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1화 (2/61)

1화

一. 하늘에 오르지 못한 이무기.

잘그락.

남자의 작은 움직임에 허리춤에 찬 검이 흔들리며 작은 소리를 내었다. 상앗빛의 검집을 가진 늘씬한 검은 제 주인처럼 도도하고 단아했다. 수려한 외모를 지닌 그는 검파(劍把)를 쥐었다 놓았다 하며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신선 동백(冬柏)은 손목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 눈썹 끝을 곤두세웠다.

사람…아니 선인(仙人)을 불러놓고 약속 시각에 늦다니, 이런 무례가 다 있나.

그는 반질반질하게 닦은 구두 끝으로 바닥을 툭툭 찼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버스 터미널에 우두커니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 그리 선호하는 일은 아니었다. 비록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닿지 못하고 흩어져도 그러했다.

약 삼십 분 정도를 기다리던 동백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작은 인형(人形)을 보고 미간을 모았다. 이제 고작 열 살을 넘겼을 법한 작은 소년은 작은 가방을 메고 동백이 있는 곳으로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느긋하다 못해 내가 관짝에 들어가야 도착하겠네.”

그런 작은 아이를 향해 동백은 제법 매서운 독설을 내뱉었다. 그런데도 동백의 앞까지 전혀 빨라지지 않은 걸음으로 당도한 아이는 나이에 답지 않게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군, 동백!”

껄껄 웃으며 건네는 인사에 동백이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무언가 하고픈 말은 많았지만, 그는 더는 거친 언사를 내뱉지 못했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아 빵빵한 뺨, 맑게 빛나는 둥그런 눈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그 꼴로 온 거지?”

“당연한 거 아닌가. 자네가 아이에 약한 건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나도 안다네.”

태상(太上)은 동그란 배를 삐죽 내밀며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켰다. 약속 시간에 늦어 놓고 조금의 반성도 하지 않는 게 얄밉긴 하지만, 동백은 그의 말대로 이런 작은 아이에게 한없이 약했다.

“됐어, 얼른 용건이나 말하고 가.”

“뭐가 그리도 급한가. 오랜만에 얼굴을 봤으니 담소부터 좀 나누지.”

“하늘에 있는 지루한 노땅들 이야기라면 사양할게.”

“땅에 살면서 언사가 많이 거칠어졌구만.”

“똑같은데?”

뭐가 문제냐는 듯 한쪽 눈을 찌푸리는 것에 태상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모른다면 됐다. 어차피 동백이 다시 선경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제자리를 찾을 터인데 뭐 아무렴 어떤가.

“어디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할 곳으로 가는 건 어떻겠나.”

태상의 제의에 동백은 버스 터미널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은은하게 풍기는 커피 냄새가 향긋하게 코끝을 스쳤다.

따뜻한 허브차 한잔과 핫초코를 주문해 받은 동백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핫초코를 태상 앞으로 밀어주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뭐 그리 급하게 구는 건가. 우리가 얼굴을 본 지도 벌써 삼십 년 전이니 느긋이 대화한 후에 말하면 될 것을.”

태상은 핫초코를 호호 불며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선경에선 느끼기 힘든 활기와 활력이 존재하는 공간은 그도 오랜만이었다. 여러 소리가 뒤엉킨 공간 속에서 고아한 모습으로 커다란 머그잔을 든 아이는 지독히 이질적이면서도 자연스러웠다.

태상은 약 일다경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잔을 내려두고 동백을 마주했다.

“그동안 잘 지냈는가.”

“그럭저럭.”

“그래도 저번에 보았을 때보다는 말쑥하군. 그땐 사람 꼴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

동백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는 뜨거운 온기를 지닌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아꼈다.

그땐, 아주 잠시. 잠시 사정이 안 좋았던 거다.

사람이…아니 선인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 걸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는 건지. 괜한 민망함에 입술을 삐죽 내밀자 태상은 허공에 뜬 발끝을 까닥이며 묘한 콧소리를 내었다.

“뭐, 살아가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겠지.”

정확히 동백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한 말에 동백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내 몰골이 누추하여도 세상에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았으면 된 거지.”

“그렇지.”

태상의 시선이 동백의 허리춤에 달린 검에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는 그가 흘려보낸 세월만큼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이젠 짧은 머리도 꽤 익숙해진 모양이야.”

“새삼스럽게, 오히려 예전엔 그렇게 긴 머리를 어떻게 관리했었나 싶어.”

동백은 제 머리카락 끝을 손으로 매만졌다. 이전에는 허리까지 길어 하나로 단정히 묶었던 머리가 목덜미까지 짧게 잘려 있었다.

“너도 자르는 건 어때?”

한 번 자르면 새 세상이 보인다며 동백이 은근히 태상을 꾀었다. 지금은 짧은 머리칼을 가진 소년이지만, 태상의 본 모습은 과거의 동백처럼 긴 머리칼을 늘어트린 미청년이었다.

황금색과 붉은색의 화려한 장포와 피풍의(披風衣)를 걸치고, 허리춤에 검을 찬 그는 하늘에서도 특히 헌앙하다 칭송받으니 머리를 짧게 잘라도 퍽 잘 어울리리라.

