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쓰러진 남자가 몸집이 있는 편이라 무거울 텐데도 도와 달라는 말은 일절 꺼내지 않고 홀로 사투를 벌인 그는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자오를 돌아봤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깨어날 때까지 곁에 두고 깨어나면 제 노리개를 쥐여 보내세요.”
“알겠습니다.”
자오가 시키는 것에 의문 없이 수긍한 이명현은 차에 타려다 말고 깜박했다는 듯 덧붙였다.
“이사님, 빠른 입금 아시죠?”
“차라리 한 번에 받아 가라니까요. 매번 귀찮게.”
“…한 번에 받아 가라는 게 저번에 말씀하셨던 골동품이면 사양하겠습니다.”
“이렇게 받는 것보다 팔면 값이 더 나온다니까요?”
“팔면서 떼이는 세금과 귀찮음을 고려하면 현금이 최곱니다.”
이명현은 다시금 빠른 입금을 강조하곤 타고 왔던 세단을 타고 사라졌다. 물론 출발하기 전 동백을 향해 깍듯한 인사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둑서니에게 당한 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던 동백이 민망할 정도로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처리였다.
“어떻습니까. 도움이 좀 된 것 같으신가요?”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오는 제 가치를 증명이라도 한 듯 동백에게 그리 물었다. 뻔히 알면서도 대답을 들으려 묻는 말에 동백은 고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다다라서야 그에게 답을 돌려주었다.
“아직 잘 모르겠는데?”
조금은 오만하게 떨어진 답에 자오는 잠시 멍한 얼굴로 계단을 오르는 동백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피식,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모르시겠다면야, 제가 더 노력해야지요.
시간이야 두 사람 모두 많으니 조급할 것은 전혀 없었다. 아무리 단단한 돌이라도 끝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끝내 제 한 몸 누일 자리를 만들어 내는 법이니.
그는 느긋하게 걸음을 돌렸다.
지금이 바로 그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
동백은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켰다. 옆 방에서 까마귀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이호영 또한 고시원 안에 없는 걸 느낀 동백은 오랜만에 검을 정비하기 위해 검과 부드러운 천을 들고 다시 침대 위에 앉았다.
부드러운 상아색 검집을 가진 그의 검은 처음엔 아무런 이름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스릉-
맑은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검날은 겨울의 눈밭같이 차가운 흰빛으로 반짝였다. 그는 검날에 투박하게 새겨진 글자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세한지우(歲寒之友)
명인의 손길로 빚어낸 검날에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글자는 아주 오래전 동백이 친우라 여겼던 이가 손수 새겨준 것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과거를 더듬듯 천천히 글자를 쓸던 동백은 부드러운 천으로 검날을 조심스레 닦았다.
‘무사히 돌아오세요.’
차마 가지 말라고 하지 못한 채 눈물만을 흘리던 어린 동생이 건넨 검은 몇 번이나 그의 목숨을 구했고, 수백 수천의 생명을 앗아갔다.
무사히 돌아오라 말하던 마지막 말을 뒤로하고 전쟁터로 나설 때 한 번이라도 뒤돌아볼 것을.
살짝 기름을 먹인 천으로 검날을 닦으며 동생의 얼굴을 떠올려도 야속한 시간은 그 기억마저 흐릿한 베일 너머로 감춰 버렸다.
동백은 검날에 비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처럼 흰 피부와 동백꽃처럼 붉은 입술, 약간 사나워 보이는 눈꼬리와 아래로 쳐진 입매. 전체적으로 나쁘진 않지만, 성질이 나빠 보였다.
동생이 자랐다면 자신과 비슷한 점도 많았을 것이다. 다 자란 모습을 본 건 아니니 정확하진 않았다. 몇 가지 다르다면 그 아이는 햇볕 아래서 뛰노는 걸 좋아했으니 햇볕에 그을려 이리 흰 피부는 아니었겠지. 그리고 항시 활짝 웃고 있어 곱게 휘어진 눈과 입술은 뭇 아낙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을지도 몰랐다.
모두 다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다.
동백은 손질한 검을 검집에 돌려두곤 방 밖으로 나왔다. 공용 공간엔 동백이 지난 일주일간 이른 아침 눈인사하며 지나쳤던 남자가 있었다. 그는 컵라면 하나를 앞에 두고 무언가를 핸드폰으로 보는 중이었다.
아침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눈인사와 함께 그를 지나치려던 동백은 그가 보고 있는 동영상이 얼마 전 이호영이 보여주었던 인물의 것임을 알아보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안녕하십니까! 형님들 누님들~』
여전히 쾌활하게 말하는 남자는 허공을 향해 팔을 휙휙 휘두르며 온갖 주접을 떨고 있었다.
동백의 눈에 은근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이번 계기로 동백은 핸드폰의 필요성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있었다. 저 조막만 한 기계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방대한 정보의 바다를 품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동백이 가기 어려운 저 먼 곳의 정보까지도.
