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도화는 흐르지 않는 눈물 대신 들끓는 증오와 후회를 지지대 삼아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그에게 눈물은 잘못을 합리화하려는 사치일 뿐이었다.
그는 검을 그러쥐었다.
울며 절망하고 나약하게 짐승의 아가리에 제 머리를 들이미는 건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후회하고 절망하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복수해주는 것이 바로 도화의 방식이었다.
손등의 뼈가 새하얗게 도드라졌다. 이마에서 흐른 피는 유독 하얀 얼굴을 타고 눈물처럼 아롱졌다.
크르르르!
달라진 도화의 기세에 거대한 짐승이 낮게 몸을 움츠렸다. 경직된 뒷발은 언제든 땅을 박차고 뛸 수 있도록 바짝 긴장한 채였다.
도화가 숨을 한 번 들이마셨을 때.
거대한 짐승이 발톱을 세우며 달려들었다.
까가각!
검과 발톱이 엇갈리며 작은 불똥이 튀었다. 공격이 실패했음에도 짐승은 실망하지 않았다. 도화 또한 숨을 가다듬으며 다음 공격을 대비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적진 한가운데서 그는 자신이 붙여준 아이의 이름처럼 붉고 고고하게 매서운 운명의 삭풍을 견뎠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지 모를 불길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타올랐다. 도화는 손아귀가 찢어져도 검을 놓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지켜야 할 존재는 사라져 버렸지만, 복수해야 할 상대는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가장 먼저 달려드는 거대한 짐승의 앞다리를 자르고 날짐승의 날개를 검두로 쳐서 부러트렸다. 땅에 바짝 붙어 달려드는 작은 요수들의 시야를 피가 섞인 흙으로 가리자 괴로운 울부짖음이 뒤따랐다.
그렇게 했음에도, 도화의 주변엔 아직도 수백의 요수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발치에서 날개가 부러져 바르작거리는 새를 짓밟으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하나를 베면 다른 하나가 뒤에서 쓰러진 몸뚱이를 짓치며 튀어나왔다. 도화에게 앞발 하나를 잘린 거대한 요수는 잘린 다리에서 피를 철철 쏟아내면서도 여전히 호승심을 드러내며 매서운 공격을 쏟아냈다.
“크윽!”
잘린 절단면을 흙바닥에 뭉개며 절뚝거리며 달려온 요수는 절대 느리지 않았다. 묵직한 무게를 실은 남은 앞발이 도화의 검을 짓눌렀다. 으르렁거리는 낮은 울음소리 사이로 짙은 원망과 울분이 묻어났다.
요수는 온 세상에 사기를 퍼트린 인간을 증오하고, 인간은 소중한 사람을 앗아간 요수를 증오하니 절대 끊어지지 않을 증오의 고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증오한다. 네놈들을 증오해.」
언어가 되지 못한 의념이 희미하게 귓가로 흘러들었다.
도화는 거대한 짐승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요수로 변하기 전엔 산 하나를 호령했을지 모를 산군(山君)이 그르렁 이를 드러냈다. 날카로운 송곳니엔 살점과 피가 들러붙어 있었다.
그가 지키지 못한 후회와 스스로에 대한 혐오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도화는 이를 악물고 검을 짓누른 짐승의 발을 밀어내며 팔을 휘둘렀다.
크허엉!!
마지막 절규와 동시에 거대한 짐승의 목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겨우내 내린 눈과 뒤섞인 피가 붉은 진창이 되어 도화의 발목을 붙들었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낼 새도 없이 도화는 끝없이 요수를 베었다.
베고, 또 베고.
그렇게 이틀을 밤낮없이 싸우고 나서야 그는 산처럼 쌓인 짐승과 사람의 사체 가운데 홀로 섰다. 이미 체력이라고 부를 만한 힘은 모조리 쏟아부은 뒤였다.
서 있는 것 만으로 두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그는 검을 갈무리하고 정신없이 시체 사이를 헤집고 요수의 배를 갈라 동백을 찾았다.
“저리 가! 저리 가라고!”
죽음의 냄새를 맡고 몰려든 까마귀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까맣게 날아올랐다.
도화는 떨리는 손으로 그가 사랑했던 모든 걸 잃어버린 동백을 끌어안았다. 그의 품은 여전히 동백이 나누어 준 온기로 미지근한데 작은 아이는 너무나도 차갑고 딱딱했다. 이젠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찢긴 고깃덩이를 끌어안고 그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동백아….”
그의 부름에 귀찮아하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해주던 아이는 더는 답해주지 못한 채 침묵을 지켰다.
도화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선택은 되돌릴 수 없고 지나간 시간은 핏빛으로 얼룩졌다. 도화는 너무도 가벼워진 동백을 안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창이 된 길을 밟으며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마을을 벗어나 산을 오르자 짓밟힌 눈 사이로 붉은 흔적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그 흔적을 거스르며 위로, 더 위로 오르던 도화는 마침내 눈 위에 가장 크게 피어난 혈화를 발견했다.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갔다면 동백은 무사했을 그런 거리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원망했을까.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며 그를 찾았을까.
