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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19화 (20/61)

19화

영상에 골몰해 있던 남자 또한 그 소리에 놀라 어깨를 움칫 떨었다. 그는 벌떡 일어난 동백을 놀란 듯 바라보았다.

“도화…?”

아주 오랜만에 발음해 보는 단어였다. 자신이 버렸던 이름을 단 박물관이라니. 심지어 우호 시대라 불리는 기간은 우영과 오호, 두 나라가 존재했던 시대를 뜻했다.

마지막 신선골, 우호 시대. 도화 박물관.

무언가 쭉 나열되듯 이어지는 것에 동백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 도화 박물관이라는 곳이 어디쯤 있는지 당장 확인이 필요했다.

“혹시, 저 도화 박물관이라는 게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평소라면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대신 직접 알아보겠지만, 한시가 급했다. 동백의 다급함이 남자에게까지 전달되었는지 그는 조금 급한 손길로 뭔가를 이것저것 검색하더니 결과를 보여주었다.

“여기 있다네요.”

땅 대부분이 산으로 이루어진 데다가 산세가 험한 지역.

옛 오호의 땅.

위치를 확인한 동백은 답지 않게 버벅거리며 방으로 쏜살같이 뛰어 들어갔다. 남은 비상금을 챙겨 도화 박물관으로 직행하려던 동백이 검을 챙겨 방을 나오다 우뚝 멈춰 섰다.

“형, 어디 나가게?”

외출하고 막 돌아왔는지 쌀쌀한 날씨에 맞춰 도톰한 코트를 입은 이호영이 남자와 인사하다 말고 동백을 반겼다. 찬 바람에 약간 붉게 달아오른 뺨과 순수한 호의로 빛나는 두 눈이 쾌활하게 반짝였다.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는데 잘 됐다. 떡볶이 사 왔으니까 같이 먹고 가.”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를 테이블에 올려두며 호영은 코끝을 손으로 문질렀다. 훌쩍, 코 들이마시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흥이 났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떡볶이를 그릇에 받친 호영이 동백을 향해 손짓했다.

“식기 전에 얼른!”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면 될 텐데, 동백은 그러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고시원 밖으로 뛰어나갈 듯 조급했던 다리는 방향을 틀어 호영에게 향했다.

‘형님, 이거 드세요.’

수줍게 내민 작은 손안에 가득 담겨 있던 열매들은 아직 설익어 풋내가 났었다. 짐승도 먹지 않을 열매를 모으기 위해 애쓴 손가락엔 나뭇가지에 긁힌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떫고 시고 차마 못 먹을 것들을 동백은 전부 먹어 치웠다.

그럼, 그 아이는 환히 웃으며 몹시 기뻐했었다.

이호영처럼.

자신은 이런 호의를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닌데.

“맛있지?”

동백은 떡을 하나씩 집어 먹으며 뿌듯해하는 이호영을 살폈다.

뭐가 그리 좋은 건지.

걸음을 멈추고 한숨 돌리자 한차례 머릿속을 흔들던 혼란이 점차 잦아들었다.

아직, 이곳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박물관이 갑작스레 사라지는 건 아니니 어둑서니를 잡고 나서 그다음에 방문해도 될 거라고. 동백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데 어디 가?”

“다녀올 곳이 있었는데 다음에 가려고.”

“잉?”

“마무리해야 할 일이 떠올라서.”

동백이 떡 몇 개를 집어먹다 멈추자, 호영이 작게 “입은 진짜 더럽게 짧다니까.”라고 투덜거렸다. 워낙 작은 소리라 동백이 못 들은 줄 알겠지만, 동백은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었다.

그러나 동백은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옅게 웃으며 마찬가지로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고마워.”

오래전엔 하지 못했던 인사를 건네며 그는 호영의 얼굴 위로 이젠 흐릿해진 남동생의 얼굴을 덧씌웠다.

짐승과 인간 모두 잠이 든 깊은 새벽인 인시.

