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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15화 (16/61)

14화

그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동백은 그와 마치 수백 년은 알고 지낸 것 같은 느낌마저 받았다.

“선인님이 거처에 안 계셔서 기다리는 사이 이 친구가 잠시 말동무가 되어주었답니다.”

휙, 동백의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이호영이 분위기를 읽었는지 찔끔하는 얼굴로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치, 친구라고 하시던데….”

아니었어?

호영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

동백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 저 아이가 무슨 잘못이겠는가. 죄라면 유독 사람을 좋아하고 오지랖 넓은 친화력이 잘못이겠지.

“이호영.”

“어, 어!”

“넌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맨날 늦잠 자는 놈이.”

차라리 자고 있었으면 저 음흉한 까마귀 놈과 만날 일도 없었을 텐데. 속내를 숨긴 동백의 질문에 호영이 놀라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형이 내 생활 패턴을 알아?”

“너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잖아. 두 해나 널 알고 지냈는데 그것도 모를까.”

이호영의 표정이 다소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그 표정은 마치 오랜 시간 밥을 챙겨줘도 자신을 본체만체하던 길고양이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반기며 달려 나오는 모습을 발견한 사람 같이 보이기도 했다.

동백은 어물어물 말을 잇지 못하는 호영을 잠시 살폈다. 단정하지만 한껏 멋을 낸 머리, 신경 쓴 옷차림을 보아하니 어디 나가려는 모양새가 분명했다. 그리고 이호영이 이런 이른 아침에 나갈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오디션 가냐?”

“응….”

말끝을 늘린 다소 자신감 없는 대답에 동백은 호영의 어깨 위에 그새 들러붙은 사기를 툭 털어 주었다. 하여튼, 요수 놈들이란 존재만으로 해악이라며 속으로 욕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 다녀오고. 그런데 안 늦었어?”

“응? 아직 시간 괜찮….”

“…….”

“지 않은 것 같네!”

동백의 눈썹 끝이 점차 솟아오르는 것에 이호영은 슬그머니 가방을 챙겨 들었다. 마지막까지 미적거리던 호영을 시선만으로 쫓아낸 동백은 미련이 뚝뚝 남은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일주일 동안 아주 바쁘셨겠어?”

한껏 비꼼이 가득한 어조였으나 자오는 개의치 않는 듯 가볍게 답했다.

“바쁘긴 했죠. 저도 일을 해야 먹고 사니까요.”

“네가 일을 한다고?”

“그럼 제가 쓰는 돈이 다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제게 향하는 동백의 못 미더운 시선에 자오는 품속에서 지갑을 꺼내 슬쩍 벌려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누릇누릇한 색상의 지폐와 네모반듯한 플라스틱 카드가 몇 개 꽂혀 있었다.

지갑을 갈무리해 품에 집어넣은 자오가 이번엔 품속에서 작은 명함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작은 엔터테인먼트 회사 하나 굴리고 있습니다.”

J.O Entertainment

대표이사

한아

작은 종이에 쓰인 건 그게 전부였다. 심지어 쓰인 이름은 자오의 것이 아니었음에도 동백은 그 명함이 진짜 자오가 쓰는 명함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너 진짜 이름 못 짓는구나?”

가명으로 쓰고 있는 이름도 까마귀라니.

나쁜 쪽으로 일관적인 작명 센스에 동백은 약간 안타까운 기분마저 들었다. 심지어 회사 이름의 약자는 아마도 본래 이름을 따서 만든 약자라는 것에 그는 이호영의 오디션 합격을 걸었다.

“괜찮지 않나요?”

“모르고 보면 괜찮겠지.”

그러나 눈앞에 앉은 이가 까마귀라는 걸 아는 동백으로서는 개 이름을 ‘견(犬)’으로 지어둔 거나 다름없는 이름이었다.

“다들 제가 까마귀인 건 모르니까 괜찮겠네요.”

하긴, 그렇겠네.

동백이 저도 모르게 자오의 말에 수긍했다. 이젠 오래된 이야기 속 허구로 남아버린 존재이니 그 누가 자오가 인간이 아니라고 의심하겠는가. 저런 꼴로 돌아다녀도 좀 취향이 특이한 놈으로나 볼 터다.

“그런데 방금 나간 그 친구. 오디션이라면 연예계 쪽으로 진출하려는 건가요?”

“그건 알아서 뭐 하게.”

“보셨다시피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자오는 말하며 은근히 제 명함을 동백 쪽으로 밀었다. 동백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명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 건방진 놈의 회사가 얼마나 큰 회사인지는 몰라도 이호영에겐 꽤 큰 도움이 되긴 할 테지만….

“됐다. 그 애는 알아서 잘할 테니.”

이호영은 이미 흘러가는 물살에 몸을 실었다. 거기에 동백의 가호가 이어질 테니 앞으로 순탄한 삶을 살 텐데 거기에 요수를 묻히기 싫었다.

“꽤 아끼시는 인간 아닌가요?”

“그러니까 그냥 놔두라는 거지. 그 아이는 가만 놔두고 네 용건이나 밝히는 게 어때?”

“그럼 그럴까요?”

자오는 다시 품속에 손을 집어넣고 무언가를 찾는 듯 뒤적거리다 절대 옷 사이 얄팍한 틈에서 나올만한 크기가 아닌 가방 하나를 쑥 꺼냈다. 마치 주머니에서 뭐든 꺼내는 모 만화가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그놈은 퍼런색 귀 없는 고양이였고 동백의 눈앞에 앉은 놈은 시대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까마귀라는 점이었다.

