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또래 사내들에 비해 조금 작은 체구의 사내에게서 풍기는 섬뜩한 기운에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지금껏 기가 죽는다는 경험을 해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근자에는 그런 일이 잦은 듯했다. 사부나 제자나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느새 이리 닮아버린 건지.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지, 해월은 개의치 않고 할 말을 이어갔다.
“생전 처음으로 느껴보는 괴로움이겠지요. 하나 그 애가 겪었을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대가 아군이라 다행이군.”
진심으로 하는 얘기였다. 이런 사람을 적을 두었더라면 꽤나 힘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겉보기엔 유약해 보여도 심지가 곧고, 검푸른 눈에서 나오는 오묘한 빛은 감정을 읽기 어렵게 했다. 분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차분한 듯도 보였다.
“저도 장로님께서 제 편에 서주셔서 감사합니다.”
결론은 서로가 아군이라 안심이라는 얘기다. 적으로 두면 서로가 꽤나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저는 문생들 사이에 숨어들어 검무를 할 예정입니다. 듣기론 가장 우수한 문생에게 하사주를 내린다고 하더군요.”
“맞소. 명문가들이 그 자신들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하는 것이지. 말이 하사주이지 실상은 그들이 먹던 술을 한 잔 내어주는 것뿐이네. 맘에 안 드는 족속들이야.”
“제게는 좋은 일이지요. 그것을 이용하여 누명을 씌울 것입니다. 반박하려는 순간, 걸어둔 주술을 풀면 그자는 곧바로 혼절하여 그대로 몰락할 겁니다.”
결국 귀족가의 허영심이 그를 죽일 것이다. 그간 당연하게 누려왔던 권위 탓에 목숨을 잃고 구천을 떠돌지어니.
“이것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보장은 있는가.”
“없습니다. 제가 신도 아닌데 미래를 알 수는 없지요.”
괜한 장담은 하지 않았다.
“다만 저는 제 길을 믿습니다.”
“그대가 위험할 수도 있네.”
“제 위험은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해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나 절 도와주실 방법이 있습니다. 장로님께선 기민하신 분이니 제가 계획을 이행했을 때 잘 맞추어 대응해주시면 됩니다. 자연스러우려면 그게 나을 겁니다.”
“알겠소.”
“그리고 다른 장로님들을 설득하여 그 아이를 가주로 세울 수 있도록 판을 짜주십시오.”
“그 멍청한 늙은이들은 염려하지 마시오. 어차피 제 이익만 보장된다면 어느 편이든 설 자들이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입가에 고인 작은 미소에는 여유로움이 묻어 있었다.
***
인간과 인간의 관계라는 것은 의외성이 짙다.
정말 안 맞는 두 사람이 사제관계를 맺은 것도 의외였고, 항상 무던히 잘 지내는 듯 보이던 원복과 연진 사이의 기류가 묘한 것도 의외였다.
아까부터 계속 찬바람이 부는 것이 느껴졌다. 대체 자신이 쓰러졌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해월은 묘하게 어색한 공기 속에서 원복과 연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두 사람, 아무래도 싸운 눈치였다.
연진은 말수가 적지만 그래도 원복이 말을 붙이면 곧잘 답하곤 했다. 가끔은 먼저 말을 붙이기도 했고. 이것만 보아도 연진과 원복은 꽤나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서로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외하는 것이 참 거슬렸다.
심지어 방금은 아무 말도 없이 쌩하고 지나가 버렸다. 참다못한 해월은 연진과 단둘이 방에 남았을 때를 놓치지 않고 질문했다.
“…둘이 무슨 일 있어?”
“없습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지만, 솔직히 누가 보아도 싸운 눈치였다.
“없기는 무슨. 이 싸늘한 분위기 어쩔 거야. 너 걔한테 뭐 잘못했니?”
“그건….”
잘잘못을 따지자면 연진의 탓이 맞았다. 그래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네가 잘못 했구나. 어린애는 잘 삐진다고. 너도 어리지만, 걔는 더 어리니까 연장자로서 신경 써줬어야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핀잔을 주고 있긴 하지만 해월도 찔리는 일이 있었던 터라 그다지 떳떳한 입장은 아니었다. 연진은 고개를 푹 숙이며 깊고도 나직하게 호흡했다.
