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연진의 별채로 돌아온 해월은 방문 앞에 서 있는 인영을 보곤 멈칫했다.
설마 했더니, 연진이 아직 깨어있는 것이다.
돈 자루를 마루 밑에 숨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걸 들켰다간 연진에게 추궁당할 것이 뻔했다.
누굴 닮아 저리 우직한 것인지 새삼스레 궁금할 지경이었다. 속으로 한숨을 지은 해월은 연진에게 다가갔다. 피곤하지도 않은 걸까. 잠이 많은 편도 아닌 것 같던데.
“…새벽인데 안 자고 뭐 해.”
“기다렸습니다.”
“그러니까 왜 기다렸냐고.”
“잠이 안 와서요.”
“변명을 할 거면 조금 더 정성 들여 해라. 지금이라도 자.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는 것이 아예 안 자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잠을 쉽게 거르는 자신이 하기엔 모순적인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연진이 걱정되어 하는 말이었다.
“기다리는 것이 부담스럽습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사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싫어했다. 꼭 자신에게 기대하고 의지하며 사는 고향 사람들이 생각나서.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쓰이고 그리워지는 것, 누군가는 그것이 고향이겠지만 해월은 아니었다. 차라리 연진의 기다림이라면 그렇게 불러도 좋을 감정이었다.
그 말을 연진에게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럼 됐습니다.”
되었다는 그 말이 왜 마음에 박히는지, 해월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스쳐 지나가는 뒷모습을, 해월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연진의 그림자마저도 사라지고 나서야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연진이 주었던 약재를 깨물어 생긴 상처에 발랐다.
“…아프다.”
따끔거리는 정도의 통증이지만, 이상하게도 커다란 자상을 입은 것처럼 쓰린 느낌이 들었다.
다음날이 되어도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연진은 해월의 손가락 상처에 관해 묻지도 않았다. 책 읽다가 베였다는 말을 듣고 알겠다 답할 뿐이었다.
해월은 연진에게 치유술을 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가르쳐준다고 해도 바로 터득할 수도 없지만, 원리 정도는 알려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치유술은 이렇게 환부를 손으로 덮어 접촉할 때가 효력이 가장 좋아.”
“예.”
해월은 연진의 손을 그러쥔 채 대강 시범을 보였다.
“영력은 네 몸의 일부야. 잘 가다듬어서 이 상처 속으로 파고 든다고 생각하면 돼.”
“알겠습니다.”
설명을 들은 연진은 손끝으로 영력을 내보냈다. 그 깨끗한 기운을 느낀 해월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그런 느낌으로.”
오늘치의 수련이 끝나고 마루에 앉아 나란히 쉬던 그때, 해월은 궁금한 것이 생겨 입을 열었다.
“…노파심에 묻는 건데, 너 혹시 나중에 영하라도 될 거야?”
“아니요. 아직은 별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게다가 저는 나이가 찼는걸요.”
그 말을 듣고도 해월은 진지하게 충고했다.
“웬만하면 영하는 하지 않는 게 나을 거야.”
“어째서요?”
“따분한 집단이니까. 말끝마다 천신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설파를 할 게 뻔하거든. 네가 그런 일 하는 건 썩 내키지 않아.”
사실, 연진은 팔대 세가의 공자인 만큼 영하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이 작았다. 오늘날 영하는 보통 평민이나 한미한 귀족이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택하는 직업이 되었으니 말이다.
“영하가 되고 싶었던 적 있었다면서요.”
“그때는 그때만의 사정이 있어서였지. 아무튼 영하는 하지 마.”
제가 영하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였을 뿐, 대단한 대의 때문이 아니었다.
귀족들의 안위는 그리도 귀하게 여겨 정성 들여 정화하는 주제에, 지방 평민들의 마을은 정화하는 시늉만 하고 금세 신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더러 보았다.
천신을 모시는 신하라는 호칭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태였다. 뭐 그 덕에 제게 의뢰가 많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영력의 근본은 천신에게 있다고 하는데, 내 보기엔 아니야. 천신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도 의문이고.”
“귀신도 요괴도 있는데 천신이라고 없을까요.”
“듣고 보니 그렇네.”
해월은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만일 정말 천신이 있다면 하나쯤은 묻고 싶어. 이런 삶은 당신이, 당신의 권리로 내게 지운 것이냐고.’
천신이 있다면 이 오갈 데 없는 원망을 쏟아붓고 모든 원념을 풀고 싶었다. 이따금 자신이 죽는다면 꽤나 한 맺힌 귀신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옛 설화에 천신의 선택을 받아 권능을 타고난 자는 이승과 저승을 모두 다스릴 힘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거 나도 들어봤어. 천 년 전에 그렇게 선택받은 사람이 황제가 되어 백난국을 세웠다는… 흔한 건국 신화지.”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흔한 건국 설화였다. 백난국은 전쟁에 미쳐있는 나라로 불릴 정도로 침략전쟁을 반복한 나라이다. 이 나라의 시초부터가 전쟁이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그 이야기는 자국의 비인간적인 침략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에 반해 연진은 그 신화를 꽤나 신빙성 있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 건국 신화에 있는 예언의 해에 황자님께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정세를 잘 모르지만 모두 그 황자님께서 황제가 되실 거라고 합니다.”
