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7화 (8/61)

7화

소년은 그늘에 쪼그려 앉아 오가는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대부분 쓸데없는 이야기였으나 종종 소년의 귀를 사로잡는 이야기도 몇 개 들렸다.

“자네 그거 들었나? 요즘 요수들이 날뛴다더군. 여기서 동쪽으로 300리 정도 떨어진 작은 역참 마을도 습격당했다던데.”

동쪽으로 300리. 작은 마을.

그 단어가 주변의 소리를 무의미하게 흘리던 소년의 귀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자신이 태어난 그 폐허를 말하는 것이리라. 까마귀는 바지에 묻은 흙은 툭툭 털며 수군거리는 남자들의 근처를 배회했다.

소년은 이 도시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가진 한 가지 능력을 알아차렸다. 소년의 존재감은 극도로 낮아서 보통 사람들은 소년이 근처에 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럴 땐 유용하긴 하나 생각해 보면 외로운 능력이었다. 그를 먼저 알아차려 줄 이는 없을 테니.

“들었지. 살아남은 이가 몇 되지 않는다면서.”

“이러다가 여기도 습격받으면….”

“설마, 여긴 한오일세! 우영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읍인데 높으신 분께서 그냥 두고 보겠는가!”

대화를 나누던 남자 한 명은 몹시 불안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소년도 그 불안에 동의했다. 이곳이 한오이고 우영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면 어떻단 말인가. 굶주린 요수들은 그런 것 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들이 중요한 것은 오직 배를 채우는 것뿐이다.

그러니.

소년은 텅텅 빈 단지를 옆구리에 끼고 저 멀리서부터 붉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멀리서 희미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것은 요수에게 잡아먹힌 이가 처절하게 내뱉는 절망이었다.

까마귀는 다시금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붉게 물든 하늘 그리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은 무엇인가.

요수인가, 짐승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여전히 그 해답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소년은….

“잠깐!”

나지막이 이어지던 자오의 목소리 사이로 동백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자오는 순식간에 과거에서 끌려 나와 분노와 당혹으로 들어찬 동백을 마주했다.

“너였구나.”

동백이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한오에서 동쪽으로 300리가 떨어진 작은 역참 마을.

그곳은 동백에게도 무척이나 익숙한 곳이었다. 비록 너무 작아 이름은 없지만 커다란 도읍인 한오를 기준으로 이야기하면 누구나 그 마을이 거기 있음을 알았다.

동백은 검파를 쥐었다. 어찌나 세게 그러쥐었는지 손등에 푸른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사납게 뜨인 두 눈이 새파란 분노로 일렁였다.

순식간에 뽑혀 나온 검이 정확히 자오의 목을 노렸다. 무방비하게 바닥에 앉아있던 자오가 깜짝 놀라 훌쩍 몸을 날려 뒤로 물러섰다. 어찌나 급했는지 그의 긴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선인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자오가 의아하게 동백을 불렀다. 그러나 동백은 대답 대신 몸을 낮추며 빠르게 자오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대로 허리를 베어버릴 생각이었으나 이번엔 자오도 피하지 않았다.

동백의 검은 마치 겨울의 매서운 바람을 닮아 있었다. 사나운 기세는 추위에 몸을 움츠리듯 상대방의 기세를 꺾어두었고, 예리한 검격은 단단한 뼈를 단숨에 끊어낼 만큼 힘을 품었다.

어설프게 검을 막겠다고 몸을 들이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지만 자오는 제 발톱을 가공해 만든 투갑을 불러들였다.

그극!

절대 날이 상하지 않는 명검과 발톱이 맞부딪치며 거북한 소리를 내었다. 가까이서 들었다면 귀를 틀어막고 괴로워했을 소리에도 두 사람은 차분히 숨을 고르며 서로의 빈틈을 수색했다.

그러나 어지간한 경지에 이른 두 사람이라 쉬이 빈틈을 내주지 않기에 대치는 아주 길게 이어졌다. 동백은 첫 습격에서 자오를 죽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고, 자오는 자신의 이야기에서 동백이 화를 낼 이유가 있는지 되새김질했다.

굳이 결판을 내야 한다면 자오가 우세하지만, 그거야 상대의 목숨을 앗아갈 기세로 덤벼들었을 때 이야기인지라 두 사람은 팽팽한 접전을 유지했다.

한 사람은 진심으로 상대를 죽일 기세로, 한 짐승은 적당히 대화를 이어갈 정도로 이어지던 긴 싸움은 갑자기 등장한 태상의 작은 헛기침 소리에 잠깐의 소강상태를 맞았다. 그러나 서로 경계를 늦춘 것은 아닌지라 바짝 잡아당겨진 고무줄처럼 긴장된 공기는 여전히 주변을 감돌고 있었다.

“아, 난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계속하게 동백.”

태상은 작은 가방을 열어 동백에게 뜯어낸 초코바를 입에 물었다. 동백이 정말 자오를 죽여 버리려 함을 읽어내지 못할 태상이 아니건만 그는 마치 비무를 감상하듯 태연자약했다.

