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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17화 (18/61)

17화

드문드문 선 가로등이 깜박거리며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분투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동백은 그 음산한 길의 끝에서 하나의 기척을 느끼고 입술을 비뚜름하게 끌어올렸다.

“슬슬 기어 나올 때가 됐지.”

동백이 가볍게 발을 굴러 순식간에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쇄도했다. 힘겹게 빛을 반짝이는 가로등의 불빛도 닿지 않는 어두운 골목의 끝. 짙은 그림자가 진 곳에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아이와 바닥에 쓰러져 끙끙거리는 남자 한 명이 있었다.

“으, 무…거워…제발….”

숨이 끊어질 듯 희미하게 울먹이는 소리가 적막을 깨부쉈다. 어둑서니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동백의 모습에 당황한 듯 일렁이다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안 쫓으십니까?”

자오가 어둑서니가 사라진 자리를 살피다 물었다. 동백이라면 능히 뒤쫓아 잡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일 테니까. 그러나 동백은 쓰러진 남자를 살피며 혀를 찼다.

“봐라.”

어둑서니가 도망쳤음에도 그는 여전히 끙끙거리며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음…. 어둑서니의 술법이군요.”

“그래, 어린놈이 술법도 풀지 않고 도망쳤으니 이대로 두면 죽을 게 분명하지.”

어둑서니를 쫓아 잡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어둑서니를 잡아 올 때가 되면 이 남자는 극심한 두려움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릴 터였다.

동백은 기억을 더듬으며 손가락 끝에 선기를 모았다.

먼저 원을 그려 선기가 헛되이 퍼지지 않도록 결계를 치고 그 안에 사방을 수호하는 존재의 진명을 적어넣어 삿된 것의 기운을 몰아냈다. 익숙하지 않아 비뚤게 그려진 원과 이름이 꽤 처참했다.

“…그 술법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요.”

결국 곁에서 지켜보던 자오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정교한 결계와 술식이 합쳐져야만 하는 술법이었다. 그런 술법을 동백은 오직 선기 하나에 의지해 남자의 몸을 잠식한 기운을 몰아내고 있었다. 정말 무식한 방법인데 동백의 충만한 선기가 이루는 기적과도 같은 광경에 자오는 혀를 내둘렀다.

“모로 가도 결과만 같으면 그만이지.”

“…그렇긴 합니다만.”

동백은 한결 안색이 편안해진 남자를 이리저리 살폈다. 강제로 술법을 풀어낸 탓에 며칠 악몽을 꾸긴 할 테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그보다 이 남자를 그냥 여기 버려둘 순 없고.

기운이 쇠한 탓에 귀신이 들러붙기 딱 좋았다. 지금이야 동백이 곁에 있으니 감히 다가오지 않는 것이지 자리를 뜨는 순간 우글우글 몰려드리라.

“제가 도와드릴까요?”

동백의 표정을 기민하게 읽어낸 자오가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왔다. 은원을 확실히 하는 까마귀의 도움이라니. 영 탐탁지 않긴 하지만, 이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되찾을 때까지 곁에 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네가 날 돕는다고 해서 내가 널 도울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런 걸 바라진 않았습니다.”

그럼?

대체 무엇을 바라고 베푸는 도움이냐 물으려던 동백은 금방 그 의도를 파악했다. 동백에게 큰 도움을 바라진 않아도 이 영악한 까마귀는 자신이 그의 곁에 있는걸 익숙해지도록 만들 요량인 것 같았다.

“영악한 놈.”

“후후…. 칭찬으로 듣죠. 그보다 어쩌시겠습니까.”

스스로 도울 생각은 없는지 자오는 동백의 선택을 기다렸다. 동백은 그런 자오를 잠시 바라보다 입을 뗐다.

“좋아.”

“의외시군요.”

“내게 잘 보이려 하는 놈의 호의를 거절할 필욘 없지. 스스로 호구처럼 굴어주겠다는데.”

“…….”

“왜, 아니야? 아니면 호구라고 불리니 기분이라도 나빠?”

“아뇨, 앞으로도 호구처럼 잘 써먹어 주시면 좋죠.”

자오는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지나고 전화를 받은 상대는 목소리에 피곤함을 감추지 않았다.

[이사님, 저 퇴근했습니다만? 아침 아홉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가 제 근무 시간인 건 아시죠?]

“대신 시간외근무수당도 주잖아요?”

[……휴우,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별건 아니고 사람 하나만 좀 주워가세요.”

[혹시 시체는 아니죠…?]

“우리 이 비서님은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시나 보네요.”

[그럴 ‘사람’은 아니시죠. 문자로 위치 보내주시면 금방 가겠습니다.]

사람에 유독 강세를 두어 말한 비서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전화를 먼저 뚝 끊어버렸다. 상사에게 하는 것 치곤 건방진 태도였으나 자오는 익숙한지 문자로 위치를 상세히 적어 전송 버튼을 누르곤 동백을 쳐다보았다.

마치, 어때? 라고 묻는 것 같은 시선에 동백은 감상평을 순순히 털어놓았다.

“네 정체를 아는 자인가 보지?”

