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대로 바닥으로 처박힐 것 같았던 까마귀가 검은 그림자로 흩어졌다. 그 사이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곧게 뻗은 두 다리가 바닥을 딛고 움직임에 흔들린 노리개가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내었다. 가로등 불빛에 머리에 꽂힌 비녀가 반짝였다.
그 모습에 태상은 방금 동백이 했던 말을 이해했다.
“정말 까마귀구나.”
“그렇다니까.”
뒤늦은 깨달음을 얻은 친우에게 가볍게 대답해 준 동백은 다가오는 자오를 주시했다. 가벼워 보이면서도 서두르진 않는 느긋한 걸음이었다.
“기척을 감추는 건 자신 있는데, 선인님껜 신기하게 통하질 않네요.”
여유가 깃든 낮은 웃음소리가 부드럽게 공기를 뒤흔들었다. 지척까지 다가온 자오의 손엔 흉흉한 발톱이 달린 투갑(鬪匣)이 없었다. 관리가 잘 된 매끈한 손톱과 굳은살이 보이지 않는 손은 무인이라기엔 풍류를 읊는 고상한 도련님같이 보이기도 했다.
“허접해서 그래.”
“선인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
동백의 앞에 선 자오는 동백보다 한 뼘은 더 컸다. 그러다 보니 태상은 고개를 끝까지 치켜들고 나서야 자오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었다. 하늘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자오이지만 실제로 그의 얼굴을 본 이는 드물었다. 다들 그와 엮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태상은 솔직히 동백이 자오를 알아챈 것도 신기했다. 자오는 그들의 앞에 서 있는데도 그 기척이 무척이나 희미해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아주 잠시라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홀연히 사라져버릴 듯했다.
그건 동백과 비슷한 느낌이면서도 달랐다.
동백은 자연스러움을 추구했다.
그가 사람들 한복판에서 검을 빼 들고 요수의 목을 잘라도 사람들은 그 상황 자체가 자연스러운 광경이라고 생각할 터였다.
정장을 입고 허리춤에 우스꽝스러운 만화 주인공같이 검을 메고 다녀도 동백이 그리한다면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눈앞의 요수는 마치 그림자처럼 그곳에 존재하면서도 굳이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하는 희미함이었다. 아무리 요수라곤 해도 난 놈은 난 놈이라고 태상은 덤덤히 상대를 인정했다.
“그래서, 지켜보면서 다 들었을 거 아냐. 어쩔래?”
동백은 물으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군으로 끌어들인다곤 했지만 구구절절 설득을 늘어놓으며 옷자락을 붙잡을 생각은 아니었다. 저에게 적의는 없어도 서로를 돕는다는 건 또 다른 문제이니까. 그저 미끼를 던진 낚시꾼처럼 동백은 고요히 자오를 마주했다.
“좋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민 없이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너무도 시원스러운 대답에 동백이 얼떨떨하게 바라보자 자오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며 싱긋 웃었다.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 오히려 다정해 보이는 미소였다. 동백은 생전 처음 받아보는 요수의 호의에 남몰래 팔뚝에 돋은 소름을 손으로 쓱쓱 문질러 가라앉혔다.
불쾌해.
동백은 치솟는 불쾌감을 내리누르며 고개를 돌려 사리물었다.
그런 동백을 바라보며 태상은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막 날개를 펼친 여명이 지평선을 기어올라 사방을 밝히고 있었다.
자신의 친우를 위하여 다시 선경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
수많은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선인님.”
“…….”
“선인니임~”
동백은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무시했다. 자오가 도시에 퍼트렸던 자신의 사기를 거두었으나 여전히 이무기를 찾는 일은 발품을 팔아야 하는 일이었다. 자오의 합류에 태상은 동백에게 미안하기라도 했는지 선경에 다녀온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아마 하늘에 있는 머저리들의 모아둔 정보를 확인하러 가는 것 같아 동백도 굳이 막지 않았다. 이무기를 빨리 잡으면 좋은 거니까.
그런데 이 망할 놈하고 단둘이 남겨지는 걸 생각을 못 했다.
동백은 당연히 자오를 쫓아내려 했으나 자오는 동백의 타박에도 꿋꿋했다. 아니 꿋꿋하다 못해 신경줄이 금줄로 만들어졌는지 신경도 안 쓰고 제 할 말만 하려 들었다.
“선인님, 힘들진 않으십니까?”
동백은 이번에는 뒤가 아니라 제 옆에 서서 허리를 굽혀 바라보는 자오를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노려보았다.
해가 떠오르는 이른 아침부터 도시를 직접 걸어 다녔으니 충분히 지칠 만도 하건만 동백과 자오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전혀 비치지 않았다. 땀 한 방울 나지 않은 보송보송한 얼굴을 하고 힘드냐고 묻는 건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 나가려는 간악한 술수가 틀림없었다.
역시 만만한 놈은 아냐.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네.
그는 자오에 대하여 한 가지 정보를 더 추가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지피지기 백전백태라. 동백은 태상이 계산했던 승률을 좀 더 끌어올릴 자신이 있었다.
이무기만 잡고 나면 이놈 차례였다.