막 익은 컵라면을 한 젓가락 뜨려던 남자는 기웃거리는 동백이 어지간히 신경 쓰였는지 핸드폰 화면을 잘 보이도록 돌려주었다. 말없이 건네진 배려에 동백은 사양하지 않고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 제가 온 곳은 어디냐! 시시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요즘 다시 HOT! 해진 곳이죠! 바로 장산입니다!』
거대한 산의 초입에 선 남자는 팔을 양옆으로 활짝 벌렸다. 그러자 그 하나만을 비추던 화면이 점차 넓어지며 거대한 산의 모습을 작은 화면 가득히 담아냈다. 점처럼 작아진 남자가 다시 팔을 휘적이자 화면이 움직이더니 장난꾸러기 소년같이 웃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다시금 비쳤다.
『영화부터 노래, 웹툰 더 나아가 온갖 콘텐츠 산업에서 한 축을 담당하고 계신 분이죠.』
빈 화면에 하얀 털 뭉치가 띄워졌다. 사람을 닮은 탈을 뒤집어쓴 머리와 범을 닮은 몸뚱이,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결 좋은 새하얀 털가죽을 가진 짐승의 모습은 꽤 소름 끼치게 묘사되어 있었다.
『장산범! 사람들의 목소리를 따라 해 홀려 잡아먹는 요괴라고들 하죠?』
남자의 설명에 동백이 미간을 접었다.
장산범이라니, 그런 놈 모른다고.
아마 장산에 사는 범의 창귀를 보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창귀는 죽은 이들의 목소리를 따라 해 인간을 범에게 데려오려 기를 썼다. 그래야지만 자신이 범에게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가족부터 사돈의 팔촌, 심지어는 길 가는 나그네까지 어떻게든 범에게 먹이려 갖은 수를 쓰는 놈들이다 보니 그만큼 독하고 저열했다.
동백 또한 등선 전에 창귀를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놈은 저를 묶어두었던 범이 사람의 손에 잡혀 죽는 바람에 창귀의 탈을 벗지 못하고 슬픈 노래를 부르며 그 산을 떠돌았다. 아직도 그 산에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놈에게 걸려 동백도 호되게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이런 거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컵라면 하나를 금세 비운 남자가 화면에 집중하고 있던 동백에게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
“뭐…괴담이나 귀신, 요괴, 미스터리 같은 것들요.”
그는 이 아임튜버 채널은 호영이 소개해 준 것이라고 덧붙였다.
어쩐지 같은 사람이 나오더라니.
동백은 작은 화면에 집중하느라 앞으로 쏠렸던 몸을 뒤로 물렸다.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런 것 치곤 집중해서 보시던데.”
“아, 이건 일이라서.”
그래 일이지.
그는 조금 자조적으로 웃었다. 사람이 돈을 벌어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하는 것처럼 동백 또한 한때는 살기 위해 요수를 죽이고 요괴를 몰아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으니까.
지금은…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저 반복적인 일의 연장선인지 아니면 여전히 낮게 불타오르는 증오가 그를 태우고 있는지.
얼굴은 눈에 익으나 아직 이름도 모르는 남자의 낯에 묘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그 호기심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이런 곳엔 수많은 사연을 지닌 이들이 흘러들어오기 마련이었다. 그들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이다. 매일 이른 아침에 나가 밤늦게 돌아오던 남자가 오늘은 늦은 오후에 이곳에 앉아있는 이유를 묻지 않는 동백처럼.
“그렇군요.”
덤덤한 대답을 돌려준 그는 자리를 정돈했다. 그 사이 동백을 위해 테이블에 남겨둔 핸드폰에선 장산범 영상이 끝나고 새로운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형님들 누님들! 오늘은 신선골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게요!』
신선골(神仙骨)
동백은 오랜만에 듣는 단어에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예전이라면 아는 이들이 종종 있었지만, 지금 와서 저 단어를 들을 줄은 몰랐다. 동백이 화면에 빨려들 것 같이 집중하자, 정돈을 다 마친 남자는 그런 동백을 기다려주기로 했는지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예로부터 사람이 도를 닦아 하늘에 오르면 신선이 된다고들 하잖아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그냥 몸까지 통째로 하늘에 올라가는 거로 생각하는데, 에이~ 아니에요!』
끄덕, 끄덕.
아임튜버의 말에 맞추어 동백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보통 사람들은 선경에 오를 때 몸까지 함께 오른다 생각하지만, 실상은 혼백만이 선경에 오를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럼 땅 위에 남겨진 몸은 그냥 죽음을 맞이하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혼백이 빠져나간 몸뚱이는 처음엔 죽음과도 같은 잠에 빠져들고, 다시 깨어났을 땐 멀쩡히 움직였다.
단 그 안은 텅텅 비어 날카로운 것으로 살갗을 찌르면 피 대신 흰 기름이 흐르고 이것을 태우면 푸른 작은 보석 같은 것들이 일흔 개 정도 나왔다.
보통은 신선이 된 자의 흔적이므로 영험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때론 불길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여 발견되는 즉시 태워지고 푸른 보석은 가족에게 인도되곤 했다.
영상의 남자는 동백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들을 제법 흥미롭게 늘어두더니 말미에서 뜻밖의 말을 툭 내뱉었다.
『마지막으로 발견되었다는 신선골의 기록은 우호 시대 때 남겨진 기록인데요. 놀랍게도 태우고 남은 잔해가 도화 사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하니 궁금하면 방문해 보세요.』
“―!”
덜컹!
동백이 벌떡 일어나자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