“맞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기운이 강대해 귀신이 접근하지 못하고, 제 기운이 깃든 물건까지 가졌으니 이런 인간 하나쯤 지키는 건 쉬울 겁니다.”

자오는 말을 마치고 잠시 머뭇대다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선인님께서 그 인간과 마주치는 걸 원하지 않으시면 잠시 자리를 피해 계셔도 됩니다.”

“됐어.”

그래 봐야 고작 백 년도 살지 못하고 죽는 인간이었다. 게다가 자오의 정체를 아는 이이니 함부로 입을 놀리지도 않을 터. 신선이니 요수니 말해봤자 믿어주는 사람도 없을 테고 말이다.

“게다가 앞으로 얼굴 볼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그때마다 피할 순 없잖아?”

“아하하, 그렇네요.”

자신을 알차게 부려 먹겠다는 말에도 자오는 밝은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서로의 목적이 뚜렷한 동행이었다. 긴 시간 속에 묻힌 오래되고 케케묵은 이야기를 캐내면 끝일 동행인데,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제 머리 위에 올라앉은 신선을 자오는 부드럽게 응시했다.

“그런데 그 어린 어둑서니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잡아야지.”

“쉽진 않을 겁니다. 어둠은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알아. 그런데 뭐….”

어둑서니는 삼십 년 전 잡았던 거울 요괴보다 더 까다로운 상대였다. 물리적인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으니 오직 술법만으로 해결을 봐야 하는데, 마침 동백에겐 아주 좋은 술법 실행기가 손에 들어온 참이었다.

“네가 있잖아?”

자오를 믿진 않아도 자오의 실력만큼은 믿는 동백이 가볍게 응수했다.

“…….”

“왜, 막상 진짜 부려 먹히니까 싫냐?”

“아뇨,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다른 신선이나 요수가 이리 건방지게 굴었다면 벌써 무기를 꺼내 들고 놈의 얼굴을 뚫어버렸을 텐데. 자오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의 시선 끝에 동백이 걸렸다.

동백은 자오의 비서를 기다리는 사이 주변에 퍼진 어둑서니의 흔적을 모두 거둬들이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섰던 골목길의 초입부터 남자가 쓰러진 곳까지 짙게 깔린 사기를 몰아내고 선기로 가득 채우자 음산했던 길은 마치 선경처럼 화사하고 선한 정기가 일렁였다. 마지막 사기를 완전히 몰아낸 동백이 손을 탁탁 털었다.

“그냥 놔둬도 일주일이면 사라지지 않습니까?”

“그동안 무고한 이들이 피해를 보잖아.”

작게는 악몽부터, 영향을 크게 받는 이들은 건강을 해칠 수도 있었다. 조금만 수고하면 쉽게 없앨 수 있는 걸 굳이 남겨둘 이유도 없고 말이다.

“선인님은 참 특이한 분이십니다. 다른 신선이면 인계엔 영향을 끼치면 안 된다며 뒷짐 지고 구경이나 하고 있었을 텐데요.”

자오의 말에 동백은 코웃음 쳤다. 그 말을 하는 본인 또한 특이한 놈이라는 걸 망각한 언사가 꽤 우스웠다.

“지금 자기소개해?”

“저는 평범한 편이죠.”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어둑서니를 어떻게 잡을지 고민이나 하는 게 어때?”

“모로 가도 결과만 좋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동백이 했던 말을 그대로 써먹은 자오가 입가를 가리고 씨익 웃었다. 분명 같은 말인데도 사뭇 다르게 들려 동백이 미간을 모았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뜻은 같은데, 그 수단과 방법이 썩 좋은 쪽이진 않을 것 같았다.

수단과 방법에도 적정선이라는 게 있다고 자오에게 말하려던 동백은 검은 세단 한 대가 다가오는 것에 타이밍을 놓쳤다.

“제 비서가 온 모양이네요.”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까치집 진 머리와 후줄근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생생했다.

“처음 뵙는 분이 계시는군요.”

그는 동백을 발견하고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제이오 엔터테인먼트 비서실 소속 총괄비서 이명현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명함을 찾던 그는 뒤늦게 제 몰골을 떠올리고 머쓱하게 웃었다.

“명함은 두고 와서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동백입니다.”

거창한 이명현의 소개와 달리 동백은 제 이름만을 내뱉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에겐 이명현처럼 덧붙여 말할 무언가가 없었다. 굳이 말한다면 ‘신선 동백’이라고는 말할 수 있을 테지만, 자신을 신선으로 소개해 본 적이 아득히 멀다 보니 이젠 입에 잘 붙지 않았다.

이명현은 그런 동백에게 약간의 호기심과 두려움이 깃든 시선을 보내다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아주 오랜만에 겪어보는 상황에 동백이 쓰게 웃었다.

그래, 보통은 저런 반응이었지.

비록 이명현은 동백을 신선이 아니라 자오와 같은 요수라고 생각하는 것 같긴 하지만, 결은 같았다. 이러나저러나 인간에겐 이질적인 존재니까.

동백은 자신을 어려워하는 이명현에게 퍽 부드럽게 물었다.

“앞으로 명현 씨라고 부르면 될까요?”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이명현은 깍듯하게 대답하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남자를 타고 온 차의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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