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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8화 (9/61)

8화

도심을 지나는 하천은 언뜻 보면 자연스러운 듯 보이나 그 안에는 인위적인 손길이 닿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자연이라도 도시에서 살아가는 짐승들에겐 아늑한 안식처였다.

빗물과 하수가 흘러드는 커다란 하수도 안에 자리 잡은 이무기는 멋모르고 들어온 작은 오리 한 마리를 통째로 꿀꺽 삼켰다. 날개를 파드득거리며 도망갈 새도 없이 산채로 삼켜진 오리는 불룩해진 가죽 아래서 미약하게 꿈틀거리다 곧 생명력을 다해 고깃덩어리로 전락했다.

쉬익-!

하늘에서 추락한 뱀은 가시지 않는 허기에 두 갈래로 갈라진 혀를 날름거렸다. 이 도시의 인간들을 모두 죽이기 전까진 뇌를 달구는 증오와 위장을 찢는 허기가 가시지 않음을 알았다.

무려 천년의 세월이었다.

뱀으로서 가장 영광된 자리를 위해 얼마나 애썼던가.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이 허사로 돌아가다 못해 그는 천한 요수로 전락해 버렸다. 자신은 용이 되어 하늘을 호령할 몸인데, 천하디천한 요수와 같다니 수치스러웠다.

모두 죽여버릴 것이다.

이무기는 다짐했다. 조금만 더 쉬고 몸이 나아지면 이 추레한 은신처 밖으로 나가 모든 인간의 목을 물어뜯고 그 피를 취해 다시금 하늘에 오를 것이라고. 그때 자신에게 죽은 인간들의 혼으로 바닥에 처박혀 부서진 여의주를 다시 빚으면 아주 멋질 것이었다.

쉬잇, 쉬이익

마치 인간의 웃음같이 새어 나온 숨이 좁은 하수도를 울렸다.

그리고.

철벅.

바닥에 잔잔히 깔린 물을 밟는 소리에 이무기의 입이 다시금 벌어졌다. 날카로운 이빨이 하수도 안을 찾아든 불청객을 향해 쇄도했다.

“이 망할 뱀 새끼가.”

이무기는 제 주둥이를 양손으로 붙잡은 남자의 사나운 목소리에 커다란 몸을 꿈틀거렸다. 벗어나려 안간힘을 써도 갑자기 등장한 남자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쉭!!

위협적으로 내뱉은 숨엔 보통의 인간이라면 견디기 힘들 정도의 위엄을 담았건만 눈밭 같은 새하얀 피부를 가진 청년은 되레 고요한 눈으로 저보다 배는 큰 이무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는 검을 쓸 필요도 없겠다.”

허리춤에 매달린 상아색 검이 잘게 흔들리며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제야 이무기는 눈앞의 존재가 사냥감이 아니라 자신을 잡으러 온 사냥꾼임을 인식했다.

어둠 속에서 잔잔히 빛나는 두 눈은 악귀와 같은 어두운 붉은빛으로 반짝였다. 긴 시간 동안 수없이 살생을 반복한 살귀(殺鬼)가 이곳에 있었다.

그 순간 이무기는 본능적으로 거대한 몸통으로 불청객의 몸을 사정없이 조였다. 이 자가 검을 뽑기 전에 죽여야 한다고 본능이 시끄럽게 외쳐댔다.

비록 이 불청객은 경이롭도록 강한 힘을 지니고 있으나 그건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슬쩍 몸을 휘감아 조이는 것만으로 온몸의 뼈를 으스러트릴 자신이 있었다.

꾸드득!

새카만 비늘이 촘촘히 박힌 뱀이 몸을 조이자 심상찮은 소리가 났다. 아무리 날카로운 병장기라도 쉬이 튕겨낼 유연하고 단단한 비늘이 갈라지는데도 이무기는 힘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이무기에게는 불청객이자 사냥꾼인 동백은 졸지에 하수구 물에 쫄딱 젖은 채 한탄을 내뱉었다.

“아…씁….”

그냥 검 써서 보자마자 죽여버릴걸.

뒤늦은 후회가 뒤따랐으나, 이미 젖어버린 정장에선 하수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났다. 당장 돈도 한 푼 없으니 이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꽤 고된 귀환길이 될 것 같았다.

동백은 뱀의 주둥이를 양손으로 잡은 채 다물려는 입을 강제로 벌렸다. 자신보다 큰 먹이도 삼킬 수 있도록 설계된 뱀의 입이 한계까지 벌어졌다.

쉬이이익! 쉬이잇!

쿵! 쿵!

동백을 죽이기 위해 조이던 몸통이 고통으로 인해 이리저리 몸부림치며 뒤틀렸다. 꼬리가 벽을 치자 단단한 콘크리트가 부서져 나뒹굴었다. 그 난리 속에서 동백은 단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자비가 없는 잔혹한 손속이었다.

동백은 눈앞에서 몸부림치는 이무기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자오를 떠올렸다. 평소 동백은 얇아 보이는 몸과 다르게 압도적인 힘을 이용한 검술을 사용했다.