요수와 협력하는 건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싫지만, 태상에게 말했다시피 때론 자신의 호불호 따위는 잠시 넣어두어야 하는 때가 존재하니까.
동백은 살의를 누르며 휙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졸졸 따라다닐 시간이 있다면 까마귀나 풀어 이무기나 찾을 것이지.
쯧!
본래도 곱게 봐주려야 봐줄 수 없는 상대다 보니 동백은 자오의 모든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말의 꼬리처럼 살랑거리며 잡아당기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결 좋은 머리카락과 풍성한 옷자락. 움직임마다 잘게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내는 은제 노리개도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특히 마음에 안 드는 건 자신을 쳐다보는 눈이었다. 짐짓 다정하고 상냥해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으나 동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만 눈동자는 짐승의 것이라 몹시 반들거렸다.
저런 것과 사사로운 대화를 섞는 건 영 꺼림칙한 일이라 동백은 이무기 관련한 일이 아니면 절대 입을 열 생각이 없었다.
등 뒤에서 다시금 들린 자오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동백.”
건조하고 덤덤한 목소리였다. 상냥하지도, 다정하지도 않고 그저 상대를 부르는 어조임에도 동백은 우뚝 멈춰 섰다.
“이제야 봐주시는군요?”
새파랗게 타오르는 살의가 느껴지는 눈임에도 자오는 동백이 자신을 돌아봤다는 게 기쁜지 잔웃음을 지었다.
“한겨울에도 도도하게 피어난 붉은 꽃이라…. 잘 어울리십니다. 선경에 오를 때 직접 지으신 거겠지요? 저도 그러했으니 말입니다.”
“……네놈.”
동백의 입가가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파리하게 질린 흰 얼굴에서 가장 짙은 색을 지닌 것은 깊은 혐오와 분노를 담고 있는 두 눈이라. 자오는 제게 향하는 날 선 경계를 여전히 느른한 얼굴로 마주했다.
“감히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마라.”
“감히?”
자오가 짐짓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으나 동백은 분을 누르듯 깊게 숨을 내쉬고 다시금 앞서 걷기 시작했다. 기계적으로 선기를 퍼트리고 주변의 기를 읽으며 동백은 들끓는 마음을 내리누르려 애썼다.
적어도 이무기를 잡기 전까지는 완전히 적대해선 안 된다는 걸 알잖아.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타박하며 혐오를 짓눌렀다. 마음이라는 것은 제 것인데도 왜 이리 제멋대로인지. 이래서야 정말 선경에 든 신선이라는 게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선인님.”
그에 반해 자오는 오히려 부드러운 목소리로 화가 난 동백을 달래 왔다.
“이름이 불리는 걸 꺼리시는지 몰랐습니다. 앞으론 주의할 테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
당연히 몰랐겠지. 태상은 동백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불렀다. 아니, 그가 아니더라도 동백을 아는 다른 이들은 그의 이름을 마음껏 불렀다.
고작 이름이니까. 아끼거나 대단한 것도 아니다.
눈치가 빠른 자이니 자오도 알 터였다. 태상이 마음껏 부르던 이름을 ‘감히’ 불렀다 역정 내는 동백이 진정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오히려 자오가 화를 냈으면 동백은 더 불같이 화를 냈을 텐데, 자오는 몸을 납작 엎드리고 용서를 빌어 오히려 자신이 못된 놈인 것만 같았다.
“앞으로는 선인님이라고 부를게요.”
지금껏 그리 불러놓고…잠깐, 앞으로?
동백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앞으로라니 그런 불길한 단어를 쓰다니. 동백이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자오는 여전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동백은 조금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넌 자존심도 없어?”
자오는 요수이나 동백보다 낮지 않았다. 그 또한 동백의 뒤를 이어 하늘에 올랐던 이니까. 비록 스스로 추락하기를 선택하였고 선기의 순수함을 잃어 질 낮은 짐승들과 한데 묶어 요수라 불리지만, 이렇게 배알도 없이 굴 놈은 아니란 말이었다.
“하하, 자존심이라.”
그러나 자오는 퍽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두 눈을 크게 휘었다.
“자존심이 주린 배를 채워주진 않지요. 제 주린 배를 채울 수만 있다면 무엇이 중하겠습니까.”
사람을 낯을 뒤집어쓰고 있어도 본질은 짐승이라. 자오의 발아래 그림자는 길게 늘어지며 인간이 아닌 형상을 비추었다.
인간이되 인간을 벗어난 이와 짐승이되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까마귀는 오가는 이들 사이에서 자연스러우나 이질적으로 그들 사이에 섞였다.
“날 뜯어먹어도 성에 차지 않을 텐데?”
“그거야 직접 먹어 치우기 전엔 모르죠.”
“딱 보면 견적 나오지 않아?”
동백이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요.”
자오의 시선이 동백의 내부를 꿰뚫듯 직시해왔다. 까만 눈동자는 당최 뭘 생각하고 있는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반들거리는 눈동자엔 원초적인 호기심과 흥미가 짙게 어려 있었다.
“난 쉬운 사냥감은 아닐 거야.”
“그럼 더 재미있겠군요.”
이무기를 잡은 다음 바로 이놈의 모가지를 노려야겠다. 동백은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꼭 이놈의 모가지를 날려 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