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그날 저녁, 집으로 찾아온 강세현은 자리에 앉자마자 이런 말을 던졌다.
“이사하자.”
‘하자’라니. 여기가 같이 사는 곳도 아닌데 마치 함께해야 하는 것만 같은 말투였다.
지금 사는 곳에 정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위치나 거리적 요소 말고도 나는 이 동네를 무척 좋아했다. 오랜 시간 한결같이 친절하신 주인집 할아버지나 항상 챙겨 주는 동네 주민분도 좋았다.
하지만 강세현이 찾아오면서부터 어느 날은 좋고, 어느 날은 싫어졌다. 강세현이 찾아오는 날엔 그 어느 때보다 따듯했던 곳이, 찾아오지 않는 날엔 외롭고 쓸쓸하기만 한 장소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사하자는 말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하는 건 상관없는데 어디로?”
“나 사는 데.”
강세현이 사는 곳이 어딘지 모른다. 건물은 당연하거니와 동네조차 모르고 있었다. 회사에서 얼마나 걸리는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다닐 수 있는 곳인지, 그런 문제는 둘째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떤 식으로 같은 장소에서 살게 되는 건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았다. 내게 최고의 장소는 결국 강세현이 머무는 자리였고, 그거면 충분했다.
“그래.”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하자 상대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내가 거절할 줄 알았어?”
“아니. 그래도 고민은 좀 할 줄 알았지.”
“왜?”
“갑작스럽다고 할 줄 알았어.”
대학 때 잠깐 사귀었다 해도 헤어진 지 오래되었으니 다시 만나도 거의 새롭게 시작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다시 만나기로 한 지 고작 이틀 만에 같이 살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거에 동의하는 게 남들이 보기엔 갑작스럽게 느껴질 수 있었다. 그동안의 참을성은 어딜 가고 다시 만나자마자 이렇게 서두르는 거냐고.
하지만 당사자인 우리는 달랐다. 그토록 힘들게 참아 왔기 때문에 더 서둘러야 했다. 우리는 그 시간을 날려 버렸으니까. 조금이라도 빨리, 그리고 더 함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1분 1초가 아까웠다.
“7년이나 걸렸는데 뭐가 갑작스럽냐.”
그렇게 말하자 강세현은 뭔가 생각난 듯 안타까운 눈을 했다.
아마도 허투루 날려 버린 아까운 시간을 떠올리는 거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앞으로도 평생 그 시간만큼은 기억에서 완전히 지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면 그땐 우리 참 바보였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꼭 필요한 것만 들고 와.”
“그럴게. 어차피 안 어울릴 테니까 가구 같은 건 버리고 소파만 들고 가야겠다. 그리고 필요한 거 생기면 네가 살 거잖아.”
“잘 아네.”
날 향한 미소가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언제 가면 돼?”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일단 그러면 주말 동안 짐 좀 챙기고…….”
“그런 건 사람 시킬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원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회사 간 사이에 해 줄 수도 있어.”
그 말은 즉, 주말까지는 못 기다린다는 소리였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뜻이 그냥 지금이라도 오라는 소린가?
머릿속으로 곰곰이 따져 봤을 때, 오늘이 수요일이니 사흘도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이사 준비를 해야 했다. 아무리 짐이 적어도 그렇지 혼자는 무리였다.
“그럼 그렇게 해 줘.”
이번에도 역시 강세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대답을 예상했냐고 묻자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언제는 받는 것도 좀 익숙해지라며.”
“어. 착하네. 이젠 신세 진다는 말도 안 하고.”
후회했으니까.
헤어지고 시간이 지난 뒤, 조금의 다정함이라도 더 얻어 내고 챙겨 주는 손길을 더 받았어야 했다고 무진장 후회했다. 그래야 기억할 게 하나라도 더 남아 있을 텐데. 하루를 살아가게 할 추억이 하나 더 쌓여 있었을 텐데. 그렇게 소용없는 후회를 했었다.
“그러면 금요일 날 오전에 옮기면 되겠네.”
“내일은 왜 안 되는데.”
“아무리 그래도 집주인한테는 말해야지. 계약 기간 남아서 다른 세입자도 구해야 돼.”
“그럴 필요 없으니까 내일로 해.”
