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던 동백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일어섰다.
상대는 어린애다 어린애.
물론 백발이 성성한 노인도 동백보다 한참 어린애였지만, 이호영은 더했다. 아주 뺨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애가 장난 좀 친다고 어른이 되어서 화를 내서야 하겠는가.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깔끔하게 치운 동백은 방으로 가서 검을 챙겨 들고나왔다. 먹은 걸 소화도 시킬 겸 가볍게 주변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형! 어디 가?”
제 자리를 정리하던 이호영이 고시원을 나서려는 동백을 다급하게 불렀다.
“산책.”
“그럼 같이 나가자.”
“아니….”
거절하려던 동백은 방금 자신이 먹은 삼각김밥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동백이 원했던 건 아니지만, 이호영은 매번 자신을 챙겼다. 이것도 일종의 자신을 향한 공양이긴 한지라 동백은 그 정성에 어느 정도 보답해 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 가자.”
이 녀석은 자신이 어떤 호사를 누리고 있는지 알긴 알까.
동백은 무신(武神)이자 평안의 신이라 동백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이호영은 근심을 덜어내고 하는 일이 순탄히 잘 풀리는 효과를 받을 수 있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모르겠지.
알릴 생각도 없고 말이다.
동백은 피식 웃으며 맹한 얼굴을 한 이호영을 옆에 달고 고시원을 나섰다.
“어디로 가려고?”
“그냥 발길 닿는 곳으로 걷는 거지.”
그리 말하면서도 동백은 어둑서니의 기척을 찾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무기 때는 도시 전체가 범위였다면 적어도 지금은 세운동 안에 한정된 것 같으니 찾기는 훨씬 쉬웠다.
지평선 아래로 저무는 해와 그런 해를 쫓아온 어둑한 밤이 좁은 골목길 안으로 내려앉았다. 그 어둠에 깜박, 깜박 시동을 걸던 가로등이 비로소 밤의 시작을 알렸다.
아무런 말 없이 그저 걷기만 하던 동백의 곁에서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설렁설렁 걷던 이호영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다소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형,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요새 자신에게 뭔가를 궁금해하는 게 유행인가. 반사적으로 자오를 떠올렸던 동백은 한쪽 눈가를 찌푸렸다. 그런 동백의 일그러진 표정에 지레 놀란 이호영이 뒤늦게 슬그머니 뒷말을 덧붙였다.
“안되면 어쩔 수 없고….”
어쩔 수 없다고 단념하면서도 미련이 철철 흘러넘치는 어조였다.
얼마나 대단한 질문을 하려고.
무슨 질문이 되었든 자오가 던지는 질문보다 곤란하진 않겠지. 동백은 가볍게 생각하며 되물었다.
“뭔데?”
“일단, 묻기 전에 말할게. 나는 형을 진짜 좋아해.”
“…….”
“그런 의미의 좋아한다는 아니니까 이상한 놈 보는 것 같은 표정은 치우지 그래.”
“…….”
“진짜야.”
이호영의 거듭된 부인에 그제야 동백은 표정을 풀었다.
“그래서 무슨 질문이기에 남우세스러운 말까지 덧붙여?”
“남우세스럽…. 다시 말하는 게 입 아플 정돈데 형은 가끔 보면 말투도 그렇고 진짜 옛날 사람 같다니까.”
“옛날 사람 맞으니까.”
“그래, 그런 농담도.”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아니, 이게 아니고.”
딴 길로 새어 들어가던 대화의 흐름을 이호영이 다시금 붙들었다.
“…음, 그냥…. 별건 아닌데….”
우물쭈물 한참을 망설이던 이호영은 동백의 눈치를 세 번은 보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형…이 무슨 일 하는지 궁금해서.”
“…?”
“그…. 그냥 회사에 다니는 건 아닌 것 같아서. 한 번 나가면 며칠 동안 안 들어올 때도 있고….”
말을 마치고 나서 이호영은 한 번 더 동백의 눈치를 봤다. 자신이 몹시 꺼림칙하고 어려운 걸 물었다는 소극적인 태도였다. 그러면서도 눈빛엔 걱정과 의심이 뒤섞인 것이 동백이 영 좋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동백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이호영은 손사래를 치며 “엄청 궁금한 건 아니고! 그냥 조금 쪼~오금 궁금한 거니까!”라고 다소 조급하게 말했다.
…그래, 보통은 궁금해할 만한 일이긴 하지.
동백은 이호영의 질문에 수긍하며 잔잔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어느 시대든 자연스럽게 섞였다. 그러나 동백은 그 능력에서 단 한 가지의 예외를 두었다. 그 예외에 속하는 것이 바로 호영이었다.
이리 긴 시간이 흘렀으니 붙잡은 인연의 끈을 놓아주어야 하건만, 놓지 못해 이렇게 어리석게 군다. 매번 헤어짐에 아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본인이면서도.
이렇게 만난 그들은 한결같이 밝고, 스스럼없이 동백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짧고 찰나와도 같아 동백은 항상 만남과 동시에 이별을 준비했다.
누군가는 홀로 남겨질 동백을 걱정했으며 또 누군가는 슬퍼했다. 어쩔 땐 그 끝을 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과연 너는 어떻게 될까.
“…뭐, 뭘 그렇게 쳐다보고 그래?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말, 말던가.”
표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게 꽤 부담스러웠는지 이호영이 두어 걸음은 뒤로 물러서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젠 거의 쓰지 않던 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를 툭 내뱉은 건.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을 하고 다니진 않는단다.”
신의 이름에 걸맞게 두루두루 평안을 주고 다니지.
“…….”
“호영아?”
“으, 으아아! 말투 뭐야! 징그러워!”
