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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16화 (17/61)

16화

동백의 위협적인 눈빛에 자오는 화답하듯 싱긋 웃었다. 이 정도 위협에 굴했다면 굳이 이 고시원으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가 노리는 사냥감이 이 인간을 제법 아끼는 것 같으니 눈앞의 이호영은 자오에겐 아주 맛 좋은 먹잇감이었다.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동백은 이호영이 스스로 잘할 거라고 했지만, 그건 길을 걷는 것과 같다. 적어도 자오는 그 걸음에 꽃을 뿌리고 등에 날개까지 달아 줄 능력이 있었다.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본능이야 이미 오랜 시간을 살아오며 파악한 자오다. 이런 인간 하나쯤 손에 쥐고 휘두르는 건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제 명함을 홀린 듯 쳐다보는 이호영을 두고 자오는 동백을 향해 두 눈을 크게 휘었다. 역시나 못마땅한 시선이 들러붙었지만,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잘 되게 도와주면 되는 일 아닌가.

“와~! 말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도 이번 오디션에 붙을 것 같아서요! 당장은 괜찮습니다.”

“그래요. 나중에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꼭 말해요.”

당장은 거절이 돌아왔어도 자오는 성급히 굴지 않았다. 기회는 언제든 돌아올 것이고 남은 생은 길었다. 세상사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혹시 모르지 않나, 이호영이 오디션에서 떨어질지.

점차 음흉해지는 자오의 표정에 동백이 검 끝으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허튼짓하지 말라는 2차 경고였다. 멈추지 않으면 밤길에 목을 날려 버리겠단 살벌한 시선에 자오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어차피 동백이 경고하지 않았어도 자오는 이쯤에서 멈출 생각이었다. 아직 간절하지 않은 이에게 희망이라는 아주 달콤하지만 지독한 구명줄을 내려줘 봤자 무시당할 뿐이니까.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이호영은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듯 가볍고 쾌활하게 물었다.

“그보다, 한아 형은 동백 형하고 친구이신 거죠?”

“친구죠.”

“원수야.”

“우와! 두 분 진짜 친하신가 보네요.”

“친합니다.”

“안 친해.”

묻는 말마다 돌아오는 건 각기 상반된 대답이건만 이호영은 동백의 말을 스스로 필터링했다. 호영의 머릿속 동백은 좀 까탈스러운 고양이었다.

“한아 형이 아침에 저한테 동백 형에 관해서 물으신 건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거죠?”

이호영의 머릿속으로 청춘 드라마가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동백과 한아.

그러나 한아의 부모님이 동백의 부모님을 배신하게 되고, 그 탓에 동백의 집안은 무너져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동백은 고시원을 전전하며 남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엄청난 직업을 갖게 되고 한아는 번듯하게 성공하여 다시 동백을 찾아와 용서를 비는 그런 청춘 드라마.

호영의 눈이 번쩍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있을 게 아니었다.

“형님들!”

고시원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소리친 호영이 두 사람의 손을 잡아 마주 댔다.

“저랑 술 한잔하시죠!”

대체 내가 왜.

동백은 작은 잔에 담긴 맑은 술을 입안에 툭 털어 넣곤 입매를 찌푸렸다. 화학적인 알코올 향이 확 풍기는 술은 전혀 동백의 취향이 아니었다. 술에 취한 이들이 내는 시끄럽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도, 고기를 익히며 나는 연기와 냄새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건 모두 참을만했다.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건 때론 제 취향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아니까. 지금 동백이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제 옆에 앉아 순하게 웃으며 고기를 뒤집고 있는 자오였다.

생긴 건 제 손으로 음식 하나 해 먹지 않을 것 같이 생겨서는 대체 왜 잘 굽는 건데?

동백은 제 그릇에 놓인 노릇하게 익은 고기를 젓가락으로 뒤적거렸다.

“선인님 안 드세요?”

자오는 그런 동백의 그릇 위로 새 고기를 얹어주며 그사이 식은 고기를 제 그릇으로 옮겼다. 그 일련의 과정이 자연스러워도 너무 자연스러웠다.

“형, 얼른 먹어. 오늘 오디션 잘 본 거랑 한아 형님이 새로 오신 걸 기념해서 내가 사는 거야.”

“…….”

어휴.

동백은 한숨을 삼키며 고기 몇 점을 입에 넣었다. 지방이 주는 고소함과 살코기의 담백함은 입맛을 돋우듯 혀에 들러붙었지만, 기분은 모래를 씹은 듯 버스럭거렸다. 호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이곳으로 데려온 건진 알겠는데 헛고생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자오는 고기를 굽는다는 핑계로 술에 입도 대지 않고 있으며 자신은 이런 술로는 절대 취하지 않았다. 적어도 선경 끝자락에서 자라는 복숭아로 빚은 술이라면 모를까. 작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동백은 선경에서의 마지막 술자리를 떠올렸다.

선경의 끝자락엔 안양각(安養閣)이라 불리는 누각이 하나 있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몸을 쉬게 하고 오유지족(吾唯知足)으로 원만구족 지공무사(圓滿具足至公無私)라.