“왜, 네가 그때까지 월세 부담하게? 됐어. 아직 8개월이나 남았는데 뭐 하러 그래. 그리고 이건 부담스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 보증금 빨리 돌려받으려고 그러는 거니까 오해하지 마.”
새로운 임차인을 구해서 집을 양도해야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새아버지에게 진 빚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갚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남에게 맡겨 놓은 돈은 하루라도 빨리 돌려받는 게 맘이 편했다.
그런데 이런 내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강세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던졌다.
“그 돈 내가 줄게.”
당연히 단칼에 거절했다.
“싫어. 그 돈을 네가 왜 줘, 줄 이유가 없는데.”
나를 무심하게 보던 강세현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히 습관처럼 뱉는 그런 게 아니라, 뭔가 고민이 있는 것처럼 보여 의아했다.
돈 안 받겠다고 한 게 그렇게 고민할 일이야? 아니면 내가 혹시 뭔가 잘못 말한 건가?
이런저런 이유를 찾는 사이 강세현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이유가 있으면 받겠네?”
“그렇겠지. 근데 네가 집주인이 아닌 이상 나한테 돈 줄 이유 없잖아. 설마 건물주라도 되려고?”
“이미 됐어.”
“되……”
되긴 뭐가 돼, 라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문득 좀 전에 한 대화가 생각났다.
‘아마 다 알게 되면 부담스러울걸.’
‘안 그럴 거야.’
‘그 말, 절대 무르지 마.’
대체 왜 그런 말을 하나 했더니.
언제부터냐고 물었다. 나를 지켜봐 온 게 몇 년이나 됐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3년쯤 됐을걸.”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 그동안 봐 온 집주인 할아버지는 대체 누구였지? 아래층에 산다는 할아버지 친척도 가짜인 건가? 여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하던 중 가장 어이없는 건, 결국 내가 낸 월세가 강세현의 주머니로 갔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힌 표정으로 바라보자 가지런히 정리된 눈썹 끝이 쑥 내려갔다. 이제 와서 그런 표정 지어 봤자 소용없는데.
“거봐. 부담스러울 거랬잖아.”
억울했다. 이 상황에서도 다소 곤란한 표정을 지은 강세현이 멋있어 보여서.
아마 난, 강세현이 무슨 짓을 해도 평생 미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1월 중순에 갑자기 폭설이 왔다.
밤부터 눈이 온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설마 이 정도로 내린 줄은 몰랐다. 고작 몇 시간 만에 바깥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강세현: [눈 많이 왔으니까 지하철 타]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닌데.
나: [오늘 이사 괜찮아?]
창밖으로 슬쩍 내다본 밖에는 눈이 제법 쌓여 있었다. 큰 길가야 괜찮겠지만, 좁은 골목길이 하필이면 언덕이어서 이삿짐 차가 오는 길이 걱정이었다.
강세현의 말을 듣고 그냥 어제 했으면 좋았을걸. 그래도 중요한 물건만큼은 내가 직접 챙겨야겠지 싶어 일부러 오늘로 미뤘는데, 어제저녁 실제로 챙긴 건 여권과 몇 가지 서류들뿐이었다. 이렇게 눈까지 올 줄 알았다면 그냥 어제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강세현: [알아서 할 거야]
예상했던 답변이 왔지만, 여전히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평소보다 아주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출근길에 확인한 골목길은 생각한 것보다 더 심했다. 애매하게 눈이 녹은 상태로 굳어 버려 얼음판 길 수준으로 걷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해가 완전히 뜨면 좀 나으려나.
일단 가질 수 있는 희망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빨리 해가 번쩍 떠오르길 기도했다. 오늘 꼭 이사를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러면서 어떻게 참았지.
주말에 짐을 챙기려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어? 출근하나 보네.”
이 새벽에 아무도 없을 거라 예상했는데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일찍 눈을 치우러 나온 동네 마트 사장님을 우연히 만났다. 오늘 이사 간다는 말과 함께 그동안 감사했다고 인사를 전했다. 더 좋은 곳으로 간다고 하자 동네 주민이 떠나는 건데도 잘됐다며 함께 기뻐해 주셨다.
