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상대에게서 좋은 향이 났다. 너무 놀라 어떻게 왔냐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강기준 역시 마찬가지인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안 들려? 다시 한번 지껄여 보라고.”
강기준을 추궁하던 강세현은 갑자기 나를 향해 획 고개를 돌렸다.
“넌 왜 가만히 있어.”
잘생긴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붉으락푸르락 화가 난 모습조차 왜 멋있는 건지.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닌데 눈치 없는 심장이 자꾸만 두근거렸다.
“……어디서부터 들었어?”
“꼴에 바쁜 척한다는 것부터.”
“다 들었네.”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드는데 안 들리는 게 이상하지. 왜 꼭 문제 있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다 목소리가 큰 거야.”
싸늘한 시선이 다시 강기준에게 돌아가자 어깨를 움찔거렸다. 문제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목소리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꼭 약자한텐 강하고 강자한테는 약한 거. 없을 땐 잘만 돈줄이라고 불렀으면서 막상 실물이 나타나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았다.
“별일 아니니까 들어가자. 들었으면 알 거 아냐. 형이랑 아버지 돈 때문에 그냥 좀 다툰 거야.”
“네가 언제부터 형이 있었는데.”
“……어?”
“너 형 없잖아. 설마 저딴 걸 형 취급해 주는 건 아닐 테고. 아버지는 또 뭐야. 내가 알기론 너한테 아버지나 형이라고 불릴 사람 아무도 없는데.”
대체 강세현이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처음에 날 찾아왔을 때 열심히 조사했다길래 단순히 번호나 주소 같은 것만 알아낸 줄 알았는데 이런 소릴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내가 여태껏 숨겨 왔던 사실들을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7년 전 그때, 내가 떠난 이유도 알고 있을까.
당장 묻고 싶었으나 마주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우선은 방해꾼밖에 안 되는 강기준을 보내고 나서 제대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좀 들어가. 지금은 타이밍이 좀 그래.”
강세현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그러나 단단한 몸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인상을 쓰며 팔을 당기자 날 내려다보는 강세현이 픽 웃었다.
“여태껏 너 알고 지내는 동안 오늘이 제일 좋아, 타이밍.”
아니라고 이 자식아.
강세현은 계속되는 나의 만류에도 꿋꿋이 강기준에게 할 말을 했다.
“밤중에 돈 달라고 와 놓고 누가 누구한테 거지새끼래.”
어느새 화난 표정을 숨기고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도, 무심한 말투로 뱉는 말이 꽤 살벌했다.
“꼭 병신들은 저만 똑똑한 줄 알지. 지금까지 너 같은 새끼가 한둘만 있었는지 알아? 내 기사 쓰고 싶어서 달려드는 기자 한번 불러 봐. 얼마나 잘 쓰는지 보자고.”
“아니, 그게 아니라…….”
“재벌 중의 재벌이라며. 그런데 고작 그딴 기사 하나 못 막을까.”
강기준과 나의 대화를 다 들었다면 마지막에 내가 본인과 잘 모르는 사이라고 한 것도 들었을 텐데, 누가 봐도 지금 강세현의 모습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냥 대충 상황 좀 맞춰 주고 끝냈으면 되었을걸. 높은 위치에 오른 강세현은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갈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서른 살이 되어도 이럴 때 화를 참지 못하는 건 그대로였다.
그러고 보니 이런 면도 있었지.
이런 점까지 예전 그대로라는 사실이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지금 상황에서는 좀 곤란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됐어. 들어가자.”
“뭐가 됐는데. 아직 반도 안 했어, 할 말.”
“안 해도 돼. 네 시간 이렇게 쓰지 마. 아까워.”
진심이었다. 이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에게 누군가 날 대신해 속 시원하게 욕을 해 주면 고맙겠지만, 강세현이 그 역할을 맡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쉴 시간을 쪼개 날 만나러 오는데, 그 귀중한 시간을 이런 놈을 위해 낭비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또 그냥 넘어가지.”
강세현은 다시 인상을 썼다.
“그래. 그게 나다운 거잖아.”
뭔가 더 대꾸를 할 줄 알았던 강세현은 신기하게도 그 말을 듣곤 순순히 입을 닫았다. 여전히 짜증 나 보이긴 했으나 더는 강기준을 상대할 것 같진 않았다.
우선 이 상황을 말렸다는 것에 안도하려던 찰나 강세현은 갑자기 건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딜 가냐고 묻기도 전에 단단한 손이 획 내 손목을 낚아챘다.
뒤를 한번 슬쩍 쳐다봤다. 강기준은 중요한 일을 망친 사람처럼 넋이 나가 있었다. 지금은 그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 서둘러 강세현을 따라나섰다.
꽉 잡힌 손목이 아팠다. 그러나 아픔보다는 다른 사람의 눈이 더 무서웠다. 혹 누가 볼까 봐 좁은 골목을 지나면서도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말없이 걷던 강세현은 몇 블록쯤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멀리 서 있는 까만 승용차 한 대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수요일 지나야 온다더니.”
“…….”
“볼일이 일찍 끝났나 보네. 미리 연락 좀 주지 그랬어.”