도화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메마른 눈으로 한참 동안 피가 흩뿌려진 눈밭을 응시했다. 후회가 질척하게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차라리 마을로 같이 내려갔다면 달랐을까. 아니, 마을로 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숨었다면 달랐겠지. 걸음이 너무도 무거워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곳에 멈춰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도화는 애써 마지막 흔적을 외면하고 아늑했던 보금자리로 들어섰다. 찬 바람에 말리던 육포 조각,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쓸어내던 빗자루, 어설프게 나무를 조각해 만들던 조각상이 조각도와 함께 마루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아직도 이토록 생생한데 제 품에 안긴 동백은 싸늘했다. 미안하다는 말조차도 꺼내지 못한 채 도화는 조심스럽게 동백을 방 안에 눕혔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토끼로 보이지 않는 토끼 조각상을 챙겼다.
‘아저씨! 이거 어때요?’
‘곰이니?’
‘…토끼요!’
‘곰토끼구나.’
‘토끼라고요!’
생긴 건 아무리 봐도 곰인데 토끼라고 우겨대니 토끼라고 해줄 수밖에 없었다. 완성되면 다시 자랑하기로 해 놓고 다시는 완성할 수 없게 되어버렸구나.
도화는 기름을 먹여두었던 천을 화살촉에 감고 불을 붙였다. 매섭게 타오르는 불길이 내뿜는 열기가 순간 겨울의 냉기를 밀어내며 얼어붙은 도화의 손끝을 녹였다.
“다시 태어나거든, 부디 행복하게 천수를 누리거라.”
시위에 걸린 화살이 새빨갛게 타올랐다. 도화는 눈을 감으며 시위를 놓았다. 그의 손에서 떠난 화살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추억과 기억을 불살랐다.
나무집을 삼키며 순식간에 몸집을 불린 불길을 뒤로하고 도화는 다시금 산에서 내려와 마을 어귀에 작은 봉분을 쌓았다. 이곳에서 숨을 거둔 모든 것들에 대한 마지막 예의였다.
얼어붙은 땅을 손끝으로 긁어내어 흙을 모으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도화는 멈추지 않았다.
후욱, 후욱.
거칠어진 숨이 뿌옇게 번졌다. 어릿해진 손끝과 찢어진 손아귀는 이미 진물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툭툭.
마지막 흙을 쌓고 그 위를 가볍게 두드린 그가 천근만근인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폐허가 된 마을을 마지막으로 한번 둘러본 그는 동백이 단 한 번도 부르지 못했던 이름을 지워냈다.
무명(無名)은 그렇게 마을을 벗어나 서쪽으로 향했다.
◆
…….
……….
깊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자오는 생각에 잠긴 동백을 채근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동백이 쌓아 올린 시간은 그만큼이나 단단하고 거대하여, 고작 세 번의 질문에 모든 걸 알아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까마귀.”
적당한 시간이 지나고 자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동백과 시선을 마주했다.
“기왕이면 이름을 불러주시는 건 어떤지요?”
“어차피 그것도 까마귀인데 뭐가 달라?”
“다르지요. 저는 스스로를 자오라 칭했고, 그것은 제 이름이 된 것이니까요.”
이름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신묘하여 본질을 가장 쉽게 나타내는 방법이었다. 또한 제 존재를 또렷한 객체로 인식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자오는 자신이 눈을 뜨고 유일하게 알고 있던 것을 제 이름으로 삼았다.
“까마귀라고 부르는 것도 감지덕지라 여기지 않고, 건방지네?”
“제가 좀 그런 편입니다.”
“…….”
“아, 욕심도 많고요.”
그래, 그런 것 같네.
동백은 흐린 눈으로 자오의 머리에 꽂힌 비녀와 허리춤에 매달린 노리개를 훑었다. 도화꽃을 모방한 비녀는 자개를 덮어 오색으로 영롱하게 반짝였으며 새하얀 은으로 만들어진 노리개는 끝에 얇은 유리 조각을 덧대 빛이 비칠 때마다 색색의 그림자를 만들어 내었다.
처음 스치듯이 보았을 때도 까마귀다운 반짝거리는 모양새라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더했다.
“하여튼, 까마귀.”
부름에 대답 대신 모호한 미소를 보내는 자오에게 동백은 들춰낸 기억 일부를 조심스레 꺼내두었다.
“네 이야기를 듣다가 왜 화를 내었냐고 물었지.”
“그랬지요.”
“네가 파헤쳤던 그 마을의 무덤 내가 만든 거야.”
동백의 말에 자오의 눈이 둥그렇게 뜨였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듯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키던 자오는 곧 특유의 능청스러운 얼굴을 되찾았다.
“들려주셔야 할 이야기가 너무 축약된 것 같으니 조금 더 들려주시는 건 어떠신지?”
자오의 뻔뻔한 요구에 동백이 사나운 얼굴로 으름장을 놓았다.
“이 정도만 말해도 쥐새끼같이 뒷구멍을 쑤시고 다닐 놈이 말이 많구나.”
“기왕 이야기하시는 거 편하게 하시란 이야기죠.”
“일 없다.”
동백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시간을 가늠해 보니 거처에서 나온 지 족히 한 시진은 지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