“사실 돌아오기 전에 많이 걱정했거든.”

“무슨 걱정?”

동백이 검 끝을 여전히 자오에게 겨눈 채 태상에게 물었다.

“자네가 저 까마귀를 죽여 버리겠다고 망나니처럼 날뛸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 과정에서 나는 또 자네에게 타박 아닌 타박을 듣지 않겠는가. 그런데, 먼저 싸우고 있다니! 내 걱정을 한시름 덜었다네.”

태상은 이번엔 작은 가방에서 나온 거라고 믿을 수 없는 차반을 쑥 꺼내곤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에 우러난 짙은 차향이 바람에 실려 동백과 자오의 코끝을 스쳤다.

잘 우려낸 차를 호록, 마시며 태상이 싱긋 웃었다.

“이제 내가 알아 온 사실을 말해도 날 타박하진 않을 테니 말해주지. 좋은 소식과 좀 나쁜 소식이 있다네.”

말해주겠다며 한참 뜸을 들이던 태상은 세 번째 찻물을 들이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다행히 이무기를 찾았네.”

태상이 꺼낸 첫 번째 소식은 동백에겐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제 이 까마귀의 목이든 허리든 어디든 두 동강을 내주고 나서 그 덜 되먹은 뱀도 토막만 치면 귀찮은 일은 일단락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태상이 가져온 소식은 2개다. 좋은 소식이 있다면 그와 상반되는 나쁜 소식도 있는 법. 동백은 자오에게 단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채근했다.

“나쁜 소식은?”

“이무기 근처에서 까마귀를 보았지.”

“이런 시발.”

태상의 말이 끝나자마자 동백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 도시의 까마귀는 모두 자오의 수족이니 이무기 근처에서 까마귀를 보았다면, 자오는 진즉 이무기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단 소리였다.

“들켰네요.”

자오가 전혀 곤란하지 않은 어조로 곤란한 듯 굴었다. 그 모양이 어찌나 뻔뻔한지 어지간해선 나쁜 말을 입에 담지 않는 태상이 “저 몰염치한 놈.”이라고 반사적으로 중얼거렸을 정도였다.

“오늘 아주 즐거우셨겠어?”

동백이 으득, 이를 갈아붙이며 비아냥거리는 것에 자오는 선선히 답했다.

“그럼요.”

짤랑―

자오의 작은 움직임에 노리개가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휘어진 눈이 검을 겨눈 동백을 집요하게 담아냈다.

“하지만 선인님이 왜 화가 나셨는진 아직도 모르겠단 말이죠.”

“…….”

“처음엔 분명 꽤 흥미를 보이셨는데…. 어디서부터 심기가 거슬리신 건지 잘 모르겠단 말이에요?”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리는 모습은 퍽 여유로우나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아쉬웠다. 동백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첫 공격이 먹혔다면 죽이지는 못해도 적어도 치명상은 입혔을 텐데. 거칠어진 심기에 순간의 판단력을 잠시 잃었다. 뼈아픈 실책이었다.

“오늘은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전혀 듣지 않으실 테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죠.”

동백.

자오는 마치 옛날 만화에 나오는 악당이 줄행랑을 치며 던질법한 말을 하곤 휙 몸을 돌렸다. 그의 발치에서 뻗어 나온 검은 그림자와 연기는 순식간에 장신의 남자를 꿀꺽 집어삼키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과연 이름이 쟁쟁한 요수다운 신출귀몰한 퇴장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름을 불러 동백의 인내심을 벅벅 긁어놓는 훌륭한 수까지 완벽했다.

“도망쳤군.”

그러나 승패와 상관없이 자오는 동백과 싸움을 피했으므로 태상은 자오의 행동을 도망쳤다고 평했다.

“…….”

동백은 자오가 사라진 곳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찝찝함이 가시질 않았다.

자오의 이야기는 확실히 흥미로웠다. 아무도 그가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는지, 하늘에 오르기 전의 삶은 어떠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를 제 입으로 털어두는데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거짓말이든 아니면 진실이든 말이다.

다만…마음에 걸리는 건….

동백은 생각에 잠긴 채 습관처럼 검파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동백.”

“응?”

“무슨 일 때문에 그리 화를 내고 있던 건지 물어도 되나?”

“…….”

태상의 물음에 동백은 입을 꾹 다물었다. 눈처럼 흰 얼굴이 더 창백해진 듯 보이는 건 태상의 착각만은 아니었다. 그는 애써 말을 돌렸다.

“뭐, 자네가 화낼만한 일이었겠지만 말이야. 그보다 이무기가 있는 곳으로 바로 가겠나?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 기왕 소재를 파악했으니 이동하기 전에 이번 일을 마무리 지어야 편하겠지.”

“…그래. 이무기가 있는 곳으로 가자.”

약간은 힘없이 돌아온 동백의 대답에 태상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친우는 여전히 붉게 물든 설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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