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하늘의 반절을 어슴푸레 덮어오는 쪽색과 지평선이 타오르는 다홍빛으로 물든 광경은 언젠가 동백이 겪었던 붉은 밤과 비슷했다.
온 천지사방을 모두 태울 것 같이 타오르는 불길과 비명. 지독하던 피비린내는 여전히 동백의 코끝에 맴돌고 있었다.
끝없이 되새김질하며 곱씹어도 모든 것은 돌아오지 않건만. 이젠 아득하게 먼 과거는 때때로 이렇게 몰려들어 동백을 괴롭혔다.
“동백.”
입가에 초콜릿을 묻힌 친우의 부름에 동백은 반사적으로 손으로 그 입가를 닦아주며 대답했다.
“왜.”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가.”
태상의 물음에 동백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잡생각.”
가볍게 내뱉어진 말에 태상이 미간을 모았다.
“자네, 표정이 좋지 못하여 물었네만.”
“아~! 잡생각 맞아!”
동백은 오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태상의 등을 짝! 소리가 나도록 후려쳤다. 제법 강한 힘에 등을 바짝 세운 태상이 억울하게 바라보는 것에 동백은 실로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지금 날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음?”
“오늘 하늘을 지붕 삼아 밤을 보내야 하는 본인을 먼저 걱정해야지.”
아무리 신선이라도 노숙을 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어린 아이의 몸이면 더더욱 그렇겠지.
그러니까 왜 이런 코딱지만 한 모습으로 내려와선.
동백은 혀를 차며 신문지 몇 개를 주워 와 태상에게 쥐여 주었다. 얼결에 바스락거리는 종이를 받아 든 아이가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여기서 잔다고?”
“응.”
진짜? 정말로?
거세게 흔들리는 태상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동백은 산뜻하게 웃었다.
“정말로.”
단호하기까지 한 동백의 답에 태상은 도시의 불빛으로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멍하니 응시하다 신문지를 바스락거리며 챙겼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아이의 모습을 한 신선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늘을 지붕 삼아 자보는 것도 오랜만이군.”
“고상한 척 해봐야 우리가 지금 거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품위는 가진 금전에서 오지 않는다네.”
“…반절은 돈에서 올걸?”
돈이 없는 군자는 과연 마지막까지 품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진정한 군자라면 그렇겠지만, 대부분은 아니었다.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해 본 이들이야말로 자신의 본질을 볼 수 있는 법이니. 그리하여 선경에 오른 이들은 모두 가장 아래로 추락을 겪었던 이들이었다.
동백은 다시금 상념을 밀어냈다.
지금 이런 생각을 해봤자 자신이 노숙해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이건, 일종의 습관이었다. 고찰하고 깨닫고 그리하여 본질에 닿는다. 살아왔던 삶이 주는 습관인 것이다.
그는 신문지를 제 어깨에 두르고 벤치에 누울 준비를 하는 친우를 바라보다 슬쩍 자리를 옮겼다. 비록 좁은 자리여도 다리라도 쭉 뻗고 자라는 배려였다. 태상은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태상.”
“왜 그러나?”
은근슬쩍 동백의 허벅지를 베게 삼아 누운 태상이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그의 시야에 웃으며 주먹을 들어 올린 동백이 들어왔다.
“그 모습이라고 해서 내가 널 못 때릴 것 같아?”
“그럴 것 같네.”
“정말?”
“정말.”
태상은 다시 눈을 감았다. 뻔뻔한 작태에 꿀밤이라도 먹여줄까 고민하던 동백은 힘없이 손을 내렸다. 얄밉긴 해도 태상은 지는 싸움은 하지 않았다.
“다음엔 제발 제대로 된 꼴로 좀 보자.”
“보고 싶으면 하늘로 오게.”
“…….”
