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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4화 (5/61)

4화

요수 주제에 선경의 끝자락에서 자라는 벽도화 향이라니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동백의 적의가 다시 한번 수직으로 치솟았다. 만나기 껄끄럽지만 언젠가 죽여야 할 상대였던 자오는 당장 때려죽여야 할 까마귀로 변해 있었다.

자오는 검을 쥔 손에 좀 더 힘을 주며 동백을 바짝 당겼다.

“오래도 같이 땅 위를 거닐었는데 얼굴은 처음 뵙는군요.”

“다른 놈들에게 못 들었나 봐? 내 얼굴 본 놈들은 다 모가지가 날아갔다고.”

네 모가지도 곧 쳐주겠다는 듯 동백은 거침없이 이죽거렸다. 하지만 자오는 동백의 도발에 오히려 정중히 답했다.

“예, 못 들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목이 날아간 것들이 열 입은 없으니까요.”

거의 귓가에 소곤거리듯 가까운 거리였다. 자오의 숨결이 동백의 머리칼을 가볍게 흔들었다. 귓바퀴를 훑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동백의 뒷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아쉽네요. 좀 더 일찍 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더 일찍 네놈의 목을 쳤겠지.”

“하하, 제 목은 좀 비싼지라. 지금은 그냥 얼굴도 볼 겸 인사드리러 온 겁니다. 태상도 곁에 계시니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나약한 까마귀는 그저 도망칠 뿐이죠.”

나약? 나야아악?

동백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지금까지 검을 쥔 팔에 힘을 뺀 적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바로 모가지를 날리려 하고 있건만, 검날을 쥔 자오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건 동백이 약한 것이 아니라 자오가 이상할 정도로 강한 것이었다.

땅 위에서 요수들에게 동백만큼 유명한 자가 있다면 바로 자오라. 그 명성이 어찌나 대단한지, 어지간한 요수들의 이름은 외우지도 않는동백이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물론 본신이 까마귀라는, 동백에겐 다소 불쾌감을 주는 출신과 그 명성이 맞물려 외운 것에 지나지 않지만 직접 마주한 자오는 그의 상상보다 더 강했다.

이런 자에게 내가 승률이 1할 5리나 된다는 거지.

태상의 평가가 후한 건지 아닌지는 앞으로 두고 보면 될 일이다. 적어도 지금의 동백은 자오에게 참패했다. 그것도 자오의 알량한 자비로 목숨을 부지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너 이 까마귀 새끼….”

「동백.」

무슨 꿍꿍이냐 물으려는 순간, 동백은 머릿속에 직접 박혀 드는 태상의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자오가 동백의 틈을 노렸다면 그 반대도 가능했다. 태상이 드디어 자신을 이 망할 공간에서 끄집어낼 모양이었다.

동백의 몸이 점점 흐려지자 자오가 싱긋 웃었다.

“가십니까?”

“그래 간다.”

퉁명스러운 동백의 대답에도 자오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작별 인사를 남겼다.

“그럼 조만간 또 뵙죠.”

오냐.

동백은 마지막 순간 환하게 트인 시야로 자오의 모습을 담았다.

새끼, 까마귀 아니랄까 봐….

더럽게 번쩍거리네.

자오의 잘 꾸며진 외관은 동백에게는 고작 그 정도 감상이었다. 시대와 맞지 않는 검은 철릭을 걸친 남자는 약간은 가늘어 보이는 눈매와 느른한 미소를 지은 입술을 지녔다. 동백과 마찰이 있었음에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긴 머리카락엔 도화꽃을 모방해 만든 비녀가 흐드러지게 꽂혀 있었다.

까마귀는 반짝이는 걸 좋아한다고 하던가. 그래서 그런지 자오는 검은 옷과 확연히 대비되는 호박색 허리띠에 은제 노리개를 차고 있었다. 동백이 들었던 짤랑거리는 소리는 그 노리개가 흔들리며 나는 소리였다.

검을 붙들어 쥐었던 손은 새의 발톱을 따 만든 듯한 은빛 철제 발톱이 달린 검은 투갑을 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러니까 저게 저놈의 무기란 거지.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자오의 손을 마지막까지 노려보던 그는 뺨에서 느껴지는 가벼운 아픔에 번쩍 눈을 떴다.

“동백, 일어나게.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간다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찰싹찰싹 동백의 뺨을 후려치던 태상은 막상 눈을 뜬 동백과 시선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대신 그는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깨어난 동백을 반겼다.

“일어났군! 자네가 이대로 영영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다네!”

동백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정신을 잃으며 벤치에서 굴러떨어졌는지 등은 이미 풀에 내려앉아 있던 축축한 밤이슬로 흠뻑 젖어 있었다.

“넌 괜찮아?”

그는 약간 어지러운 머리를 짚으며 제 옆에 다소곳이 앉은 태상에게 물었다.

“난 괜찮다네. 애초에 노려진 건 자네였으니까. 그보다 누구였나?”

동백을 공격한 이가 뱀인지 아니면 새인지 묻는 태상의 얼굴은 진지했다. 동백은 조금씩 어지러움이 가시는 걸 느끼며 짧게 내뱉었다.

