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동백은 진열장에서 단지 모양의 바나나 우유 하나를 꺼내 자오에게 던졌다. 계산은 어차피 나가면서 하면 되니 진열된 계란 몇 개도 집어 마련된 평상에 털썩 앉았다.
“들고 제사 지내? 마셔.”
수건으로 물기를 대충 턴 동백의 머리는 이리저리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제 모습이 엉망이든 말든 자리를 잡고 앉은 동백이 계란껍질을 까며 흘러가듯 말을 꺼냈다.
“난 요수가 싫어.”
첫 시작부터 끼어들 틈이 없는 단호한 어조였다.
“네가 선경에 오를 자격이 있던 놈이든 아니든 결국 지금은 요수잖아? 그러니 난 널 싫어할 거야. 그리고 사실, 그거 외에도 너한테 열 받는 일이 있긴 한데…. 넌 알 거 없고.”
계란 하나를 한참이나 꿈지럭거리며 까던 동백이 마침내 알맹이를 입에 쏙 집어넣고 자오를 쳐다보며 우걱우걱 씹었다. 사뭇 전투적인 식사에 자오는 제 몫의 바나나 우유를 슬그머니 동백에게 밀어주었다.
“솔직히 나한테 들러붙는 이유도 잘 모르겠고.”
뭔가 흥미로운 기억을 들춰보았다면,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동백은 오래 살아온 만큼 다양한 기억을 지니고 있으니 그중 하나는 자오의 흥미를 끌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데 질문에 돌아온 답이라곤 수수께끼 같은 대답이었다.
붉은 겨울에도 지지 않는 동백이라니.
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이냐, 이 망할 까마귀야. 성질 같아서는 머리채를 붙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다.
하지만….
동백은 자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과 과거의 귀퉁이가 맞닿아 있는 존재는 다 제 손으로 죽여버린 줄만 알았는데, 아직 남아있었다니. 게다가 이놈은 그 어떤 요수보다도 동백과 근접해 있었다.
비록 그게 무덤을 파헤친 악연이라 할지라도.
<세상에 요수가 범람하고 사람들이 비탄과 비명을 내지르니 온 땅이 붉게 물들어 그 피를 머금고 꽃이 피었다.
누군가는 그를 두고 결코 지지 않는 동백이라 불렀고, 요수는 혈화(血花)라 칭했도다.>
아주 오래된 기록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몇 줄의 문장. 고작 그것이 동백이 이 땅 위에 남겼던 기록이었다. 이제는 그 기록마저 진짜가 아닌 허구로 취급되는 세상에서 동백은 홀로 살고 있었다.
그러니 아주 잠시.
아주 잠깐 상대하는 거라면 그 애도 괜찮다고 말해줄 거다. 착한 아이니까.
“그러니 정확하게 말해. 내게 원하는 게 뭐야?”
동백의 물음에 자오가 대답하려 했을 때 동백은 차갑게 덧붙였다.
“한 가지 말해두자면 난 음흉하게 구는 것들을 싫어하니 원하는 것만 똑바로 간결하게 말해.”
“저는….”
잠시 고민하듯 끊어진 말이 다시금 이어졌다.
“전 선인님이 궁금합니다. 가령 예를 들면 옆구리의 커다란 상처는 어쩌다가 얻었을까 하는 것들이요.”
자오의 말에 동백은 제 옆구리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케케묵은 기억은 차곡차곡 쌓여 동백을 이루었으나 그걸 궁금해하는 이는 없었다. 애초에 그런 걸 물어 줄 이가 이젠 동백 곁에 남지 않았다.
세상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남자는 남은 계란을 한입에 해치웠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그는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음식을 먹었다. 그게 이유를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몰아내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음식이 맛있어서인지는 딱히 구별하지 않았다.
“시시하네.”
“시시한가요?”
“응.”
“때론 자신에게 시시하게 여겨지는 일도 남에겐 가치 있는 일이 되는 법이죠.”
“그게 내 이야기를 듣는 거란 말이지.”
자오는 대답 대신 싱긋 웃었다. 그렇다는 긍정의 답변이었다.
“좋아.”
“―!”
자오의 얼굴 위로 기쁨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동백은 그 위로 다시 한번 찬물을 끼얹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대신, 난 계속 너랑 어울릴 생각은 없으니 세 번으로 하자.”
“세 번이요?”
“그래 각자 세 번씩 듣고 싶은 이야기를 묻는 거지.”
“…….”
“싫어? 싫으면 말고.”
동백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조금의 미련도 두지 않는 태도였다. 자오는 쓰레기를 버리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로커로 향하는 동백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은근슬쩍 숫자를 높여 불렀다.
“세 번은 좀 적지 않은가요? 다섯 번은 어떠세요?”
“세 번.”
“…그럼 네 번은….”
“세 번.”
조금의 타협점도 없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자오는 결국 항복의 의미로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래요. 세 번.”
“아, 그리고 네가 멋대로 들려준 얘기는 숫자에서 제외야.”
“…….”
“미리 보기라고 치자. 그걸 들은 덕분에 내가 관심이 생긴 거니까.”
“…그러죠.”
자오는 제 로커를 열어 동백의 옷을 내어주었다. 옷을 받아든 동백은 자오에게서 나던 벽도화 향기가 제 옷에도 스몄다는 것에 잠시 짜증 난단 얼굴을 내보였으나 하수구 물을 뒤집어쓴 옷보단 나았기에 얌전히 입었다.