문득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7년 전 한국에 올 때는 그 당시 고마웠던 이들에게 제대로 감사 인사도 전하지 못한 채로 시카고를 떠났었다. 이번엔 한 사람에게라도 제대로 전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드르륵-. 드르륵-.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익숙한 동네 풍경을 눈에 넣고 있는데 코트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혹시나 했는데 이렇게 이른 새벽에 절대 전화를 걸지 않을 사람이었다.
“어. 출근길 아냐?”
- 맞아.
“근데 웬일로 전활 걸었어?”
- 목소리 듣고 싶어서.
분명 가슴 설렐 말이지만, 바로 옆에서 다른 이가 이런 대화를 듣고 있을 생각을 하니 수치스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무 말 하지 않자 수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진짜 왜 전화한 건데.”
- 물어볼 거 있어서.
“갑자기 이렇게 전화를 걸 정도로 중요한 거야?”
- 어.
혹시 몰라 걷는 속도를 늦췄다. 차라리 아무도 없는 골목에 서서 받는 게 나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너무 뜻밖의 질문이 날아왔다.
- 저녁 뭐 먹을래?
갑자기 전화를 걸 정도로 중요한 질문이 고작 저녁 메뉴에 관한 거라니. 다시 걷는 속도를 올리며 그게 뭐냐고 웃었다.
- 왜, 밥 먹는 거 중요하잖아.
“그래. 제일 중요하지.”
사실 기뻤다. 이런 게 내가 원했던 그런 일상이었다.
“넌 먹고 싶은 거 없어?”
- 오늘은 네가 골라. 처음이니까.
“처음?”
- 우리 집에서 밥 먹는 거. 난 매일 먹잖아.
강세현이 매일 혼자 머물던 곳. 그 공간에 들어가 앞으로는 함께 마주 보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그러고 보니 또 나만 처음이네.”
- 뭐가.
“뭐긴. 전부 다지.”
마주 앉아 처음 술잔을 기울일 때까지만 해도 강세현은 내게 첫 술친구로 기억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이후 서툰 연애도, 뜨거운 스킨십도 모두 다 강세현을 통해 경험했다.
내게 항상 처음은 강세현이었고, 마지막도 전부 강세현이었다.
그런 걸 따지다 보니 발걸음이 어느덧 거의 골목 어귀에 가까워졌다.
“좀 억울한데. 난 다 처음인데 넌 처음인 거 없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웃고 있었다. 내가 처음일 수는 없어도 마지막일 수만 있다면 그걸로 괜찮았다.
드나드는 목의 첫머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야 지하철역이었다. 이렇게 이른 새벽에는 정말 아무도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코너를 돌던 그 순간.
“왜 처음이 없어.”
분명 핸드폰을 들고 있는데, 어딘가 더 가까이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우뚝 선 인영이 그 자리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갈색 눈동자가 날 보곤 예쁘게 휘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상대가 바로 내 앞에 서자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왜 처음이 없어.”
“…….”
“내 첫사랑이 넌데.”
그렇게 말한 강세현은 아무도 없는 길 한복판에서 나를 꽉 껴안았다.
겪어 보지 않은 이가 본다면, 우리는 그저 한 번 헤어지고 다시 만난 연인일 뿐이었다. 스무 살 무렵에 만나 아주 잠깐 불같은 사랑을 하고, 서른이 넘어 다시 인연이 닿아 만난 사이.
‘한 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어.’
누군가 묻는다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 우리의 이별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헤어짐의 순간은 찰나였지만 그 아픔은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가슴 아픈 헤어짐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됐다. 헤어지고, 헤어지고, 또 헤어지고. 오랜 시간 동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별을 경험하며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을 마주했었다.
그럼에도 끝내 놓을 수 없는 사랑이었다.
내게 가장 큰 불행을 알게 했지만 내게 가장 큰 행복을 알게 했고, 마지막을 함께해 주진 않았어도 처음을 함께해 준 사랑이었다.
헤어지고, 또 헤어졌지만, 끝내 내가 다시 택한 사람은 강세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사람.
나에게만 항상 다정한 사람.
그리고 절대 나를 포기하지 않을 한 사람.
돌고 돌아 결국, 내 마지막 종착지는 바로 너였다.
<돌고 돌아 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