“제가 말을 조금… 엄히 했습니다.”
나름 반성하는 투로 말을 꺼냈다. 해월이 쓰러졌을 때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원복이에게 괜한 화풀이를 한 듯하여 후회가 막심했다.
“서운할 만하네. 너는 냉정하게 생겨서 가만히 있어도 무서운데, 엄하게 말하면 더 무섭고 더 섭섭하지.”
“…지금 누구 편을 드시는 겁니까.”
“내가 언제 누구 편을 든다고 했냐.”
어린 애도 아니고 이 와중에 편드는 게 중요한가 싶었다.
“하여간 빨리 사과해. 원래 이럴 땐 나이 많은 쪽이 사과하는 거야.”
“하오나….”
“그간 충실하게 널 모셨던 놈이랑 계속 이렇게 어색하게 지낼 거야?”
이 어색한 기류 속에 껴있는 것도 싫지만 두 사람이 그렇게 지내는 것은 더욱 싫었다. 원복은 제가 떠나고 난 뒤 연진과 가장 가까이에 있을 사람이니까. 한 톨이라도 감정의 앙금이 남지 않길 바랐다.
***
해월은 연진의 소매를 붙잡고 원복이 기거하는 행랑으로 향했다. 연진은 흡사 끌려가듯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뒤따랐다.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됐네요. 알아서 하려다 초 치지 말고 등 떠밀어줄 때 해라.”
해월은 완강히 거부하는 연진을 하인들의 처소로 밀어냄과 동시에 핀잔을 주었다. 저와 원복이 소원해졌을 때는 연진이 절 등 떠밀었는데, 어째 지난날과는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었다.
사실 해월은 연진에게 영력과 관련된 것 외에도 이런 사소한 것들을 훈계하고 싶었다.
그게 연장자답고, 스승답지 않나 싶어서. 괜한 자존심이었다.
“예전에 나랑 걔랑 소원해졌을 때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얼른 사과하라니까.”
복수라면 복수이기도 했다. 해월은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예상대로 연진은 아주 순순한 반응이었다.
“알면 다행이네. 빨리 가라 그 아이 마음 더 상하기 전에.”
“…예.”
그 애매한 답을 끝으로 연진은 홀로 행랑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는 생에 최고로 어색한 기분을 느꼈다. 평생 남이 저한테 잘못한 경우는 많았어도 자신이 먼저 남에게 잘못한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난날 해월과 원복의 사이가 소원해졌을 때 한 소리 했었는데, 정작 자신이 사과를 못 하면 우습지 않은가. 우스운 꼴을 보느니 차라리 어색함을 견뎌내고 사과하는 것이 나았다.
하여 원복을 눈앞에 두고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말을 꺼내었다.
“…지난번엔 미안했다.”
“어… 네….”
원복 역시 느닷없이 들어와 사과를 건네는 연진이 어색했다.
“내가 경황이 없어서 엄한 너를 탓한 것 같구나.”
“괜찮습니다. 본디 아랫사람이란 윗사람의 화풀이마저도 달게 받아야죠.”
원복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솔직히 속상하긴 하였으나 연진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용서할 수 있었다.
반면 연진은 그 웃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에 원복은 개구쟁이같이 웃었다.
“농입니다, 도련님. 역시 귀빈 말씀대로 도련님은 놀리는 재미가 있으시네요.”
“너….”
뭐라 하려다가 되레 피식 웃어버리는 바람에 분위기가 풀어졌다. 주종관계였지만 두 사람은 거의 형제 같은 사이였다. 그 때문에 서로가 어떤 성격을 가졌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알았다.
“저도 도련님이 진심으로 저를 엄히 대하고자 한 것이 아니란 걸 압니다.”
원복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귀빈께서 위독하시니, 예민해지신 거지요.”
자신이 연진의 입장이었어도 그랬을 것 같다. 소중한 사부가 위독하게 되었으니 어떤 제자가 아니 공분하겠는가.