“새.”

“직접 봤나?”

“망할 면상이라면 보긴 봤어.”

깨어나기 전 아주 찰나였으나 동백에겐 그 정도면 충분했다. 객관적으로 자오는 훤칠한 미남이었다. 누군가는 구구절절 어찌하여 그 얼굴이 심미적으로 아름다운지 떠들어대겠지만, 그에겐 한 마디면 충분했다.

“까마귀던데.”

누가 까마귀 아니랄까 봐 차고 다니는 장신구도 반짝반짝 제 얼굴도 반짝반짝했다.

모든 게 함축되어버린 동백의 말에 태상은 묘한 얼굴을 하고 “까마귀 모습을 봤다고?”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동백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그냥 보면 알아. 까마귀 같이 생겼어.”

대체 까마귀같이 생겼다는 건 어찌 생긴 것인가. 고뇌에 휩싸여 있던 태상은 몸을 완전히 일으켜 세운 동백 때문에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딜 가려 그러나. 좀 더 쉬어야 해.”

외관은 멀쩡해 보여도 술법이란 정신을 파고들어 내부를 찢는 법이라 태상은 다급히 동백을 붙잡았다.

“놔.”

“쉬어야 한다니까!”

“아! 놓으라고!”

동백이 제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태상을 탈탈 흔들어 떨궜다.

“내 자네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이리도 매정할 수가!”

뒤로 나동그라진 태상이 흡사 가련한 여주인공처럼 외치는 것에 동백이 ‘허!’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화난다고 무식하게 들이받을 줄 알았나 봐?”

“…….”

태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동백은 우물쭈물하는 표정에서 답을 찾아냈다. 정말 그럴 줄 알았나 보다. 자신을 무슨 무식한 멧돼지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가 싶어 빤히 바라보자 시선을 슬금슬금 피하는 게 이것도 맞는 듯했다.

“일단 일어나. 엉덩이 다 젖는다.”

동백은 태상의 뒷덜미를 잡아, 번쩍 들었다. 대롱대롱 허공에 들린 태상이 제 가방을 꾹 끌어안았다.

“이건 좀 그렇지 않나?”

“뭐가?”

나도 위엄이란 게 있는 건데. 차마 입술 밖으로 내놓지 못한 말을 꿀꺽 삼키며 태상은 다시금 벤치 위에 앉혀졌다.

“일단 들어봐.”

“듣고 있네.”

“적의 적은 내 아군이라고들 하잖아.”

태상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남은 초코바를 꺼내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단 반응이었다. 태상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다 힘겹게 말을 꺼냈다.

“동백. 자네…. 지금 자오를 아군으로 끌어들이자는 건가?”

“응, 안되나?”

동백의 태연한 대답에 태상이 떨떠름하게 다시 물었다.

“그는 요수인데?”

“요수지.”

“게다가 까마귀일세.”

“그래서 그런지 엄청 번쩍거리더라.”

“그런데도?”

“태상.”

나지막한 부름에 태상은 동백과 시선을 마주했다. 감정에 휩쓸렸다면 갈대처럼 흔들릴 시선은 대나무처럼 반듯하게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때론 내 호불호보다 중요한 일이 있잖아.”

그러나 태상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어진 동백의 손을 발견했다.

‘아무리 차분함을 연기한들 본심은 여전히 나락에 떨어져 있을 게 분명하거늘….’

그런데도 동백은 제 감정을 억누른 채 사사로움을 버리고 오직 공적인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자네가 괜찮다면 더 토를 달진 않겠네. 하지만, 자오를 어찌 끌어들이려고. 방금도 자넬 공격하지 않았나.”

“그건 괜찮아.”

동백은 조금 전 대치를 떠올렸다. 자오는 전장의 이점까지 가져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했었다. 그가 원했다면 동백의 머리통은 그의 손아귀 안에서 한 줌의 핏물로 변했을 터였다.

그러나 자오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동백이 날뛰자 그는 방어했고 동백을 제압하는 것에 그쳤다.

배가 꼬일 만큼 얄밉긴 해도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망할 까마귀는 자신을 적대하지 않았단 점이었다. 그저 흥미롭게 관찰했을 뿐이다. 사실 그게 더 열 받지만 말이다.

“괜찮다고?”

“응, 공격 안 할 거야.”

게다가 공격할 거라면 벌써 했겠지.

동백은 공원의 호수 근처 가로등 위에 앉은 까마귀를 돌아보았다.

유별날 것 없이 평범해 보이는 까마귀 한 마리가 그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오의 명령을 듣는 까마귀라면 이 도시에 널리고 널렸다. 단순히 생각하기엔 그런 까마귀 중 하나라고 여기고 그저 스쳐 지나갈 애매한 거리였다.

“야.”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동백은 까마귀를 향해 말을 걸었다.

“언제까지 안면몰수하고 있을래.”

까마귀의 고개가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마치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하지만, 동백은 제 발치를 툭툭 차며 으르렁거렸다.

“깃털 다 뽑아 튀겨버리기 전에 튀어와.”

동백의 말에 가로등 위에 앉아있던 까마귀가 말 그대로 아래로 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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