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88화 (88/96)

#88

예상치 못한 강기준의 등장으로 종일 마음이 심란했다. 최대한 생각 안 하려고 했는데도 중간중간 화가 치밀어 제대로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다. 때문에 할 일을 남겨 두고 그냥 일찍 퇴근했다. 그저 빨리 집으로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유독 힘들었던 하루,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입맛은 없는데 술 생각이 간절히 났다.

오늘은 오려나.

강세현은 그날 이후부터 꼬박꼬박 다음을 약속했다. 일정이 확실하지 않을 때에도 다음에 온다거나 또 보자는 말을 빼먹지 않았다.

‘안 바쁜 날 올게.’

이번에는 그렇게 말했다.

곰곰이 날짜를 세어 봤다. 화요일에 강세현이 왔던 적이 몇 번 있었나 따져 보니 바쁜 월요일을 대신해서 올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꼭 온다는 보증은 없어도, 그것만으로 위로가 됐다.

그전에 이럴 때는 어떻게 했더라.

힘들 때 위로가 되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강세현과의 추억은 늘 잠깐 위로가 되었다가 곧바로 슬픔이 되었기에 되도록 떠올리지 않으려 했고, 대신 다른 좋은 기억들을 떠올리려 했다. 예를 들면 강세현을 만나기 훨씬 전 뉴욕에서 있었던 좋은 일들. 대부분 소라와의 추억이었다.

생각난 김에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툭.

귓가에 들리던 신호음이 단 두 번 만에 끊어졌다. 곧이어 요란한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안 그래도 네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쪽은 아직 이른 아침일 텐데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목소리가 밝았다.

“무슨 생각?”

- 세상에서 제일 바쁜 내 절친이 언제쯤 연락하려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목소리만 들어도 여전히 기분 좋아지는 사람은 다름 아닌 소라였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한 달에 서너 번씩은 꼭 연락했었는데 한동안 너무 뜸했었다. 어느새 한 달을 훌쩍 넘겼으니 정말 오랜만이긴 했다.

“별일 없지?”

- 있어. 겁나 많아.

그렇게 말한 소라는 회사 이야기, 아는 사람 이야기, 그 밖의 관심사 등 새로운 소식 여러 개를 한꺼번에 전했다.

- 진짜 매일이 별일이고 인생이 드라마다. 그렇지 않아?

그래도 나만 할까.

“나 강세현 만났어.”

그토록 시끄럽던 수화기 너머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리고 몇 초 후 괜찮았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소라에게 강세현과의 관계를 털어놓은 건 우리가 헤어지고 4년 즈음 지나서였다. 내가 군대를 다녀오고, 날 보러 한국에 놀러 온 소라는 그때까지도 강세현과 내가 계속 친구로 지내는 줄 알고 있었다.

‘근데 세현이는 바빠서 못 온대? 얼굴 보고 싶었는데.’

‘우리 연락 안 한 지 꽤 됐어.’

‘……왜? 싸웠어?’

‘정확히 말하면 헤어졌어.’

그다음 말은 생각보다 너무 쉽게 나왔다.

모든 걸 알게 된 소라는 빈 술잔을 채워 주며 지금처럼 물었다. 괜찮은 거냐고.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좀 놀라긴 했지만.”

- 우연히 만나게 된 거야?

“어. 시카고 가는 비행기에서.”

- 인생이 드라마인 사람은 따로 있었네.

궁금해서 이것저것 물어볼 만도 한데 내가 먼저 말하기 전까지 소라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고마웠다. 언제나 늘 그랬다.

“그리고 오늘 강기준도 만났어.”

- 뭐?!

엄청나게 험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가 난 소라는 그 새끼는 왜 잊을 만하면 남의 인생에 끼어드냐며 아까 강기준이 내게 한 욕의 몇 배는 되는 심한 말을 퍼부었다.

- 너 정말 괜찮겠어?

“오늘 그 말 몇 번째인 줄 아냐?”

- 아, 몰라. 내가 걱정 안 하게 생겼냐. 씨발, 내가 기도를 잘못했어. 그냥 망하라고만 할 게 아니라 네 인생에서 영영 꺼지라고 빌었어야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업무상 엮이는 건데 설마 대놓고 괴롭힐까 싶어.”

- 그 새끼 몰라?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야. 아니, 인간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다. 음식물 쓰레기만도 못한 새끼. 어떻게 넌 매번 이런저런 일이 동시에 터지냐. 강세현도 그렇고 강기준도 그렇고. 아, 물론 둘을 절대 같은 취급하는 거 아냐. 다만 강세현 만난 일도 네가 신경 쓸 일이니까…….

“알아.”

하나는 행복이고, 하나는 불행이었다. 두 가지는 늘 함께 왔으니까.

- 어휴, 세현이야 우연히 만난 거고 다신 안 볼 사람이지만 강기준 그 개자식은 자주 봐야 하는데 어쩌냐.

일순간 뜨끔, 양심이 찔렸다.

“아, 강세현도…….”

- 응?

“거의 매일 보는데.”

- ……뭔 말이야, 그게.

그러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것 같은데 일주일에 서너 번 만나고 휴일을 늘 같이 보낸다. 만나는 시간은 늘 저녁. 함께 밥을 먹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주 가끔 술을 마시긴 하지만, 그럴 땐 영화를 틀어 놓고 대화는 하지 않았다.

같이 저녁을 먹는 사람? 종종 술 마시는 사람? 지금의 우리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 일단 세현이는 그렇다 치고 넌 뭔데. 무슨 생각이야?

“몰라.”

정말 모른다. 그저 강세현이 하는 대로 휩쓸리는 것뿐.

- 다시 친구가 되고 싶은 거야?

“강세현이 그러자면 그렇게 할 거야.”

