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서장. 그리하여 너는 동백이라
추운 겨울의 끝자락에 접어든 날씨는 마지막 기세를 잃지 않고 매섭게 몰아쳤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눈은 발목까지 쌓여 오가는 사람들의 다리를 끈질기게 붙잡았다.
등에 활과 화살을 매고 허리에는 상아색 검을 찬 청년은 눈 위에 남은 짐승의 발자국을 따라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쫓는 것은 작은 토끼의 흔적이었다. 고기로 배를 채우고 가죽을 벗겨 말린 다음 팔면 약간의 곡식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추위에 빨갛게 달아오른 코끝을 문지른 그는 몸을 숙여 발자국을 살폈다. 이런 추위에 털가죽이라도 걸치고 산에서 짐승을 잡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그는 잘 알았다.
그가 사는 대지는 10년간 이어진 전란이 겨우 끝난 참이었다. 길고 길었던 전쟁을 끝낸 건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우영(遇榮)과 스스로를 호랑이의 후예라 하는 다섯 개의 부족이 협력해 세워진 오호(五虎).
우영은 강을 따라 넓은 평지를 지니고 있었고 오호는 질 좋은 철을 생산해 내는 광산을 많이 갖고 있었다.
두 나라는 생각했다.
많은 식량을 농사지을 수 있는 넓은 평야와 뛰어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질 좋은 철을 모두 다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하여 그들은 끝없이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며 경계했다.
그러나 전쟁을 한다는 건 승리했을 때 받는 이득보다 패배했을 때 지는 무게가 더 큰 법이라 우영도 오호도 섣불리 그 탐욕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두 나라의 건국부터 이어진 팽팽한 끈에 불을 붙인 건 새로 즉위한 오호의 젊은 왕이었다.
오호의 왕은 생각했다.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숙원을 이루고 업적을 쌓겠노라고.
기나긴 전쟁은 예상치 못했던 새벽에 시작되었다. 우영의 굳게 닫혀있던 성문은 오호의 군대를 환영하듯 활짝 열렸다. 뒤늦게 깨어난 사령관의 목을 베며 젊은 왕은 탐욕스럽게 소리쳤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질 것이다!’
허무하게 성을 내어 준 우영 또한 가만히 손을 놓고 있진 않았다. 무기를 쥘 수 있는 이들은 모두 징집되어 전쟁터로 내몰렸다. 남겨진 여자와 아이들은 돌아오지 못할 이들을 기다렸다.
승리자 따위 없이 이어진 십 년의 세월.
전쟁은 일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두 나라를 뒤덮었다.
심지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까지 드니 식량이 모자라 전쟁에서 죽은 이들보다 굶어 죽는 이가 더 많아졌다. 곡식이 금만큼 비싸지고 온 나라에 전염병이 돌았다. 부모를 잃고 떠도는 아이들은 살기 위해 도둑질을 익히고, 화적이 마을을 약탈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기쁨보다 슬픔이 앞서고, 선함보다 악함이 우선시되는 세상엔 비통함이 흘러넘쳤다. 그런 사람들의 비탄이 모여 땅 위는 사기가 자욱해지니, 선함에 뿌리를 둔 영험한 짐승은 요수가 되고 갖가지 요괴가 들끓었다.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상은 연명해도 지옥이요. 죽어 혼백이 되어도 지옥이라.
영원히 끝나지 않을 무간지옥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그런 지옥에서 살아가는 청년은 저 멀리 보이는 하얀 토끼를 발견하고 활을 들었다.
그는 한 가지 특이한 재주를 지녔는데, 본인도 언제부터 그러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는지 몰랐다. 청년이 기억하던 순간부터 함께해 온 기이한 재주는 몇 번이나 전쟁터에서 그의 목숨을 살렸고, 지금도 아주 유용했다.
끼긱-
활시위에 오늬를 걸어서 당기자 그 작은 소리에 토끼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경계심 많은 작은 토끼는 청년을 보았음에도 커다란 까만 눈으로 응시할 뿐 도망치지 않았다. 죄책감이 생길 정도로 맑은 눈이었다.
“후우….”
