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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11화 (12/61)

11화

“아, 아저씨….”

“괜찮으니 잘 붙어있어.”

겁에 질린 동백의 부름에 도화는 아이를 다독이며 풀숲 사이에서 달려들 수 있는 습격자를 경계했다.

바스락.

바닥에 깔린 낙엽을 짓밟는 작은 소리에 도화는 검을 뽑았다. 아주 옅은 기척이지만, 이 숲에서 가장 약한 존재는 도화와 동백이었다. 게다가 보통의 짐승이라면 동백의 소리에 깜짝 놀라 도망을 쳤지 이리 다가오진 않았다.

바스락, 바스락.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대는 마치 두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듯 주변을 맴돌며 기척을 드러냈다. 언제 공격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자 집요한 괴롭힘에 가까웠다.

그러나 도화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제 자리를 지키며 필사적으로 작은 아이를 지키는 것뿐이었다. 지금 그의 상대는 감히 인간이 맞서기도 두려운 요수였으니.

크하앙!

커다란 포효가 등 뒤에서 터져 나왔다. 그림자를 뚫고 뛰쳐나온 짐승이 털을 곤두세운 체 단숨에 도약해 어린아이의 목덜미를 노렸다. 새파랗게 질린 동백의 두 눈에 작은 짐승이 들어찼다. 크기는 보잘것없이 작으나 사납기는 호랑이 못지않게 사나운 족제비는 영리하기까지 해 상대하기 퍽 까다로웠다.

도화가 황급히 동백에게 달려들던 족제비를 쳐냈으나 유연한 몸을 가진 짐승은 허공에서 몸을 뒤틀어 바닥에 착지했다.

크흥.

가소롭다는 듯한 비웃음은 덤이라. 도화는 그 도발에 휘둘리지 않고 침착하게 검을 고쳐 쥐었다. 상대는 강자의 여유를 보여도 되는 상황이고 자신은 아니었으니까.

혼자였다면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싸웠겠지만, 그의 등 뒤엔 동백이 있었다. 수없이 전쟁터를 구르며 누군가를 지키면서 싸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도화는 검 끝을 바짝 세웠다.

족제비 요수는 가늠하듯 두 사람 근처를 둥글게 원을 그리며 돌다가 아주 작은 틈을 발견하고 단숨에 땅을 박찼다. 몸집이 작은 만큼 잽싸고 날카로운 공격이었으나 방어를 도외시하는 게 느껴졌다.

도화로선 다행이었다. 그는 족제비의 움직임을 예측해 검을 휘둘렀다. 다시 한번 공중에서 검을 피하려던 작은 짐승은 곧 자신을 맞이한 검날에 허리께가 깊게 베이며 절규와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캬아아악!!

붉은 피가 후드득 땅 위를 적셨다. 짙은 사기를 먹고 태어난 요수의 피가 닿은 땅은 당분간 어떤 식물도 자라지 못할 것이다. 도화는 재빨리 발광하는 족제비의 목을 쳤다. 완전히 피해를 막을 순 없어도 최선의 선택이었다.

끄르…르….

“……죽었어요?”

“그래.”

도화가 검날에 묻은 피를 바닥에 털어냈다. 벌써 땅이 검게 죽어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인지라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사냥해 두었던 사슴을 챙겼다.

“어서 돌아가자꾸나. 피 냄새에 더 몰려들 거다.”

“…네.”

묵직한 사슴을 어깨에 걸친 그는 빠르게 장소를 벗어났다. 요수의 주의를 끌었으니 한시라도 빨리 거처로 돌아가야 했다. 동백 또한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짧은 다리를 쉴 새 없이 놀려 도화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산 위로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작은 풀벌레 소리는 어느샌가 들리지 않았고, 주변을 맴도는 바람엔 더 짙은 짐승의 누린내가 섞여 있었다. 본능적인 불안감과 두려움이 도화를 순식간에 휘감았다.

이 순간은 마치 전쟁터에 감도는 전운과도 닮아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지기 전 깔리는 고요한 침묵은 그에게 퍽 익숙한 것이라 도저히 그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아저씨?”

도화의 뒤를 따르던 동백은 도화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의아해하며 그를 불렀다. 그러다 이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보고 그의 바짓자락을 꾹 붙들었다. 도화는 어깨에 걸쳐 맸던 사슴을 던지듯 내려두고 몸을 숙여 동백과 시선을 마주했다.

“동백아.”

“…네.”

“여기서 집까지 멀지 않으니 무조건 뛰어서 집으로 돌아가라.”

“…저 혼자서요?”

그는 두려움에 떠는 아이를 힘주어 꼭 안아주었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집까지는 아이의 걸음으로도 일다경이 걸리지 않았다. 뛴다면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을 만한 거리였다. 혼자 보내는 것이 불안하긴 하지만 집에만 도착한다면 아이는 무사할 터였다.

“집엔 진법을 깔아두어 요수들이 접근하지 못할 거란다.”

“……아저씨는요?”

“난 마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

그다지 마을에 정을 둔 건 아니었지만 이름도 없는 작은 역참 마을은 이방인인 도화에게 매몰차게 굴지 않았다. 그가 잡는 짐승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

홀로 돌아간다는 게 두려운지 망설이는 동백을 도화는 가볍게 안아주었다.

“괜찮을 거야.”

다정하고 또한 단단하게. 그는 그렇게 작은 아이를 다독였다.