오버핏의 커다란 티셔츠는 목이 다 늘어났고 무릎이 나온 운동복 바지는 추레했다. 그러나 뭐든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했던가. 동백의 수려한 외모는 그런 추레함을 충분히 덮고도 남았다.
자오 또한 옷을 차려입었다. 단출한 옷인 동백과 달리 그는 허리띠와 손목 보호대로 사용하는 끈까지 걸칠 것이 많았는데, 동백과 비슷한 속도로 옷 입는 걸 마쳤다.
늦어지면 그대로 버리고 갈 생각이었던 동백은 속으로 혀를 차며 붕어 똥처럼 뒤꽁무니에 자오를 단 채로 목욕탕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세탁소에 들러 엉망이 된 정장을 맡기고 근처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입에 문 동백은 그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즈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무기랑은 대체 무슨 관계였던 건데?”
“그게 제게 하는 첫 번째 질문이신가요?”
쳇, 공짜로 더 이야기해 줄 생각은 없다는 거군.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열 받아도 끝까지 들을 걸 그랬다. 저 음흉한 까마귀가 알아서 입을 술술 여는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텐데 말이다.
“아니.”
“그럼, 언제든지 저에 관해 궁금한 게 생기면 물어봐 주세요.”
기회는 세 번뿐.
그것도 동백 자신이 정한 숫자이니 최대한 신중하게 사용할 생각이었다. 자오 또한 궁금한 것은 많으나 주어진 기회 자체가 한정적이다 보니 쉬이 질문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도통 감을 잡지 못한 동백과 다르게 자오는 자신에게 주어진 세 번의 기회 중 한 번은 어디에 사용할지 이미 마음을 정해둔 상태였다.
“선인님.”
왜.
아이스크림콘을 와작 씹으며 동백이 눈짓으로 답했다.
“제게 지금 질문하지 않으신다면 제가 먼저 여쭈어도 될까요?”
“기회를 사용해서?”
“네.”
“…뭔데?”
나머지 아이스크림을 한입에 털어 넣은 동백이 끈적이는 손에 눈가를 찌푸렸다. 닦아내고 싶은데 마땅한 게 없었다. 그런 동백의 손을 품에서 꺼낸 물티슈로 깨끗하게 닦아주며 자오는 입술을 뗐다.
“제 이야기를 듣다가 왜 화를 내셨는지 궁금해요.”
“고작 그거?”
“글쎄요. 고작이라고 생각하진 않는걸요.”
동요를 숨기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고작’이라 칭했지만, 동백은 돌아온 자오의 대답에 씁쓸히 웃었다. 하여튼 예리한 놈이었다.
“대단한 사연은 아냐. 차라리 내 옆구리에 상처가 왜 났는지 물어보는 게 더 나을걸? 지금이라도 무를래? 처음이니까 특별히 봐줄게.”
“아뇨, 듣고 싶어요.”
동백은 자오의 손에 잡혀있는 제 손을 휙 빼냈다. 자오는 동백 자신이 들어도 어설픈 심리전에 걸려들 만큼 멍청한 놈이 아니다. 괜히 시도했다가 확신만 준 꼴이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동백은 아주 오래된 기억을 천천히 헤집었다. 이젠 너무 아래쪽에 깔려 있어 굳이 들추지 않으면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는 기억들이었다. 기쁨과 슬픔이 공존했으나 이젠 빛이 바랜 기억은 단단해진 동백을 흔들어 두기엔 지난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야.”
세월을 가늠하기엔 아득히 멀어진.
“내가 아직 등선하기 전의 이야기.”
동백은 기억의 첫 장을 넘겼다. 그곳엔 여전히 그리운 향취를 품은 빛바랜 추억이 있었다. 본래 이름이 무엇이었나, 이제는 오래전 버린 이름을 꺼내 들고 동백은 도화로 돌아갔다.
아, 오랜만이구나.
동백아.
◆
내리쬐는 햇볕을 받아 화살촉이 미약하게 반짝였다. 겨울답지 않은 뜨거운 햇볕이 정수리를 따갑게 내리쬐었으나 팽팽하게 활줄을 당긴 남자는 미동도 없이 차분히 숨을 골랐다.
사방이 불길로 타오르고 절규와 비명이 끊이지 않는 전쟁터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이다.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며 지나치는 바람은 지나치게 건조하고 뜨거웠으나 도화의 집중을 흐트러트리기엔 부족했다. 도화는 한순간 숨을 멈추며 팽팽히 당겼던 활줄을 놓았다.
소리 없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이 정확히 사슴의 목덜미에 꽂히며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한 사슴이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자 도화의 옆에서 제 입을 작은 손으로 꾹 틀어막고 있던 동백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
산속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큰소리를 지른 동백은 지레 놀라 다시금 입을 틀어막고 두 눈을 굴렸다. 놀라 둥그렇게 커진 두 눈이 당혹과 미약한 두려움을 담고 흔들렸다.
도화는 시위에 화살을 거는 대신 허리춤에 맨 검의 검파를 쥐며 숨을 죽였다.
쏴아아-
바람이 제 색을 잃고 떨어진 나뭇잎과 낮게 자란 풀숲을 스치며 숲의 파도가 몰아쳤다. 그 바람엔 희미한 짐승의 누린내가 뒤섞여 있었다. 거의 맡아지지 않을 정도로 미약한 냄새이지만, 도화는 동백을 등 뒤로 숨긴 채 주변을 경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