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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53화 (53/124)

53화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소영현은 연진의 손을 떼어내려 했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허송세월하는 공자라더니 악력이 이리 좋을 줄이야. 소영현도 힘으로 누군가에게 뒤처지는 편은 아니었으나 연진의 힘이 확연히 더 강했다.

“저도 이리 결례를 범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연진의 말은 사실이었다.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은 정말이지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은 해월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겠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끓어오르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분하고 무던하게 살았던 연진에겐 낯선 변화였다. 그 단초를 제공한 이는 이번에도 해월이었다.

해월은 제게 늘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이제까진 그 변화들이 좋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아프고 싶지는 않았다.

“그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말씀해주십시오.”

***

‘그 길로 헤어져 정확히 어디로 갔는지는 모릅니다.’

소영현은 해월이 사라진 방향을 알려주었고 연진은 그길로 곧장 뛰고, 또 뛰길 반복했다. 발이 까져 피가 나고, 상처가 깊어지는 줄도 모르는 채로.

그리하여 검은 너울을 쓴 그를 발견하자마자 안도감과 동시에 두려움이 밀려 들어왔다.

놓칠까 봐, 그게 불안해서.

“사부…!”

가까스로 해월을 붙잡은 연진은 그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검은 너울이 제 자리를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해월은 갑작스러운 연진의 등장에 당혹감이 일었으나 이내 차분한 자세를 갖추었다. 떨고 있는 어깨를 잡고 살며시 밀어내자 연진은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그건 본인의 의지라기보단,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의원, 의원에게 보여야….”

아니나 다를까 연진은 해월의 몸 상태를 살피며 의원 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해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괜찮아. 소 공자가 치료해주셨어. 걱정 말고 얼른 돌아가.”

그 말에 미약하게 떨고 있던 연진이 순식간에 굳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은 그의 상태에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저를 밀어내는 그 말이 몹시도 거슬렸다.

대체 무엇이 그리 복잡해서 자꾸만 떠나려 하고, 곁을 내주지 않으려 하는 것일까. 연진은 해월의 언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싫습니다.”

연진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심상치 않은 악력에 해월이 한쪽 눈을 찌푸렸다. 본래에도 힘이 좋은 편인 건 알고 있었으나, 지금은 잡힌 손목을 타고 형언하기 어려운 기세가 느껴져 왔다.

“…이거 놔.”

“못 놔요.”

연진의 손을 뿌리치려 하였으나 그는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주위에 둘을 제외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의 눈에 띄기라도 했다간 큰일이었다.

지신과 함께 있는 것을 들킨다면 이 모든 일을 연진이 꾸몄다 오해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은 해월만이 가지고 있는 것인지 연진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눈에 담았다. 타오를 것처럼 맹렬하게.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 이거 얼른 놔.”

거세게 거부해 보았지만, 연진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안 돼요. 절대 못 놔.”

연진은 해월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고 조금 떨어져 있던 문간 뒤로 그를 이끌었다.

어느 정도 모습을 숨기게 되자 해월은 조금 전처럼 거세게 연진을 뿌리치지 않고 나직이 타일렀다.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

머리가 좋은 놈이니 지금 자신이 뭔 짓거리를 하는 건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해월은 더욱 연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이 일생일대의 기회인데 그걸 날리겠다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한시라도 빨리 연회장으로 돌아가서, 상황을 정리하고 자신이 새로운 권력자임을 보여줘도 모자란 순간이다. 이곳에서 이리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동요하지 않기로 했잖아.”

이성적인 해월의 말에 연진의 낯이 일그러졌다. 조금 전부터 서서히 가라앉았던 감정이 다시 폭풍처럼 몰아쳤다. 불안과 초조를 넘어 분노까지 일었다. 귓가엔 이명이 울리는 것 같았다.

가주가 되겠다고 한 것도, 동요하지 않기로 약조한 것도 순수한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건 전부 해월이 권한 일들이니까. 그래서 응한 것뿐이다.

전부 당신을 위해서란 말이다. 이런 식으로 저를 괴롭게 하고,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당신이 내게 한 말이 거짓이라는 걸 몰랐을 때 얘기야!”

연진이 강하게 소리쳤다.

힘줄이 불거진 목과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은 해월이 지금껏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제게 이렇게 화를 내는 연진이라니.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다. 놀란 해월은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 싶어 의아했다.

연진이 화가 날 거란 예상은 했었다. 다만 그 정도가 얕으리라 여겼기에 작금의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해월의 눈에 있는 의아함을 읽은 연진은 이내 완전히 허물어졌다.