“사양하지.”

“진짜 좋은데.”

“사양하지.”

덤덤하게 동백의 제의를 거절한 태상은 자신이 메고 온 가방을 주섬주섬 테이블 위로 올려두었다. 작고 깜찍한 여우 얼굴 모양 가방을 본 동백이 못 볼 걸 보기라도 한 듯 몸서리쳤다.

“제발 나이에 맞는 취향을 가지면 안 돼?”

“나이에 맞는 취향이지.”

동백의 표정이 오묘하게 찌푸려졌다. 그래, 외양은 딱 어울릴 나이이나 그 안에 든 게 얼마나 묵었을지 모를 노괴(老怪)라는 게 문제였다. 수치도 모르는 뻔뻔한 친우를 보며 동백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역시 하늘에 사는 종자와는 오래 대화하면 안 된다는, 살면서 얻은 조언을 떠올리며 동백은 힘없이 물었다.

“이제 떠들 만큼 다 떠들었어?”

“나는 더 담소를 나누고 싶어도 상대가 대화를 받아주질 않으니 떠들 게 무어가 있겠나.”

“말할 거리가 뭐가 있다고.”

정말 그랬다. 그들은 친우라곤 하나 얼굴을 보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태상은 사사로이 인계로 내려오지 못하고, 동백은 하늘로 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만남은 부탁할 거리가 생기면 잠시 내려와 얼굴 한 번 보는 식으로 이뤄졌다.

동백은 삼십 년 전 마지막으로 태상을 보았던 때를 떠올렸다.

음….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다. 사람을 잡아먹는 거울은 처리하기가 몹시 까다로웠고 매우 더러웠다. 덕분에 보수는 넉넉히 받아 지금껏 그 돈으로 연명해 오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들이 만난다는 건 기쁜 일로 만나는 건 아니었다.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식은 차를 마시며 태상이 작은 가방에서 꺼낸 금덩어리를 확인했다.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황금 덩어리는 카페의 조명 아래서도 번쩍번쩍 빛이 났다.

“일단 보수부터 받게.”

“돈부터 주는 게 이상해.”

“허허, 이상할 게 무어가 있다고.”

태상은 금덩어리를 동백의 앞으로 쓱 밀었다. 동백은 제 앞에 놓인 금과 태상을 번갈아 보며 미심쩍음을 얼굴에서 지우지 못했다.

이놈의 선경 놈들은 쩨쩨함도 하늘에 닿아 부탁도 모가지가 뻣뻣하게 하고, 보수도 일을 다 끝낸 후에야 마치 베풀듯 주었다. 그런데 오늘은 일의 이야긴 꺼내지도 않고 대뜸 금덩어리부터 내미니 의심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태상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느긋하게 말을 꺼냈다.

“동백 자네 슬슬 돈이 떨어질 시기 아니던가.”

“…….”

태상의 말에 동백은 슬그머니 전낭을 꺼내 안에 든 금과 바꿔 둔 돈을 헤아려 보았다.

……아 제길.

동백의 안색이 조금 달라지자 태상이 누구보다 자애롭게 웃으며 다시금 금덩어리를 동백 쪽으로 밀었다.

“먼저 받게나, 우린 친우 아닌가.”

그는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으나, 찬 밤이슬을 맞으며 자는 건 싫었다. 그건 삼십 년 전에 해 본 경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다고 인간처럼 돈을 벌 수도 없었다. 동백은 이 땅 위에서 살아가나, 인간이 아닌 이질적인 존재였다.

결국, 돈 들어올 구석은 선경이 주는 보수가 전부라 저 금을 받긴 해야 했다. 찝찝함에 입술을 꾹 말아 물고 망설이는 동백을 태상은 재촉하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동백은 물러설 자리가 전혀 없다는 걸 인정하고 태상이 건넨 금덩어리를 작은 전낭 안으로 꾹 욱여넣었다. 크기로 치면 절대 들어갈 리 없는 금덩이가 전낭의 입구에 닿자 쑥 빨려 들어가며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보수도 받았으니 슬슬 일 이야기를 해야겠군.”

능글맞긴.

동백은 혀를 차면서도 남은 식은 커피를 마시며 태상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태상은 가방을 정돈하고 작은 손으로 테이블을 툭 두드렸다. 그의 손짓에 도시에 내려앉은 새카만 증오와 뒤섞인 사기가 연기처럼 일렁이며 훅 치솟았다.

“자네도 느끼고 있겠지.”

“…뭐, 그렇지. 이런 걸 못 느끼면 손에서 검을 놔야지.”

동백은 시큰둥하게 검은 사기(邪氣)를 손으로 휘휘 저어 흩트렸다. 땅에서 오래 지냈다 한들 동백의 본질은 무인(武人)이라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은 조금도 그 세를 잃지 않았다.

“여전한가 보군.”

“내가 실력이 떨어졌다면 하늘의 머저리들은 죄다 제 발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야 해.”

“그리 말하면 할 말이 없구먼.”