“아서라 그 황자님은 황제가 못 될걸?”
해월은 연진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도 정세에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것만큼은 알았다. 황제의 자리는 그리 쉽게 오를 수 없다는 걸.
“지금 황제한테 황자가 스무 명도 넘는 걸로 아는데, 고작 예언의 해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황제가 되기는 힘들겠지. 뭐 나 같은 사람은 누가 황제가 되든 하등 상관 없… 읍.”
그때 연진이 손을 뻗어 해월의 입을 막았다. 해월은 연진을 째려보았다.
“황가에 대해 그리 말씀하셨다간 잡혀갑니다.”
연진은 입을 막았던 손을 거두었다. 해월은 입술을 삐쭉이며 불만을 내보였다.
“설마 그 잘난 황가에서 일개 퇴마사 따위를 죽이기라도 하겠어? 이런 얘기 좀 했다고 끌려가면 백난국에 남을 사람 하나 없겠다.”
나라님 욕하지 않는 백성이 어디에 있겠나. 그리고 저는 일반적인 백난국인의 흑갈색 눈동자와 다른 검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순수한 백난국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백난국은 오랜 침략전쟁으로 통일을 이룬 나라다. 그만큼 이민족의 피가 더러 섞여 있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제 친부모도 백난국 출신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뿌리를 따져보자면 백난국은 제 나라가 아닌 셈이다.
이러한 생각을 연진이 알 턱이 없으니 해월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건 그렇지만 조심해서 나쁜 것은 없으니까요.”
“됐어, 됐어.”
차라리 황실 모독으로 잡혀가는 것이 나을듯하다.
***
해월의 방을 정리하던 원복은 짐을 들어 옮기다 순간적으로 자세를 멈추었다.
가지고 있는 짐이 거의 없는 탓에 분명 가벼워야 할 서랍이 어쩐지 무거웠기 때문이다. 의구심이든 원복은 그것을 내려놓고 서랍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 순간, 연진이 방에 들어왔다.
“도련님.”
“무얼 하고 있었느냐.”
“귀빈의 방을 정리하고 있었나이다. 딱히 치울 것은 없지만 간단히 청소해두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요.”
“사부가 좋아하지 않을 텐데.”
연진은 해월이 자신의 방에 허락 없이 들어오거나, 그의 물건에 손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안 좋아하실 게 뻔하지만, 정리는 하고 살아야 하잖아요.”
원복이 맞는 말을 하자 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무엇이냐?”
“아, 이건 서랍이 꽤 무거워서 무엇이 들었나 확인하려던 차였습니다.”
“그래?”
연진은 작은 호기심을 느꼈다. 주인이 없을 때 방을 뒤지는 꼴이라 망설임이 느껴지긴 했으나, 그래도 그가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서랍을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그러자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 두 개가 서랍 안에 자리한 것이 보였다.
“이건… 금화…?”
주머니의 틈새로 보이는 금빛과 은빛의 반짝임이 눈을 어지럽혔다. 원복은 그 속에 손을 넣어 금화를 한 닢 꺼내 보았다.
“우와 무슨 금화가 이리 많대요? 오 이건 은화로 된 자루입니다.”
연진의 눈이 가늘어지고 미간 사이에 주름이 졌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간 해월은 저의 돈을 꾸어다 쓸 정도로 가진 돈이 없었다. 그런데 이리도 많은 돈이 있다니.
돈이 없다고 구시렁대던 그의 지난 언동이 거짓이었다기엔 무리가 있었다. 대체로 실없는 소리만 하는 해월이지만, 이따금 보이는 진실한 모습을 연진은 알아채고 있었다.
본인은 그것이 티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듯한 모양이지만 말이다.
연진은 손톱 끝을 문지르며 상념에 잠겼다. 그에 반해 원복은 깊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귀빈께서는 돈을 어디서 이리 많이 구하신 걸까요. 만날 말끝마다 돈돈하더니… 이 정도면 한평생 먹고살겠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돈을 어디서 이리 구했을까.”
이만한 돈을 해월에게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이 근방에 단 한 명뿐이었다.
“귀빈께서는 재주가 좋으시니 가능한가 봅니다.”
“재주라…. 그래, 무슨 재주를 부린 건지 확인해보아야겠구나.”
연진은 그 자리를 박차듯 서둘러 나갔다. 다소 거친 그의 행동에 원복은 물끄러미 열린 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