- ……그걸로 돼?

“그 이상은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수화기 너머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 솔직히 말하면, 너네는 전에도 이상했는데 지금은 더 이상해. 헤어지고 나서 친구로 지내는 사람도 많이 봤고, 다시 만나는 사람도 많이 보긴 했는데 너넨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야. 알고는 있지?

“어.”

- 그리고 걔 파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결혼까지 생각한 애가 널 다시 찾는 게 위로해 줄 친구가 필요한 건지 아니면 다른 마음이 있는 건지 모르는 거잖아.

“다른 마음은 아닐걸. 걔가 그럴 이유가 뭐 있어.”

- 절대 뭐든 확신하지 마. 네가 네 속도 모르는데 걔 속을 어떻게 알아? 너넨 진짜 대화 좀 해라. 답답해, 둘 다.

소라 말이 백번 맞는 말이지만, 그걸 알고서도 쉽게 행할 수 없었다. 우선은 뭐라고 해야할지 모를 뿐더러 괜히 이런 이야기를 한 후에 더 서먹해지면 지금 이 관계마저 잃을까 두려웠다.

전이었다면 분명 강세현이 먼저 이야길 꺼냈겠지.

얼마 전 약속을 잡게 된 계기가 떠올랐다. 혹시 이번에도 내가 먼저 말 꺼내길 기다리는 건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성하야. ……다른 거 다 제쳐 두고 네 마음은 어때? 걔, 좋아해?

어렵게 말을 꺼낸 상대에게 미안하지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내겐 세상에서 가장 쉬운 질문이었다. 내 마음이 어떠냐고? 강세현을 좋아하냐고?

가장 중요한 단어가 빠져 있었다. 강세현을 좋아하냐고 물은 거면 ‘아직도’ 좋아하냐고 물었어야 했다.

“난 한 번도 걔 안 좋아해 본 적 없어.”

과거에도, 현재도, 내 마음엔 늘 강세현뿐이었다.

***

저녁 8시를 5분 남겨 둔 시각, 모르는 번호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알 수 없음: [깜빡잊었는데 입조심해라]

알 수 없음: [동생이라고 말하면 가만안둔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누가 네 동생인데.

여태 살면서 내가 가장 잘한 일은 강세현을 만난 것이고, 두 번째는 어머니의 재혼 후에도 새아버지의 성으로 바꾸지 않은 것이었다.

헛소리에 굳이 답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답장을 보내지 않자 또 메시지가 왔다.

알 수 없음: [알았냐고]

역시나 철없고 유치찬란한 내용이었고, 이번에도 무시했다.

똑똑.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찬 바람이 밀려들어 왔다. 강세현은 오늘도 말끔한 모습으로 반듯하게 서 있었다.

“오늘은 뭐야?”

“부대찌개.”

“잘됐네. 한잔하려고 했는데.”

강세현이 가져온 음식을 선반 위에 올려 두고 냉장고에서 아까 사 온 술병을 꺼냈다. 잔을 챙겨 걸음을 옮기는데 강세현이 벽에 기댄 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삐딱하게 들고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언제는 무슨 일 있어서 술 마셨냐.”

보통 저렇게 말하면 그냥 넘어갈 법도 한데 끈질긴 시선이 계속 달라붙었다.

“뭔데. 회사 일이야?”

시간이 그렇지 많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내 기분을 알아채는 게 신기했다.

“일단 앉아 있어.”

오는 동안 조금 식어 버린 부대찌개를 냄비로 옮겨 담아 다시 한번 끓였다. 그동안 강세현은 내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앉아만 있었다. 예전 생각이 났다. 늘 나보다 먼저 가서 아파트를 지키던 커다란 개.

부대찌개를 가지고 와 자리에 앉자 강세현은 내 앞에 놓인 술잔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술잔이 왜 한 개야?”

“너도 마시려고?”

“어.”

“오늘 주말 아니야.”

“알아.”

“알면서 뭘 마셔, 내일도 회사 가는 놈이.”

“너도 가잖아.”

“난 우리 집에서 가잖아. 너도 너희 집에서 가.”

“걱정 안 해도 갈 거야.”

“어떻게. 대리라도 부르려고?”

당연히 이쯤 되면 포기하리라 믿었던 강세현은 의외로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뭘 그렇게까지 하냐고 그냥 혼자 마시겠다고 했으나 오늘따라 같이 마시겠다며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결국, 그 고집에 진 나는 강세현과 함께 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오늘은 일부러 영화도 틀지 않았더니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좁은 공간엔 오직 빈 잔을 채우는 경쾌한 소리만 들렸다.

“이제 말해 봐.”

“아직 술 입에도 안 댔어. 좀 기다려 봐.”

“앉아만 있으면 말해 주는 거 아니었어?”

“배고프니까 속 좀 채우고.”

술이 좀 취해야 할 것 같아서 생각해 낸 핑계였다. 진짜 그 핑계가 통한 건지, 아니면 그냥 기다려 주는 건지, 강세현은 내가 소주 한 병을 다 비울 때까지 재촉하지 않았다.

탁. 빈 술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면서까지 하려는 이야기는, 강세현이 알지도 못하는 회사 일이나 의붓형을 만난 이야기 따위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런 고민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

우리에겐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었다. 꼭, 나눠야 할 이야기가.

오랫동안 미뤄 왔던 대화를 하기 위해 없던 용기를 냈다.

“강세현.”

제법 심각한 목소리로 부르자 또렷한 눈동자가 한층 더 깊어졌다. 왜. 무뚝뚝한 대답이 들렸다.

여기서 또 망설이게 되면 영영 묻지 못할까 봐 생각나는 말을 그대로 입 밖으로 꺼냈다.

“우리, 대체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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