“터놓고 말해서 마음이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면 거짓이지만… 이리 사과해주셨으니 그것으로 됐습니다.”
“…이해해주어 고맙구나.”
진심으로 고마웠다. 누군가의 이해를 받는 일은 마땅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신 다음부터는 절대 그리하지 마십시오. 귀빈께서 위독하셨을 땐 저도 도련님만큼이나 속상했습니다요.”
“그래, 알았다. 내 약조하마.”
깔끔하게 사과를 마치고 돌아온 연진은 해월과 상의를 시작했다.
주된 내용은 어떻게 하면 작금의 위기 상황을 타파하고 계획을 잘 마무리 지을 것인가에 대해서였다.
“말이 팔가 연회이지 사실상 우리 가문의 위세가 예전 같지 않으니 이제는 칠가 연회라 불릴 수준입니다.”
자조적인 말이었지만 해월은 그 말이 마냥 우습게 들리지 않았다. 우직한 무가(武家)로 이름을 날렸던 가문이 이토록 빨리 쇠락하게 된 이유는 현 가주의 공이 아주 컸으니 말이다.
더불어 제 아비를 닮아 사치스럽고 방탕한 아들까지. 가히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연회에 참석하는 가문이 적을 수도 있겠네.”
애초에 이런 연회는 공식적인 것이 아니다. 가주들끼리 친목을 도모하다 보니 일종의 문화처럼 굳어진 것이기에, 당사자들이 참석을 원치 않으면 그저 흩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 말이 맞습니다. 다른 가문의 가주님들이 대놓고 숙부님을 멸시하는 수준이니 말입니다.”
“흠… 오히려 잘된 일이야. 혹시라도 다른 가문이 지지해주면 큰일이었거든.”
“한데… 사부께서 꾸미신 획책… 많이 위험한 것 아닙니까.”
아무리 안심시켜도 그의 걱정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해보아도 무용한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익히고 배워두는 것인데, 타인을 배려하는 방법을.
“…잘 들어.”
해월이 가진 것은 진심뿐이었다. 장신구처럼 겉보기에만 화려한 말들은 하기 어려웠다. 정확히는 연진의 앞에서 하기 어려웠다.
“‘일’이 벌어지면 절대로 동요하지 말고 태연자약하게 행동해. 알았지? 절대 동요하면 안 돼.”
“그리 말씀하시니 두려워집니다.”
“겁먹을 필요까지는 없고, 흔들리지만 않으면 돼. 장로님께도 말씀드려 놨으니 괜찮을 거야.”
“만일 일이 잘 풀리면 저는 가주가 되는 건가요…?”
이건 해월이 듣던 질문 중 가장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연진은 줄곧 가주가 되는 것에 대해 반감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잘만 풀리면 그리되겠지. 왜? 내키지 않아 하더니 가주가 되고 싶어지기라도 했어?”
“정녕 되고자 하여 묻는 것이 아닙니다. 안 할 수만 있다면 안 하고 싶어서 하는 말입니다.”
“사내자식이 감투 욕심도 안 나냐… 이 무욕한 놈아.”
타고나길 무욕적인 성격인지, 자라나는 과정에서 그리된 건지는 모르지만 연진은 무언갈 탐내지 않았다. 하다못해 먹기도 소식하고, 책을 제외하면 무언갈 갖고 싶다는 의사를 거의 내비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연진이었다.
“저라고 탐하는 것이 없는 줄 아십니까.”
“응? 너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이에 연진은 해월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런 게 있어요.”
“뭐야 왜 어물쩍 넘어가는데?”
해월은 연진이 제게 숨기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영 내키지 않았다. 타인의 속내를 완벽히 알려 하는 것이 무례한 행동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알고 싶은 것이 스승의 마음이었다.
“비밀입니다. 사부께서도 틈만 나면 비밀이라고 숨기시는데, 저라고 비밀이 있지 말라는 법 없잖아요.”
“뭐…?”
해월은 할 말을 잃음과 동시에 생각했다.
‘얘… 언제부터 이렇게 잘 기어올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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