동백의 날카로운 지적에 태상은 허허 웃다가 표정을 바꿨다.

그저 앳되고 순한 얼굴은 금방 위엄을 되찾고 작은 몸에선 깊은 위압이 그를 뒷받침했다.

“선인 동백.”

“예, 태상.”

순식간에 바뀐 태상의 기세에, 가볍던 말투를 고친 동백은 살짝 고개를 조아렸다. 눈앞에 앉은 것은 의자에 앉아 땅에 발도 닿지 않는 작은 아이가 아니라, 드높은 하늘의 두 번째 자리에 앉은 상제(上帝)의 아들 태상이었다. 친우에서 한 명의 신하로 돌아간 동백은 그에게 떨어질 명령을 기다렸다.

“그대에게 하늘에서 떨어진 이무기의 처리를 맡기겠네.”

“…….”

무언가 말하려는 듯 동백의 입술이 달싹였다. 고작 하늘에서 떨어진 이무기로 보수를 선불로 준다고? 이상한데?

이무기.

대단해 보이는 이름이나 하늘에 오른 태상이나 동백에겐 그저 뱀보다 조금 나은 존재나 다름없었다. 발품을 팔아 찾는 게 좀 귀찮지, 칼 들고 모가지를 쓱싹 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태상이 굳이 금을 들고 부탁하지 않아도 문제가 발생했다면 동백이 먼저 손을 썼을 수도 있었다. 동백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요수를 사냥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런 일로 그만한 금덩이를 준다고?

동백이 아는 태상은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겉보기엔 능글맞고 여유로워 보이지만, 누구보다 효율적이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다.

“정말 이무기?”

어느새 태상의 위엄을 걷어차 버린 동백이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그를 흘겼다.

“정말?”

“허허.”

“실없이 웃지 말고. 정말 이무기만 처리하면 되는 거 맞아?”

태상은 남은 핫초코를 마저 마시곤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는 동백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제 할 말을 꺼냈다.

“오늘로부터 이레 전이 드디어 이무기가 하늘로 오르는 날이었지. 자네도 알지 않는가.”

“알긴 뭘 알아. 내가 그 이무기를 어떻게 알아? 내가 영물이나 요수들 이름을 죄다 외우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크흠흠! 하여튼! 하늘에 오르려던 이무기가 있었네.”

“신기하네.”

동백은 앞으로 기울였던 몸을 의자 등받이에 깊게 기대었다. 시대가 바뀌며 인간이 하늘에 오르는 일은 동백이 마지막이 되었고, 동물 또한 그 씨가 말랐다. 그런 시대에서 하늘에 오르려던 이무기라니 몹시 희귀한 존재가 아닌가.

“그들이 하늘에 오를 때 누군가가 용이라 하면 용이요. 뱀이라 하면 뱀이라. 그 이무기는 하늘에 오를 적 뱀이라 불려 다시 땅으로 떨어졌지.”

“…원한이 깊겠어.”

동백은 방금보다 한결 가라앉은 눈을 하고 손끝으로 머그잔의 입구를 매만졌다.

수행은 고되고, 그 시간은 길다. 무려 천년의 시간이 무위로 돌아갔으니 원한은 바다보다 깊고 증오는 세상에 널린 물보다 많으리라. 동백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것을 잡으라니 아무리 요수를 때려잡고 다니는 동백이라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런데 그 정도는 선경에서 처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당연히 그저 땅에 떨어진 이무기라면 간단히 처리할 수 있지. 그러나 그게 문제는 아닐세.”

그럴 줄 알았지.

어째 먼저 금덩이를 들이미는 꼴이 수상하더라니.

동백은 제 전낭에 든든히 자리 잡은 금덩이를 떠올리며 끄응, 하고 침음을 삼켰다. 도로 뱉어내고 안 한다고 발을 빼고 싶지만, 어디 그리 만만하겠는가. 태상은 그리 만만한 이는 아니었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

동백이 포기하듯 묻자 태상은 빙그레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곳엔 수많은 까마귀가 있었다. 도시의 하늘을 검게 뒤덮고 모든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검은 까마귀는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 설마….

“…이 일에 까마귀가 얽혔다?”

재빠른 동백의 추론에 태상은 옳다구나 손뼉을 쳤다.

“그렇지!”

“금 도로 가져가고 네가 처리할래?”

“사양하네.”

“…….”

태상의 칼 같은 거절에 동백은 복잡한 눈을 하고 머리를 손으로 흩트렸다. 아무리 무차별적으로 요수를 잡는 그라도 연관되고 싶지 않은 상대가 하나 정돈 있을 수 있지 않은가.

“까마귀면 그….”

“자네가 이름을 외우고 다니는 요수도 있고, 별일이군.”

그래, 별일이지.

그러나 상대가 그만큼 대단하단 소리였다. 동백은 기본적으로 조무래기들의 이름은 외우지도 않는다. 앞에 서면 댕강댕강 목을 자를 자신이 있는데 굳이 머리 아프게 이름까지 외울 필욘 없으니까.

그러나….

“자오(慈烏).”

이놈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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