동백은 태상의 말에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들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활한 공간일 뿐이지만, 그들에겐 달랐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길을 찾는 이들이니까. 동백의 눈에도 또렷하게 보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금빛의 길을 따라 걸으면 그가 오래전 뒤로하고 나온 곳이 나올 터였다.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모두 초월한 공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저 하늘은 동백이 내려왔을 때와 전혀 변하지 않았을 거다.
하늘을 바라보던 동백은 제법 차가운 바람과 함께 자욱이 깔린 사기가 밀려오는 것에 선기를 넓게 퍼트려 주변을 감쌌다. 아무리 태상이라도 이런 사기에 오래 노출되면 본신(本身)도 아닌 터라 며칠은 빌빌거릴 게 분명했다. 그렇게 앓는 꼴을 보느니 자신이 조금 더 수고하는 게 낫지.
“쯧, 귀찮게 만들기는.”
태상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입으로는 쉴 새 없이 툴툴대고 거칠어 보여도 본질은 여전히 그가 아는 동백이었다.
◆
붉은 하늘이 비통함으로 울부짖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검을 잡은 동백은 휘청거리면서도 꼿꼿하게 몸을 세웠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흐드러지듯 나부끼는 동백꽃 꽃잎이 눈에 닿자 피처럼 점점이 흩어졌다.
끝없이 몰려드는 요수를 베고, 베고 또 베어도 이 지옥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죽음을 예견한 비통함, 울부짖음이 사방을 매섭게 할퀴었다. 이젠 익숙해진 것인가 아니면 모든 감정이 깎여나가 버린 것인가.
온몸을 붉게 물들이고도 바닥까지 넘쳐흐른 붉은 강이 진창이 된 눈 사이를 유유히 흘렀다. 세상이 지옥이 되어버린 곳에서 마치 환상처럼 작은 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눈앞이 붉어 제대로 분간할 수 없음에도 동백은 아이의 뒤쪽으로 솟아오르는 거대한 뱀을 향해 활시위를 겨눴다. 숨을 고르고 조준할 시간 따윈 없었다. 무작정 손을 떠난 화살이 맹렬한 파공음을 내며 뱀의 몸통에 틀어박혔다.
그는 힘겹게 아이를 향해 나아갔다. 눈앞이 어지럽고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사그락-
눈이 밟히는 청량한 소리와 함께 동백은 혼미하던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방금까지 대체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동백은 일단 차분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산이었다. 붉은 눈으로 뒤덮인 산은 음산할 정도로 고요했다. 매서운 추위에 잎을 떨어뜨린 나무는 나뭇가지마다 눈으로 쌓아 올린 성이 높게 쌓여 있었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구나.
한 번 깨닫자 흐려졌던 이성이 다시금 또렷이 돌아왔다. 방금까지 잠든 태상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언제 이런 술법(術法)에 걸린 것인지.
이무기의 농간인가, 까마귀의 농간인가.
아무래도 두 놈 다인가?
어지간한 술법은 동백에게 조금의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아무리 땅에 내려왔다 해도 신선은 신선이니까. 그러나 아무리 신선이라도 약한 틈바구니는 존재했다. 자욱한 사기와 음흉한 술법의 조합은 그 작은 틈을 찾아내어 기어이 동백에게 침범하는 것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이제 어쩐다.”
동백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술법 공부를 좀 할걸. 그나마 다행인 건 술법에 걸려들긴 했어도 금방 제정신을 차렸단 점이었다.
붉게 물든 눈 위에서 동백은 우두커니 서서 눈을 감았다. 눈을 현혹하는 것은 눈을 감으면 될 일이고, 귀를 현혹하는 것은 귀를 막으면 되었다.
몸 주변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경계하던 동백은 약 1정(町) 정도 떨어진 곳에서 느껴진 기척에 반사적으로 검파를 쥐었다. 살짝 보이는 흰 검날이 붉은 눈을 시리도록 비췄다.
“뱀인지 새인지는 모르겠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동백은 등 뒤의 상대에게 들리도록 목소리를 키웠다.
“더 다가오면 베겠다.”
