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91화 (91/96)

#91

좁은 골목 어귀에 서서 5분이 지났는데도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강세현을 기다리는 일은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한데 어쩜 이리도 한결같은지 쓸데없이 자꾸만 두근거렸다.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가슴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한 손에는 엄마가 챙겨 준 종이 가방을 들고,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지금쯤 도착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조금 전 주고받은 메시지를 괜히 다시 읽었다.

010-xxxx-xxxx: [어디야]

나: [엄마집]

010-xxxx-xxxx: [저녁은?]

나: [먹었어]

010-xxxx-xxxx: [집에 언제 갈건데]

나: [곧? 이제 막 다 먹었어]

010-xxxx-xxxx: [그럼 데리러 갈테니까 거기있어]

010-xxxx-xxxx: [10분이면 가]

문자를 받은 후 몇 가지 궁금한 게 동시에 떠올랐다. 바로 며칠 전 번호를 가르쳐 주기 싫다고 해 놓고 갑자기 메시지를 보낸 연유와, 10분이면 도착할 거라는 건 엄마 집 주소까지 알고 있다는 건데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대화가 필요했다.

우선은 만나서 얘기하기 위해 알겠다고 대답한 후 서둘러 짐을 챙겨 나왔다.

이제 진짜 도착할 때가 됐는데.

주위가 어둑해서 혹시나 못 볼까 봐 가로등 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커다란 SUV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왠지 강세현일 거라는 느낌이 들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바로 앞까지 올 줄 알았던 차는 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생각해 보니 더 들어오면 차를 돌리기가 매우 애매한 위치였다.

탁. 헤드라이트를 그대로 켠 채 내린 운전자는 10m밖에서도 알아볼 만큼 완벽한 모습이었다. 상대가 걸어오는 걸 보고 한 박자 늦게 움직였다. 머리로는 서두르지 말아야 하는 걸 알면서 자꾸만 걸음이 빨라졌다.

“그냥 차에 있지.”

“됐어. 차 선택을 잘못했어, 내가.”

사흘 만에 보는 얼굴이 반가워서 별거 아닌 말에도 웃음이 났다.

“어디서 오는 길이야?”

“너희 집.”

뭐?

나도 모르게 획 고개가 돌아갔다.

“말하지.”

“그래서 10분 걸린다고 했잖아.”

“그 말이랑 어떻게 같냐?”

“그런가.”

전혀 상관없는 대답을 너무나 능청스럽게 내뱉는 강세현 때문에 어이없어하며 차로 걸어갔다. 시동 걸린 차는 금세 출발했고, 조용한 동네를 빠져나가 한산한 도로를 만나자마자 강세현에게 물었다.

“며칠간 못 온다며.”

“어. 그래서 못 갔잖아.”

“벌써 볼일은 다 본 거야?”

“아니. 아직.”

“근데 왜 왔어?”

“끝나면 바로 간다고만 했지, 중간에 안 가겠다고는 안 했어.”

그동안 잊고 있었다. 강세현의 말도 안 되는 논리. 그런데도 또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라서 대꾸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바로 다시 가야 돼. 잠깐 온 거라 내려 주기만 하고 갈 거야.”

“그럴 거면 진짜 왜 왔냐.”

여기까지 날 데리러 와 준 상대에겐 서운해할 만한 말일지 몰라도,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아 던진 질문이었다. 내가 엄마 집에 오는 바람에 엇갈려서 볼 시간이 더 줄어든 건 맞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고작 30분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것보다 다른 것부터 물어봐야 하지 않아?”

“어. 근데 지금 안 해.”

“왜.”

“너 바로 가야 한다며. 여기서 우리 집 도착까지 7분 남았는데 어떻게 해.”

“그래도 해.”

“그때까지 안 끝나.”

“그렇게 질문이 길어?”

“어. 길고 많아.”

“그럼 제일 짧은 것부터 해.”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을 계산하면서 할 얘기는 아니었다. 이렇게 차에서 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고.

“지금 하는 일, 언제쯤 끝나?”

“이르면 다음 주 수요일, 늦으면 다음 주말. 왜, 그때 얘기하게?”

“어.”

“그래. 너답네.”

“……대체 어느 부분에서 나답다는 거야?”

“궁금해도 참는 거.”

“…….”

이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갔다. 어느새 더 줄어든 시간과 얼마 남지 않은 거리가 원망스러웠다. 꼭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사실이 훨씬 더 섭섭했다. 지금 보고 나면 또 며칠, 혹은 일주일 후에야 볼 수 있으니까.

이래서 습관이 무서운 거였다. 그새 이틀에 한 번씩 꼬박꼬박 보는 것에 길들어 전엔 어떻게 안 보고 살았는지 고작 몇 주 만에 잊어버렸다.

주변에 익숙한 건물과 도로가 보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도착했다.

“고마워. 조심해서 가고.”

끝내 별말 없이 헤어짐의 순간이 다가왔다. 매번 강세현이 현관문을 열고 가는 것만 보다가 내가 먼저 차 문을 열고 내리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

막 문손잡이를 돌리려던 차에 강세현이 갑자기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붙잡았다.

“나도 하나 물어볼 거 있는데.”

대체 얼마나 짧은 질문이길래 이제 와서 묻는 걸까. 운전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태 이렇게 가까이 있었던가? 계속 앞만 보고 있어서 몰랐다. 고개만 돌리면 맞닿을 거리에 있다는 것을.

꼭 이런 순간에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닿고 싶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는데.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한 기억은 그럴 수 없는 현재를 비웃었다.

강세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물었다.

“넌 아직도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해?”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이제 번호 알잖아.”

“…….”