시선을 마주한 채 긴 숨을 내쉬자 잘게 떨리던 손끝이 한결 차분해졌다. 조금의 망설임이 담긴 손이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를 놓았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에 화살이 박힌 토끼가 하얀 설원 위를 나뒹굴었다. 눈 위로 점점이 흩어진 핏방울이 마치 꽃잎처럼 흐드러졌다. 마지막 생명의 숨을 품은 붉은 강은 차가운 겨울을 녹이며 작은 몸뚱이 아래 질척하게 웅덩이를 이루었다.
“…미안해.”
쓰러진 토끼를 집어 든 남자는 이미 숨을 거둔 토끼에게 작게 사과했다. 작은 짐승이라도 그 생명이 중요치 않겠는가. 비록 그를 아는 누군가는 위선이라 욕할지라도.
허리춤에 숨을 거둔 토끼를 매단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산속에 위치한 그가 직접 지은 초막은 대단한 집은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지낼 만은 했다. 적어도 비바람은 피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 그는 그리 생각하며 솜씨 좋게 토끼의 가죽을 벗겼다.
요수와 요괴가 들끓는 세상에서 운 좋게 토끼를 잡았으니 내일은 마을에 내려가 가죽과 곡식을 바꿀 생각이었다. 긴 흉년으로 곡식은 금만큼 비싸졌다. 다만 이런 추운 겨울에는 추위를 막을 가죽도 귀한 것이라 쌀 한 줌 정돈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고기로 배를 채운 그는 내장은 모아 집에서 멀리 떨어진 산등성이에 뿌렸다. 이리하면 피 냄새에 끌린 사나운 들짐승이나, 요수들의 눈을 잠시나마 돌릴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깊게 쌓인 눈 위로 고개를 내민 약초까지 캔 그는 오늘 묘하게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무엇인가 좋은 일이 생길 길조인가.
아니, 아니다. 괜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았다.
비쩍 말라붙은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땐 방에서 밤을 보낸 그는 눈 위로 흔적이 남지 않도록 주의하며 산에서 내려왔다. 요새 기승을 부리는 화적도 평범했던 백성들이 변질한 것이니 주의를 기울여서 나쁠 건 없었다.
마을 어귀엔 옷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거적을 걸친 아이들이 많았다. 배고픔과 추위에 지쳐 죽어가는 아이들은 드물게 털옷을 입은 청년의 뒤로 눈치를 보며 몰려들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먹을 것을 얻어먹거나, 추위를 막아 줄 천 쪼가리를 얻으려는 발버둥이었다.
그러나 청년이 가진 것은 고작 손바닥만 한 토끼 가죽 한 장이 전부였다.
청년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로 졸졸 따라붙던 아이들은 그가 토끼 가죽을 고작 한 줌의 쌀과 바꾸자 작은 희망마저 꺼진 얼굴로 여기저기 흩어졌다. 고작 한 줌의 쌀로는 한 사람도 배부르게 먹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리저리 마을 곳곳으로 흩어지는 아이들 속에서 청년은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아이는 땅에 뿌리를 박은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서 새카만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신발도 신지 못한 아이는 검붉게 물든 발끝과 발갛게 물든 얼굴을 하고도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꿋꿋하게 추위를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동백(冬柏)처럼.
조금은 충동적이었다. 작은 호기심이 남자의 발길을 붙들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족했다.
“얘야.”
그의 부름에 작디작은 아이는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동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만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나와 함께 갈래?”
남자에게는 그저 충동적으로 건넨 작은 호의, 그러나 아이에게는 인생을 뒤바꿀 제안이 다소 가볍게 던져졌다.
이대로 길바닥 위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다 죽을 것인지.
아니면 눈앞의 남자를 믿고 도박을 걸어볼 건지.
아이의 고민은 짧았다. 아니, 애초에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이대로 죽는 것보단 나으니까. 아이는 손을 뻗어 남자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래.”
그는 옅게 웃으며 몸을 숙였다.
“이제부터 너는 동백이란다.”
무릇 사람이든 짐승이든 선경(仙境)에 오르면 이전의 인연을 뒤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로 그들은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
그러하듯, 남자는 아이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하여, 꽃같이 붉어 너를 동백이라 하였고.
남자는 아이의 손을 쥐며 희미하게 웃었다. 짐승의 털가죽에 반쯤 파묻혀 있던 수려한 이목구비가 화사하게 빛났다.
그 이름처럼, 너는 그렇게 져버렸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