까마에몽 새끼.

동백이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헛웃음을 지었다. 술법이 얼마나 뛰어나기에 옷 사이에 저러한 공간을 만들어 둔단 말인가.

그새 몇 개의 커다란 가방을 더 꺼내 바닥에 내려둔 자오가 아주 예의 바르게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무엇을? 이라고 고민할 새 없이 자오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부터 저도 여기 살게 되었거든요.”

“―!”

동백의 두 눈이 서서히 크게 뜨이는 것에 자오는 얄미울 정도로 활짝 웃었다.

이호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늘 오디션은 뭔가 달랐다. 비록 작은 뮤지컬의 단역이지만 노래도 저음부터 고음까지 흔들리지 않고 쭉 뽑아냈고, 대사나 시선 처리도 자신이 느끼기에 완벽했다. 심사관들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부지런히 뭔가를 적거나 이호영에게 적당한 관심을 보였다.

‘붙을 것 같아.’

이상한 자신감이 가슴 저 아래에서부터 샘솟았다. 이 기쁨을 당장 누군가에게 털어두지 않으면 온몸이 뻥 터져 버릴 것만 같아 날랜 걸음으로 고시원으로 돌아왔던 이호영은 깜짝 놀랐다.

복도의 가장 끝 방.

위치상으로는 동백과 벽을 마주한 옆방이었다. 그곳의 방문을 쿵! 소리가 나도록 두드린 동백이 날카롭게 소리치고 있었다.

“시끄러워!”

고시원 안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였다. 그 소음에 방에 있던 이들이 한둘씩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가 이호영처럼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들은 동백이 아주 조용하고 차분한 이웃인 걸 아는 이들이었다. 마치 화살 맞은 멧돼지처럼 저돌적으로 문을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가 다름 아닌 동백이라는 것에 흥미로워하는 이들도 있었고,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감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동백은 그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문을 열고 나온 사내에게 다시금 으르렁거렸다.

“시끄러우니까 숨 쉬지 마.”

아무리 얇은 판으로 막아둔 벽이라도 숨 쉬는 소리까지 들릴 정돈 아닌데. 이호영과 다른 이들은 그 순간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광마저 나는 매끄러운 까만 머리칼을 허리 너머까지 기른 사내, 자오는 그 억지스러운 요구에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대답이 너무 가벼웠다. 그깟 숨, 안 쉬면 되지. 같은 느낌의 대답에 가까웠다. 정말 숨을 안 쉬는 듯 미약하게 움직이던 가슴의 움직임도 멎었다.

‘숨 안 쉬면 죽는 거 아니야?’

이호영은 다급하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형!”

동백이 호영의 부름에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이 어찌나 매서운지 이호영이 놀라 움찔거리자 동백은 뒤늦게 표정을 풀었다.

“왔냐?”

그래도 불편한 심기가 다 가려지진 않았다.

“오디션은 잘 봤고?”

“오늘은 느낌이 좋아. 그보다 아침에….”

친구라던 손님이네.

라고 말하려던 이호영은 주변을 훑곤 재빨리 제 뒷말을 꿀꺽 삼켰다. 방 하나를 차지한 자오를 보건대 이젠 손님이 아니라 한 식구라는 말이었다. 자신이 누군가. 이 고시원의 마당발이며 분위기 메이커였다. 이호영은 아무도 맡겨두지 않은 책임감을 느끼며 남몰래 주먹을 쥐었다.

호영에게 자신을 한아라고 소개한 남자는 굉장히 예의 바르고 부티가 났다. 입은 복장이 특이해서 그렇지 사실 기성복보다 저런 옷이 더 비싸다는 걸 이호영은 잘 알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치장한 비녀는 값비싼 자개로 만들어졌고 허리춤의 노리개는 은빛의 은은한 광택이 돌며 세공이 아주 섬세했다.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철없이 자란 이호영은 출생에 걸맞은 특기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비싼 물건을 알아보는 안목이 몹시 뛰어나단 점이었다.

그런 호영의 눈에 비친 자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돈을 휘감고 다니는 존재였다.

비록 지금은 집안에서 반대하는 꿈을 이루겠답시고 어렸을 때부터 모아둔 용돈과 함께 가출한 상태이지만, 어릴 때부터 키워 온 안목이 어디 도망가는 건 아니었다.

‘대체 무슨 관계일까.’

호영은 호기심을 누르며 눈을 굴렸다.

“안녕하십니까. 아침엔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지루하지 않았거든요.”

그런 호영에게 자오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품에서 제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넸다.

“헉…!”

하얀 건 종이고, 까만 건 글자라.

명함을 받아 든 호영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힘껏 들이쉰 숨이 목구멍에서 턱 막혔다.

“제이오 엔터테인먼트….”

“그냥 작은 사업을 좀 하고 있습니다.”

이게 작은 사업이면 정말 작은 중소 소속사는 모두 구멍가게라고 칭해야 했다. 이호영은 떨리는 손으로 소중히 명함을 챙겼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동백은 명함을 버리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호영이 보기엔 천금과도 같은 기회일 테니까.

대신 그는 자오를 향해 두 눈을 부릅떴다.

허튼짓하기만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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