“네 말대로 앞으로 내가 연락하고 널 만나러 가면 우리는 친구인 건가 해서.”

대답할 수 없었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답을 하고 싶지 않아서.

우리가 친구냐고?

논리로는 맞았다. 연락하고 약속을 잡아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친구 사이. 그런데 그건 정작 중요한 마음을 배제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언젠가 강세현이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한쪽이 마음이 있는데 어떻게 친구를 하냐고. 그런 거면 우리는 절대 친구일 수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과연, 한쪽만인가?

뚫릴듯한 시선이 나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근거렸다. 아주 예전, 마치 나도 널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그 순간처럼. 내가 할 대답은 당연히 한 가지밖에 없었다.

“우리가 어떻게 친구야.”

내가 이렇게 말하고 나면 강세현이 지을 표정을 상상했다. 웃거나 놀라거나, 혹은 둘 다.

하지만 내 예상은 아주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강세현은 웃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잠깐 스친 표정이 마치 울 것 같았다.

날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많은 걸 담고 있었다.

“내가,”

한참 만에 들려온 목소리에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지금껏 어떻게 널 혼자 둘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말을 던진 강세현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며칠만 기다리라 말하고 떠났다. 그 순간 딱 하나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건, 강세현도 나만큼이나 아쉬워하고 있다는 거였다.

***

사흘 동안 잠을 설쳤다.

‘빨리 올게. 다음 주에 보자.’

강세현이 그런 말만 남기고 떠났는데 잠을 제대로 자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였다.

매일 밤, 오랜만에 마주하는 설렘과 기대로 심장이 쿵쾅거려 귓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많이 피곤해? 월요일이라서 그런가, 안 그러는 애가 오늘따라 힘들어 보이네.”

“아, 안녕하세요.”

출근 후 연속으로 나오는 하품을 겨우 참고 있는데 지나가던 사장님이 어깨를 가볍게 툭 치셨다.

“회의 좀 하자. 지난번 말했던 입찰 공고 떴어.”

“바로 준비할게요.”

회의는 길지 않았다. 지난 회의 때 이미 결정한 것처럼 사장님이 오늘 오후에 한성 사장님을 만나 이야기를 해 보겠다고 하셨다. 혹시 식사 때 술을 마실지도 모르니 함께 가겠다며 공장장님이 직접 기사를 자처하셨다. 그동안 우리는 직접 입찰에 참여하는 쪽으로 예상하고 공고문 내용을 잘 파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입찰 조건은 미리 전해 들은 그대로였다. 품목도 세부적으로 나뉘어 있었고, 은행 보증에 관한 조건도 전보다 훨씬 좋았다.

준비해야 할 서류 종류는 끝도 없이 많았으나 이 정도는 어느 입찰이나 마찬가지라서 몇 번 입찰 참가를 해 본 박 차장님이 보시곤 준비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남은 건, 한성의 허락밖에 없었다.

다 끝난 자료를 정리하며 박 차장님은 종일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얘기가 잘돼야 할 텐데.”

“그러게요.”

“언제쯤 이런 걱정 안 하냐……. 사실 우리 회사 같은 곳이 제일 불리해.”

“작아서요?”

“음……. 정확히 말하면, 항상 을이잖아. 생각해 봐. 한성같이 물건 떼다 파는 업체는 고객한텐 을이라도 우리한테는 갑일 수 있잖아. 근데 우리는 고객한테도 을이고, 자재 업체한테도 을이고.”

우리에게 자재를 파는 업체는 우리가 돈을 내고 그들이 돈을 받는 처지임에도 늘상 갑은 그들이고 을은 우리였다. 그 이유는 다른 업체에 비해 단가가 낮다는 이유로 구매하는 곳이 우리 말고도 너무 많아서 오히려 우리가 생산 일정을 당겨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대기업이 좋은 이유가 그거 아니겠냐. 어쨌거나 기업들한테는 무조건 갑이니까.”

“대신 사내 경쟁이 심해서 스트레스 많이 받는다잖아요.”

“뭐…… 결국, 제일 좋은 건 대기업에서도 잘릴 걱정 없는 윗분들이겠지.”

그 사람들은 또 나름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지? 갑자기 강세현이 떠올랐다. 잘릴 걱정은 없는 대신 비행기 안에서도 쉬지 못하고, 크리스마스이브에도 밤늦게까지 일하는 사람.

어디에도 결코 쉬운 자리는 없다고 대꾸를 하려다 나이도 어린 내가 하기엔 주제넘은 말일 것 같아 그냥 말았다. 박 차장님은 이런 내 생각을 모르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갑 중의 갑이라며 부럽다고 말했다.

갑 중의 갑은 맞지.

우리 회사에게 한성이 갑이고, 한성에게 현세가 갑이고, 현세 안에서도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윗사람들은 갑이니 결국, 내게 강세현은 갑의 갑의 갑이었다.

그러면 어때.

나는 단 한 번도 강세현과 비슷한 위치에 서길 원한 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언제나 저 멀리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강세현을 최대한 낮은 곳에서 바라보기를 원했다. 대부분 사람처럼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며 월급날과 주말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평범한 삶. 그런 삶을 원했다. 그래야만, 강세현에게 딱 하나 평범한 것을 줄 수 있었다.

하루의 마지막은 언제나 강세현과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나누는 것. 예전에도, 지금도, 내 소원은 그것뿐이었다.

이래 놓고 무슨 친구래. 잠깐이라도 친구를 운운했던 자신이 한심했다.

강세현을 만나려면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 애가 탔다.

헤어져 있던 7년이란 시간도 이미 아까운데,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먼저 고백할 차례였다.

친구 말고, 연인이 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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