본래 이름이 없던 누각에 안양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누각 기둥에 설법을 새긴 이는 극락정토의 사람이라고. 태상이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며 술잔을 기울였었다.

높은 절벽 끝자락에 지어져 발아래로는 무릉도원이 펼쳐지고, 훈풍을 타고 밀려든 꽃잎이 넘실거리는 곳이니 이름도, 얼굴도 모를 누군가가 탁월한 이름을 붙였음을 동백은 인정했다.

태상은 그 아름다운 곳에서 동백이 어깨 위에 지고 있던 모든 죄책감과 증오를 털어내길 원했겠지만, 그는 바로 다음 날 땅으로 내려왔다.

그 후로 취해본 적이 있던가.

홀로 불콰한 얼굴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는 호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동백은 다시금 술잔을 기울였다.

역시 영 취향에 맞지 않았다. 이런 게 뭐 그리 좋다고 마셔대는지. 결국 취하지 않는 술이란 물과 같은 존재인 것을. 심지어 이건 맛도 없었다.

동백은 영 못마땅한 얼굴로 잔을 내려두었다. 해는 이미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아 어둑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이들의 발길이 바지런했다. 밝은 빛 아래 고인 그림자는 더 짙은 법이니 이쯤 되면 약이 바짝 올라 있을 터였다.

이호영의 장단에도 이만큼 어울려 주었으면 됐다. 그는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응? 형 어디 가?”

술 몇 잔에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던 호영이 그 움직임에 게슴츠레 눈을 뜨고 물었다. 그냥 놔두면 고시원까지 걸어가는 게 아니라 기어갈 것 같은 모양새에 동백은 손에 선기를 실어 호영의 머리를 가볍게 툭 두드렸다.

“정신 차려라.”

“으헉!”

맑고 정순한 기운은 상대방의 정신을 바르게 돌려두는 것에 특효약이라 붉게 달아올랐던 호영의 안색이 단숨에 멀끔해졌다. 몽롱했던 정신을 깨우고 몸에서 술기운을 몰아내는 건, 마치 한겨울에 얼어붙은 계곡물을 뒤집어쓰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 이호영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계산하고 얼른 집에 가.”

“벌써?”

“벌써는 무슨 벌써야. 지금 술시다.”

“술시? 아니 무슨 무협지에서나 나올 표현을 쓰고 있어…. 그게 정확히 몇 시인데?”

“저녁 7시부터 9시까지를 술시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시간은 8시 30분쯤 되었군요.”

동백 대신 자오가 친절히 답해주며 계산을 마쳤다.

“헉! 형님! 내가 계산한다고 했잖아요!”

순식간에 계산의 기회를 빼앗긴 호영이 뒤늦게 기겁했으나 자오는 품속으로 지갑을 넣으며 눈 끝을 부드럽게 휘었다.

“벼룩의 간을 빼먹을 순 없죠.”

“그거 지금 내가 벼룩이라는….”

“가자.”

입이 댓 발 나온 채 투덜거리는 호영의 말을 끊으며 동백이 가게를 나섰다. 그들이 있는 번화가에서 고시원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지만, 동백은 호영을 굳이 고시원 앞까지 데려다주고 나서야 다시 발길을 돌렸다.

술시를 넘어 해시가 된 시각인데도 네온사인의 불빛이 요란하게 반짝이는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 차 북적거렸다.

사는 곳에 흉흉한 괴담이 도는데도 사람들의 얼굴엔 그것을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과학이 발전하며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모두 허상으로 밀려났으니 그럴법했다.

“세상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조용히 걷던 자오가 문득 말을 건네오자 동백은 대답 대신 곁눈질했다. 여전히 청량한 벽도화 향기를 품은 사내는 앞으로도 몇백 년간 변하지 않을 모습으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경외는 사라졌고 두려움은 퇴색되었죠. 이젠 귀신이나 요수, 요괴보다 그들과 같은 인간이 더 두려운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우리의 시대는 완전한 종말을 맞이했다고 봐도 좋지 않겠습니까.”

“답지 않게 꽤 감상적이네.”

“오래 살다 보니 그렇게 변하더군요.”

오래 살다 보니 그렇다라….

살아온 날을 헤아리는 것도, 앞으로 살날을 헤아리는 것도 이젠 의미 없는 행위가 되어버린 지 오래라 동백은 자신이 정확히 얼마나 살았는지 알지 못했다.

자오의 말대로 그들의 시대는 아주 오래전에 저물었고 동백을 지탱하던 원동력은 이미 힘을 다해 스러졌다. 다만 잿불만이 남은 지겹고도 무거운 증오는 여전히 동백을 땅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서로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줄 이도 많지 않은데 그런 의미에서 횟수를 다섯 번으로 늘리는 건 어떠신지?”

개수작이었군.

동백은 깔끔하게 자오를 무시했다. 자오는 제 시도가 통하지 않은 것에 실망하는 기색도 없이 동백의 뒤를 느긋하게 따랐다.

휘황찬란하여 눈이 부실 정도인 거리를 지나오자 아까의 소란스러움이 마치 환상이었던 것처럼 적막으로 짓눌린 어둑한 골목이 아가리를 벌리며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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