그는 줄곧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남들과 다른 제 사부의 무심함이 제게 만큼은 아닐 거라고.

등신같이, 대체 얼마나 큰 착각을 하고 있던 걸까. 당신에게 내가 특별하다고 그리 믿었는데, 나 역시 당신의 무심함에 예외는 아니었다.

그게 몹시도 쓰라리고 비참했다.

“당신은… 날 속였어. 나를 어리석게 보고, 우습게 만든 거야.”

해월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연진은 그의 어깨를 붙잡은 채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발밑이 꺼진 것만 같았던 두려움을 그는 단숨에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 얼마나 위력적인 일인가.

“…맞아. 난 너를 속였어. 근데 그게 너한테 손해가 됐어? 아니잖아. 네가 가주가 되면 지금껏 널 깔봤던 놈들한테 복수할 수도 있고, 가문의 명예도 다시 회복할 수 있어.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야?”

해월은 연진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제가 연진을 속인 것은 사실이지만 득실로 따지자면 그에게 실은 추호도 없었다.

이대로 더 나은 인생을 살면 될 텐데 굳이 저를 붙잡고 따지듯이 몰아붙이는 이유를 모르겠다. 제가 죽을 뻔하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살았고 일은 잘 풀리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그때, 해월은 제 어깨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연진은 울고 있었다. 분노와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서.

“당신… 죽을 뻔했습니다. 왜 그런 일을 한 겁니까.”

중얼거리듯 타박하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낮고 차가웠다. 안 그래도 몸이 미령한 모습을 여러 차례 보였던 해월인데, 그 몸 상태에 독까지 먹다니.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짓이었다.

“네가 명문가의 수장이 되는데 목숨 하나가 뭐 대수겠어. 결과적으로 죽지도 않았잖아.”

해월의 대답에 연진은 실소가 터지려 했다.

굳이 이렇게 확인시켜주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해월이 그 자신을 대할 때 유독 냉혹하고, 무심하게 군다는 걸. 그는 자신의 몸에 나타나는 이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못해 남의 일처럼 여겼다. 오히려 남의 일도 그것보다는 더 신경 쓸 것이다.

가장 아끼는 사람이, 가장 아끼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있었다. 이 사실이 이렇게 비참할 줄은 몰랐다.

“죽지 않으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러면?”

해월은 눈을 깜빡이며 정말이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연진은 차마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비스듬히 본 해월의 얼굴은 조금 창백해 보였다. 치료를 받았다지만 피를 토할 정도의 독을 먹고 곧바로 회복할 리 없었다.

아픈 사람을 붙잡고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신이 어딘가 결여되어 있다는 생각은 처음 만났던 날부터 했습니다.”

그 말에 해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의 결여를, 연진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속이 답답하고 메스꺼웠다.

“…그래서,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한다는 거야?”

기분이 안 좋았다. 누가 뭐라고 말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과거와 달리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이내 해월은 제 양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제 너도 나를 추악하다 여길까.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해월은 두려운 시선으로 연진의 눈을 바라보았다. 굵은 눈물이 흐르고 있는 두 눈은 여러 감정이 얽혀있어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웠다.

연진은 흔들리지 않고 답했다.

“후회는 없습니다.”

우습게도 후회 따윈 없었다. 이렇게나 속을 상하게 해도, 해월을 붙잡고 싶었다.

“그럼 이 손부터 놓고 연회장으로 돌아가. 너 지금 이러는 거, 나랑 장로님의 노력을 헛수고로 만드는 거야.”

“…알아요. 다 압니다. 하지만 그딴 곳으론 다신 안 돌아갈 겁니다.”

그 가식적인 웃음과 위선적인 행동, 속이 울렁거리는 기름진 음식, 시끄러운 악곡이 난무하는 곳은 가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지 않으면 그간의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그러나 그깟 계획이 허사가 되든 말든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럼 어쩌겠다는 건데!”

해월이 윽박을 질렀다.

연회장은 엉망이 되었고, 강석요 부자에겐 사술을 걸어두었다. 이런 상황에서 돌아가지 않는다면 대체 무얼 하겠다는 건가.

“내게 잘 대해준다고 했잖아요. 무조건 잘해주겠다고.”

‘내가 무조건 잘해줄 거니까.’

어느 날엔가 들었던 그 말은 지금도 연진의 귓가에 선하게 들렸다.

“당신의 기준엔 내게 잘해주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건 내가 바라는 게 아니에요.”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차분하였으나 그의 눈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금껏 누구도 내게 이리 잔인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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