경기를 일으키듯 이호영이 펄쩍 뛰며 질색했다. 등줄기로 쭈뼛 소름이 돋는 느낌에 제 팔을 온 힘을 다해 문지른 그는 약간 엉거주춤하게 선 동백을 향해 꽥 소리쳤다.
“징그러우니까 그런 말투 쓰지 마!”
동백은 칠색 팔색을 하며 싫어하는 이호영의 모습에 짓궂게 두 눈을 휘었다.
“말투? 아, 이러한 말투 말이냐. 어찌 그러느냐?”
“으윽!”
“연유를 말해주지 않으면 내 이유를 모르지 않니.”
“징그럽다고! 징그러워!”
아기를 다루듯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투를 피해 이호영이 내달렸다. 왔던 길을 거슬러 쪼르르 도망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동백은 크게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호영아, 네 그리 반응하면 내가 서운하구나.”
물론, 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호영을 놀리느라 도로 고시원으로 돌아온 동백은 저를 피해 제 방으로 도망쳐버린 그를 두고 다시 한번 홀로 밤 산책을 나섰다.
어둠에 맞서 빛을 비추는 가로등은 낡고 오래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연신 깜박였다. 그림자 속을 유유히 파고들어 인간의 두려움을 먹고 몸집을 키우는 어둑서니에겐 안성맞춤인 분위기였으리라.
혹여 어둑서니가 나타날까 밤새 머리 위에 뜬 그믐달과 밀회를 즐기던 동백은 인시의 끝자락이 되고 나서야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매번 이른 시간에 일을 나서 얼굴만 겨우 알고 지낸 남자가 동백을 향해 눈짓으로 인사하며 스쳐 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동백은 희끄무레 밝아진 주변에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제 곧 묘시라 해가 뜰 테니 별문제는 없을 터였다.
동백은 방으로 돌아와 검을 풀어두고 침대 위로 늘어졌다. 이젠 귀에 익은 삐걱거리는 소리가 정겨웠다.
얇은 패널로 벽을 세운 옆 방에서 희미한 인기척들이 느껴졌다. 이제 막 일과를 마친 동백과 다르게 이제 막 아침을 맞이한 이들이 깨어나는 소리였다.
세운동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수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는데, 서로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몰라도 가난하고 외롭고 힘든 자들이 많았다.
부정적인 감정은 부정적인 기운을 불러들이고, 모여든 사기는 다시금 인간을 불행히 만들었다. 끝나지 않는 악순환이었다.
게다가 그런 곳엔 사기를 먹어 치우는 요괴나 요수가 날뛰기 마련이라 동백은 항상 자신을 억제제로 삼았다.
그에게 꼬리표처럼 들러붙은 악명을 방패로 삼은 것인데, 종종 이렇게 제 욕심에 눈이 멀어 제 명을 재촉하는 놈들도 몇 놈 나왔다. 이런 경우 동백이 나타나면 꽁지를 말고 도망치거나, 아니면 눈치를 보며 제 버릇 개 못 주고 다시 나타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고작 사흘 만에 유명세를 치른 놈이니 후자일 거라고 동백은 예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일주일 후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다만, 예상치 못한 손님을 맞이하는 건 동백의 계획엔 전혀 없던 일이었다.
◆
이른 아침의 해가 떠오르며 밤새 거리를 밝힌 가로등의 불빛이 꺼졌다. 도시가 품었던 그림자는 밀려드는 태양 빛에 지레 놀라 물러서며 자취를 감췄다.
동백은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흠’하고 짧게 목을 울렸다.
생각보다 참을성이 좋은데?
삼사일 정도면 못 참고 튀어나올 줄 알았더니 어둑서니는 일주일째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이동한 건가 싶어 호영에게 인터넷에 떠도는 괴담 중 혹시 세운동 괴담과 비슷하거나 같은 내용이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었다.
결과는 ‘딱히 없다’였지만 말이다.
동백은 검파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까닥였다. 자신의 예상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 섣불리 단정할 순 없었다.
낮밤이 뒤바뀐 일주일 사이 제법 얼굴이 익은 사내가 오늘도 눈짓으로 인사하며 동백을 스쳐 지나갔다. 그에게선 메케한 먼지 내음과 텁텁한 흙냄새가 났다. 흔히 건물을 짓는 공사장에서 익히 맡았던 냄새였다.
아마 이호영은 저 사내에 대해 동백보다 조금 더 자세한 사정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가 물어보면 흥미로운 이야기를 풀어두는 것처럼 떠들어댈 수도 있을 정도로.
그렇지만 동백은 호영과 다르게 한 걸음 물러서서 그저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는 사이로 남았다. 그게 동백이 지금껏 살아왔던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고시원의 좁은 계단을 오르던 동백은 귓가에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얼굴을 굳혔다.
“동백 형이 처음에는 얼마나 까탈스럽게 굴었는지 아세요? 먹을 걸 줘도 이렇게 뚱~ 한 얼굴로 쳐다보면서 이걸 왜 나한테 주냐는 듯 쳐다보는데 어찌나 얄밉던지.”
“지금은 어떤데요?”
“지금도 뚱하게 쳐다보는 건 똑같은데 잘 먹어서 챙겨주는 보람은 있어요.”
이른 아침. 현대식 표기로는 7시도 되지 않았을 시간이었다. 이호영은 보통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기에 이 시간에 일어나 있을 확률은 희박하건만, 그 희박한 확률을 뚫고 자신이 가장 귀찮게 여기는 불청객과 도란도란 수다나 떨고 있는 꼴이라니!
동백은 다급히 계단을 올라 고시원의 문을 열었다.
“오셨어요?”
동백의 기척을 멀리서도 느끼고 있었을 자오가 천연덕스럽게 돌아보며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