔 게 그저 미안할 뿐이었다.

쌓여 있는 일거리를 내팽개치고 곧바로 집으로 갔다. 회사 단지를 벗어나는 길목에는 내일이 크리스마스임을 알리는 장식이 곳곳에 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모르는 게 더 이상하네.

어이가 없어 픽 웃음이 났다.

그다음 목적지는 권성하의 집이었다. 가는 길엔 평소보다 차가 막혔다.

전에 한 번 갔었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똑같은 날인데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날 기다릴 것도 아닌데.

조금 늦어도 되고, 아예 안 가도 된다는 걸 알고 있다.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연인이 아닌 우리가 꼭 만나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오늘 꼭 만나고 싶은 이유는 오늘 같은 날 권성하가 혼자 보내는 일이 없길 바라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낸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권성하 역시 매년 혼자 보냈다. 그리고 난 항상 그 옆에서 함께해 줄 수 없었다.

그때마다 이기적인 마음이 들었다. 권성하가 외롭지 않길 바라면서도 그 옆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죽어도 싫은 마음. 몇 년간 지켜보며 매일 밤 기도했다. 권성하가 외로워하지 않기를. 하지만 그 누구도 만나지 않기를. 그게 친구든 연인이든 상관없이 못된 소원을 빌었었다.

이제야 겨우 원하면 권성하를 찾아갈 수 있게 되었는데 잊었으니 이보다 더 바보 같을 순 없었다. 올해부터는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함께하고 싶었는데.

발걸음이 무거웠다. 벌써 10시나 되었다는 사실에 잊고 있던 허탈함까지 밀려왔다.

언덕을 오르는 길에 갑자기 눈이 내렸다. 지나가던 학생 한 명이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좋아하는 걸 들었다.

“완전 로맨틱해!”

로맨틱은 얼어 죽을.

최악이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으니까.

선물은커녕 급하게 오느라 식당에 들르지도 못했으니 그야말로 빈손이었다. 항상 연락 없이 불쑥 찾아가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건 어떻게든 밥을 먹여야겠다는 핑계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인데 오늘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계획도 없네. 가서 대체 뭐라고 하지.

다른 날이면 몰라도 크리스마스이브까지 불쑥 찾아갈 만한 이유가 없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뭐할 거냐는 질문 정도는 했을 텐데. 이번에도 뻔뻔하게 굴 수밖에 없나.

이런저런 생각은 많았지만 결국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워질수록 눈치 없는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었다.

똑똑.

고민 끝에 문을 두드렸다. 번번이 예고 없이 방문했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 찾아가는 건 처음이었다.

벌컥-.

몇 초 후 바로 문이 열렸다. 조금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마치 기다린 듯 빨랐다.

열린 문틈 사이로 편안한 차림의 상대가 서 있었다. 권성하는 나를 보고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늦었네.”

숨이…… 멈출 것 같았다.

멍하니 넋을 잃고 서 있자 하얀 손이 옷깃을 당겼다.

“추우니까 들어와.”

끌려가듯 들어선 집안은 평소보다 훈훈한 공기가 맴돌았다.

반짝이는 장식도 없고, 맛있는 음식도 없고, 그럴듯해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작고 초라한 원룸이 오늘따라 무척 마음에 들었다.

대체 이유가 뭘까.

짧은 찰나의 고민은 금세 사라지고 곧바로 정답이 튀어나왔다.

권성하였다.

아무것도 없는데 오직 권성하만 있었다.

그것만으로 내겐 그 어느 때보다 로맨틱한 크리스마스였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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