만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분위기가 이래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아까 일에 대해 따질 줄 알았으나 강세현은 의외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낫지. 계속되는 침묵에 숨이 막혔다.
“무슨 말이라도 해. 사람 민망하게.”
결국 대놓고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고개를 돌린 강세현은 무표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그런 얼굴로 툭, 질문을 던졌다.
“왜 말렸어?”
“안 그래도 바쁜데 네가 뭐하러 그딴 인간을 상대해.”
“네가 그런 걱정을 왜 하는데.”
“그럼 안 하냐? 말했잖아. 시간 아깝다고.”
“그게 왜 아까워. 그 개자식한테 네가 못 한 소리 하는 건데 고작 그 시간이 뭐가 아까워.”
여태 나직했던 음성이 더는 차분하지 않았다. 조금 흥분한 듯 커진 목소리가 생소하고 낯설었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지금까지 참아 왔는데.”
강세현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네가 뭐하러 그래.”
그 말을 들은 강세현은 또 말이 사라졌다. 그렇게 또 침묵하더니, 고요한 정적 속에서 한참 만에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하면 대단한 사이 되는 건데.”
“…….”
“잘 모르는 사이라며, 우리.”
갑자기 왜 말이 없나 했더니. 겨우 그런 생각을 하느라 그랬던 건가.
“그럼 거기서 정말 잘 아는 사이라고 해?”
“왜 못 하는데.”
“그랬으면 진짜로 받아들일 인간이야. 그리고 틀린 말 아니잖아. 너랑 나, 서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 너 혼자만 날 잘 안다고 우리가 잘 아는 사이가 되는 건 아니잖아. ”
아까 보니 강세현은 이미 날 잘 알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난 강세현에 대해 모르므로 우리는 절대 서로 잘 아는 사이는 될 수 없었다.
올곧았던 상대의 시선이 불안한 듯 흔들렸다.
“새아버지랑 형에 관한 거, 언제부터 알았어? 우리 집 찾아오고 나서야?”
“……그게 지금 왜 중요해.”
“그럼 왜 안 중요한데. 내 사정이잖아.”
나도 모르게 따지는듯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냥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 건데 그 순간 반듯했던 이마가 구겨졌다.
아. 실수했다.
뒤늦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한 걸 알았다.
“네 사정?”
강세현은 허탈한 듯 웃었다.
“네가 나한테 사정 물어볼 기회는 줬었어?”
“…….”
“좋아하는 사람이 갑자기 말없이 사라져버렸는데, 그럼 가만히 손 놓고 있어야 했냐고.”
꾹꾹 짓눌린 음성이 억누른 감정을 겨우 가두고 있었다. 원망하듯 묻는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언제 알았냐고 물었지? 기억 안 나. 그냥 너무 늦게 알았다는 것만 기억해. 그땐 이미 네 사정이라는 게 전부 지나갔더라.”
“…….”
“내가 기억하는 건, 병신 짓을 하느라 너무 늦어서 네가 가장 힘든 순간에 함께 해 주지 못했다는 것밖에 없어.”
강세현은 말하는 내내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가 왜 그런 얼굴을 해.
왜 나 때문에.
내가 먼저 버렸다, 강세현을.
서로에게 힘든 시기를 함께 이겨 나갈 자신이 없어서.
그런데 강세현은 자신이 힘들 때 떠나 버린 나를 원망하진 않고 내가 힘들 때 옆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했다.
만약 그 당시 일을 알아냈다면 다른 이유를 생각해 낼 수도 있었을 텐데.
힘든 걸 못 견뎌서. 부끄러운 가정사를 알리고 나면 더 초라해질까 봐. 늘어난 상처를 봐 달라고 하는 게 자존심 상해서. 이런 이유로 자신을 떠났을 수도 있는데 왜 그런 나를 다시 찾은 걸까.
이런 내가 뭐가 좋다고.
강세현은 잔뜩 인상을 쓴 채 물었다.
“이제 다 괜찮아졌는데 너무 늦게 와서 싫어?”
형편없는 나는 이 순간 일그러진 강세현을 보며 늘 태연하던 그가 당황했던 그때와 똑같은 우월감을 느꼈다. 내가 그만큼, 아직도 강세현에게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우월감.
“강세현.”
내 부름에 또렷한 눈동자가 서서히 나를 향했다. 불빛이라곤 선하게 비추는 달빛밖에 없는데 컴컴한 어둠 속 뜨거운 눈빛이 어느 때보다 선명히 보였다.
넌 왜 이토록 여전할까.
“네가 모르는 게 있는데,”
강세현은 그렇게 오랫동안 날 지켜봤으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건 모르고 있었다.
내겐 오랜 습관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늘 뭐든 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습관.
늘 괜찮다고 넘어가면 정말 괜찮았으니까.
마음에 생긴 상처 따위 그저 옅은 생채기에 불과해서 어느 순간 그 자리가 어디였는지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다. 이번에도 역시 그러겠지.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무리 애를 써도, 뻥 뚫려 버린 마음은 메워지질 않았다.
아주 잠깐도 괜찮은 적이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괜찮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제 다 괜찮아졌는데 너무 늦게 와서 싫으냐고?
“난 너랑 헤어지고 단 한 순간도 괜찮은 적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