동백은 완전히 검을 뽑았다. 새하얀 검신(劍身)에 음각으로 새겨진 세한지우(歲寒之友)는 실력 없는 자가 새긴 듯 투박하고 거칠었다. 그러나 검만큼은 어디 내놔도 지지 않을 명검 중의 명검이라 오랜 세월을 함께한 친우의 투기에 검 또한 화답하듯 낮게 울며 상대를 위협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고작 1정. 조금이라도 거리가 좁혀지면 바로 뒤돌아 땅을 박차면 순식간에 닿을 거리였다. 동백의 위협이 통하기라도 한 건지 상대는 그 자리에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금속이 짤랑거리며 이리저리 부딪히는 맑은소리가 났다.
대치가 길어지면 긴장이 느슨해질 법도 하건만, 동백은 여전히 날카롭게 경계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상대에게 빈정거렸다.
“네놈이 뭘 하든지 뜻대로 되진 않을 거야. 그게 바로 시간 낭비라는 거지.”
동백의 비아냥에 자극이라도 받은 건지 눈을 밟는 묵직한 발소리가 울렸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동백은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손에 힘을 주었다. 두 다리는 다가오는 상대를 향해 뛰쳐나갈 듯 근육을 팽팽히 당겼다. 숨죽여 내쉬는 숨결에 떨리는 흥분이 깃들었으나, 그는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동백이 무인으로서의 고양감을 내리누르고 빠르게 차분함을 되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 사이의 거리가 처음의 반절이 되었을 때.
동백은 몸을 돌려 땅을 박찼다. 굳게 감은 눈은 상대를 직시하지 않아도, 잘 벼린 감각은 노골적인 존재감을 잡아냈다. 뒤로 크게 당겨진 검 끝이 허공을 가르고 유려하게 휘둘러졌다.
카가가각―!
쇠도 무난히 잘라낼 검날이 단단한 무언가와 부딪히며 지독한 소리를 냈다. 귀가 얼얼할 정도의 소음이나 동백은 빠르게 검을 거두고 다음 공격을 이어가려 했다.
그래, 그러려 했는데.
“―?!”
뭔가에 단단히 붙들린 듯 힘을 줘도 검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검을 버릴 수도 없다. 동백은 오랜만에 목에 핏대가 솟을 정도로 힘을 주었다. 과한 힘에 팔이 부들거리며 떨렸다.
끼긱!
꿈쩍 못하고 손아귀에 붙잡혔던 칼날이 쇠를 긁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낸 채 흔들렸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칼을 거두고 다음 공격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단단히 칼을 쥔 상대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비웃는다기보단, 몹시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탐구자의 웃음에 가까웠다.
적대도 아닌 흥미라.
동백이 으득, 이를 갈아붙였다.
비록 동백이 야리야리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지내온 세월과 베어 넘긴 요수가 몇이던가. 상대에게 얕보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존심이 상했다.
어디, 뱀인지 까마귀 놈인지는 몰라도 그 면상은 똑똑히 기억해 두었다가 철저히 갚아주마.
감았던 눈을 뜨고 감히 자신을 약자 취급한 놈을 마주하려 했던 동백은 눈 위를 덮는 커다란 손에 흠칫 놀랐다. 살에 닿은 촉감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장갑이었으나 쇠처럼 차가웠다. 게다가 손가락 끝은 새의 발톱처럼 날카로운 철갑이 달려 있었다.
동백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 이놈 까마귀 놈이구나.
순식간에 동백의 살의가 치솟았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흩뿌려지는 살기에도 상대는 담담했다. 오히려 그는 금방이라도 날뛸 것 같은 동백을 살살 달래기까지 했다.
“쉬….”
어린아이를 진정시키듯 어르는 목소리였다. 낮고 차분한, 그러면서도 요사스러웠다. 게다가 바짝 붙어 있어서인지 동백은 그에게서 풍기는 익숙한 향을 맡았다.
자오에게서는 벽도화(碧桃花) 향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