“가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렴.”

“…알겠어요.”

작은 손이 도화의 옷자락을 꾹 쥐었다가 놓았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엔 신뢰가 가득했다.

“뛰어!”

도화의 신호에 동백은 전력을 다해 내달렸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도화는 몸을 돌려 산 아래로 향했다.

자신이 대단한 힘을 지녔다면, 무엇 하나 선택하지 않고 전부 지킬 수 있었을 텐데.

동생도 동백도 그리고 마을마저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폐가 짜부라지는 고통을 감내하며 도화는 드디어 마을에 다다랐다. 작은 마을은 평온했다.

물론 굶주리고 아픈 이들이 지천으로 널렸으나 앞으로 다가올 참혹한 참상에 비하여선 그러했다.

“모두, 마을을 버리고 피하시오!”

도화는 목청껏 소리쳤다.

마을의 입구를 지나 그의 뜀박질로는 얼마 걸리지 않아 도달하는 반대편까지 쉴 새 없이 뛰며 다가오는 위험을 알렸다.

“자네, 무슨 일인가!”

그 소란에 평소 도화의 고기를 매입해 주던 푸줏간 주인이 달려 나와 그를 붙들었다. 몇 년째 이어진 고생에 더 늙어버린 주름진 얼굴이 처참히 일그러져 있었다.

“요수들이 몰려올 겁니다. 여기서 도망치셔야 해요.”

터전을 버리고 도망치라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도화는 알았다. 그런데도 살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바삐 마을을 벗어나야만 했다. 비록 몰려오는 요수들의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아니나 도화의 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그의 경고에 주춤거리며 망설이는 이들과 불신의 눈빛을 보내는 이들이 섞였다. 도화는 속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위험을 알리기 위해 동백도 홀로 집으로 보내고 달려온 참이었다.

제 하나의 안위만 위했다면 동백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 모든 일이 지나갈 때까지 숨죽여 지내면 그만이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목이 따가웠다. 입에서 짭짤하고 비린 혈향이 맴돌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화를 향해 미친놈이라 손가락질하며 코웃음 쳤다. 긴가민가 불안해하던 이들도 곧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삿대질과 욕설을 쏟아냈다.

“에라이! 미친놈아! 우리를 마을에서 쫓아낸 다음 남은 음식과 재물을 홀로 독차지할 생각인 걸 모를 것 같으냐! 내 처음부터 네놈이 이런 음흉한 속셈으로 온 거라는 걸 알아봤다!”

처음부터 도화를 못마땅히 여겼던 장 노인의 외침에 휩쓸려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를 비열하고 상종 못 할 종자라고 외쳐댔다. 도화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런 취급을 받겠다고 동백마저 홀로 보내고 마을로 달려왔던가.

그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그를 가장 먼저 붙잡았던 푸줏간 주인은 이도 저도 못 한 채 엉거주춤하게 서서 도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진실은 결국 거짓말이라. 도화는 날아온 돌멩이에 이마를 얻어맞았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사방에서 크고 작은 돌들이 쏟아졌다.

“비루먹은 것을 도와줬더니, 은혜도 모르는 놈!”

“마을에서 썩 꺼져!”

찢어진 이마에서 흐른 피가 시야를 가렸다. 그 와중에도 도화는 푸줏간 주인을 향해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제발….

“…미안하네.”

“…….”

외면받은 시선이 하염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돌이 도화를 두드렸다. 둔탁한 고통이 그를 바닥으로 끌어 내렸으나 도화는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밀치고 그는 다시금 산을 향해 달렸다.

유일하게 자신에게 남은 동백이라도….

크르―

“……동, 백아?”

마을 입구를 막아선 거대한 짐승이 도화를 발견하고 입가를 씰룩였다. 날카로운 발톱과 주둥이 사이로 삐죽 비집고 튀어나온 송곳니 사이엔 작은 고깃덩이가 걸려 흔들렸다. 찢기고 뜯겨 인간이었다는 형체는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찢어진 천 조각이 그 고깃덩이가 과거엔 인간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천 조각은 도화에겐 퍽 익숙한 것이었다.

“아, 아아아아―!”

절규와 비명이 도화에게서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요수를 발견한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살기 위해 사방으로 달렸다.

“으아아악!!”

“사, 살려줘!”

수많은 요수는 순식간에 마을로 들이닥친 해일처럼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찢고 뭉개어 잇새에 넣고 씹었다. 흥건한 핏물이 가뭄으로 바짝 말라붙은 대지를 적셨다.

그것은 일방적인 학살과도 같았다. 도망치던 이들은 살기 위해 농기구를 집어 휘둘렀으나 요수에겐 퍽 우스운 짓이었다. 짐승들은 먹기 위해서가 아닌 유희를 위해 사람들을 풀어두고 뒤를 쫓았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절규에도 도화의 시선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요수의 잇새에 틀어박혀 있었다.

뇌리에 남은 것은 두려워하면서도 신뢰를 보내던 눈동자요, 미지근한 체온으로 제게 매달리던 작은 몸이었다. 겨울의 삭풍에도 식지 않았던 도화의 마음에 차디찬 눈이 내렸다. 살을 에는 바람이 그의 몸을 찢고, 뒤늦은 후회가 그 위를 짓밟았다.

차라리 동백과 함께 집으로 도망쳤더라면.

그랬더라면, 동백은 살릴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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