굳이 선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검이 지닌 예리함과 힘은 아주 긴 시간 동안 동백을 잔혹한 요수 사냥꾼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어 주었다.

슬슬 방법을 바꿀 때가 되긴 했지.

동백은 생각을 정리하며 여태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이무기를 마치 귀찮은 물건 치우듯 가로로 쭉 찢었다. 미지근한 피가 분수처럼 치솟으며 새하얀 동백을 붉게 물들였다.

마지막 숨을 붙잡고 꿈틀거리던 이무기는 그렇게 허무하게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쌓아온 세월이 무색한 죽음이었다. 영험함이 극에 달했던 몸뚱이는 그 힘을 잃자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동백에게 튀었던 피 또한 붉은 재가 되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동백은 무심하게 옷자락에 묻은 붉은 재를 툭 털어내곤 하수도 밖으로 향했다.

“동백! 수고 했……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동백에게 반갑게 다가오려던 태상은 동백에게서 나는 퀴퀴한 냄새에 오히려 뒤로 물러섰다. 불쾌한 냄새에 대한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으나 동백의 눈썹 끝이 슬그머니 솟았다.

“왜 피해?”

“내가 언제 피했다고 그러나.”

알면서도 일부러 심술궂게 묻자 태상은 슬금슬금 다가오면서도 언제든 도망갈 준비를 했다. 동백은 태상의 경계에 코웃음 치며 하천을 벗어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보다 이무기는?”

“죽였어.”

동백은 이무기를 반으로 찢은 제 손을 쥐락펴락하며 감각을 가늠했다.

“갱생의 여지는 전혀 없던가?”

근래엔 하늘에 오르는 짐승이나 사람이 전혀 없는 탓에 태상이 아쉬움을 담아 물었다.

“그럴 놈이었으면 날 보자마자 공격하진 않았겠지.”

“…그렇군.”

태상이 쩝 입맛을 다셨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가치관과 생활이 변하며 이제 자신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졌다. 실재하나 모두 허상처럼 여길 뿐이다. 짐승마저도 인간들의 세상에 휩쓸려 변한 세상이니 이번 일은 참으로 안타까우며 아쉽기만 했다.

“동백, 자네는 계속 인계에서 지내지 않나.”

“그렇지.”

“그럼 자네가 인계에서 다시금 도를 전파하는 게 어떤가? 그럼 나도 충분히 지원해줌세.”

동백이 태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자네도 우리도 모두 좋은 일 아닌가.”

“태상.”

“음?”

“요즘엔 사이비들도 너무 티가 나서 도를 믿냐고 안 물어봐.”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도를 믿으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열 명 중 열은 아마 경멸하는 얼굴로 동백을 스쳐 지나갈 게 뻔했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으로 사람을 모아 봤자 사이비 취급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리라. 다만, 진짜 사이비들과 다른 건 동백은 이적(異跡)을 일으킬 힘이 있다는 점 정도일까.

“우리가 왜 사이비인가. 우린 종교가 아닌데.”

“…그런 게 있어. 하여튼 난 안 해. 할 거면 네가 내려와서 하든가.”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태상이 한숨을 푹 내쉬는 것에 동백이 쯧, 혀를 찼다. 상제의 예외적인 허락을 받은 동백을 제외하곤 모든 신선은 인계에 영향을 끼쳐선 안됐다. 그런데 태상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분명 자신에게 약간의 죄책감을 얹어두려는 수작이라 동백은 더욱 매몰차게 굴었다.

“할 일 다 했으면 얼른 가.”

매정한 말에 태상이 짐짓 서운한 표정을 드러냈으나 동백은 꿋꿋이 버텼다.

“하여튼, 매정하기는.”

찔러도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동백의 태도에 태상은 서운하면서도 제 친우가 여전하다는 것에 안도했다.

“난 이만 가 볼 테니 내 제안 잘 생각해 보게나. 자네가 이 시대의 새로운 도의 창시자가 되는 게야.”

“아 됐다고!”

동백이 질색하며 소리쳤다. 태상의 말대로 도를 전한다 쳐도 사람들은 신선이 되기 위해 도를 닦는 게 아니라 신흥 종교처럼 믿을 게 뻔했다. 한마디로 헛수고란 소리였다.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태상이 선계로 가는 첫 번째 계단을 밟았다. 그 순간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금빛 계단이 저 먼 하늘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그는 마치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듯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젖살이 올라 뺨이 통통하던 앳된 아이는 하늘에 가까워질수록 점차 헌앙한 청년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동백은 그 모습을 고개를 들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건지 태상 또한 계단 위에 서서 그런 동백을 내려다보다 다시금 계단을 올라 사라졌다.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동백은 한참이나 태상이 사라진 하늘 저편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제약이 그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백도 하고자 한다면 다시금 금빛 길을 타고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었다.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려던 동백은 태상이 사라진 곳을 다시 한번 돌아봤다.

하지만, 태상.

네가 제안한 일을 하기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건 바로 나일 거야.

그가 걷고 있는 길은 무엇이든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두라 하지만 동백은 오히려 발악하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새로운 도의 창시자라니, 천벌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동백은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며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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