끼익-

작은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고시원의 문이 열렸다. 칠흑같이 깔린 어둠에 구애받지 않은 남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 안으로 들어섰다.

“왔냐.”

그런 그에게 어둠 속에서 홀연히 하나의 목소리가 아는 척을 해 왔다. 보통이라면 놀랄 법한 상황이건만 그는 당연하다는 듯, 아니 오히려 기쁜 듯 두 눈을 휘었다.

“절 기다리고 계셨나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동백은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보이는 자오를 쏘아보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어둑서니를 잡을 방법이나 생각해 보랬더니 어딜 그리 쏘다녀?”

“선인님의 훌륭한 호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좀 가졌죠.”

그는 빈자리에 앉으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어디, 제가 노력한 결과물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예로부터 요수의 일은 요수가 가장 잘 알고, 요괴의 일은 요괴가 가장 잘 알았다. 그래서 자오는 세운동 근처에 터를 잡은 요수와 요괴들을 손수 찾아갔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오고.’

이름만 언급돼도 주변을 벌벌 떨게 만드는 천하의 자오가 다른 사람을 위해 아쉬운 소리를 하며 돌아다닐 것이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자오는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톡, 톡 테이블을 두드리며 동백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입술 끝은 시종일관 부드러운 곡선으로 휘어 있었다.

“또 뒤에서 수작질 부리고 다닌 건 아니겠지?”

“저 그렇게나 신뢰도가 낮았나요?”

“스스로 저지른 짓을 좀 돌아보지 그래?”

동백의 핀잔에 자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밉살맞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서도 눈빛은 짓궂음이 가득했고, 동공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만 눈이 소년처럼 반짝였다.

“그럼 이제부터 그 신뢰도라는 걸 좀 쌓아 보죠.”

자오는 차분히 숨을 골랐다. 조금 전까지 천진난만하던 소년은 순식간에 완숙한 청년이 되어 느른하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선인님은 이 말을 들어보셨나요? 요괴의 일은 요괴에게 묻고, 요수의 일은 요수에게 물으라는 이야기요.”

“알아.”

뒷말 좋아하는 인간들처럼, 요수나 요괴들 또한 뒷말을 좋아하는 놈들이 많았다. 거기서 퍼진 이야기는 곧 소문이 되어 다른 요수나 요괴들에게 퍼져 나갔는데 인간의 근거 없는 황색신문과는 다르게 꽤 정확했다. 다만, 그 정보라는 게 그들 사이에서 도는 은밀한 소문에 가까워서 동백은 존재만 알고 있었다.

“아신다니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세운동에 터를 잡으라고 선동하고 다니던 놈이 있었던 모양이더군요.”

“미친놈이네.”

동백이 이곳에 있는 한 세운동은 먹음직스러운 사냥터라도 쉬이 발을 들일 곳은 아니었다. 제정신 박힌 요수라면 ‘동백’이라는 이름 두 자에 침을 뱉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다들 그렇게 여겼죠. 미친놈이라고.”

“그런데 기어들어 왔잖아.”

“선인님도 보셨다시피 아직 어린놈이지 않았습니까. 사춘기라도 왔나 보죠.”

“이 새끼는 개도 아닌데 왜 자꾸 개소리를 하지?”

“왜요, 있을 법하지 않나요?”

사춘기를 겪는 요괴라니 동백은 헛웃음을 지었다. 세상이 말세라더니 이젠 별소리를 다 듣는다.

“헛소리하지 말고, 그 선동한 놈에 대한 정보는 더 없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고 합니다. 조만간 선인님이 거처를 비울 테니 그때가 기회라고 했다던 걸요. 그리고 뭐…결과는 보시다시피 선인님이 정말 이무기 때문에 자리를 비웠죠.”

“……내가 자리를 비운다는 걸 미리 알았다고?”

“그렇다더군요.”

그게 말이 되나?

아니 말이 되는 방법이 하나 있긴 했다.

동백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하나의 결론으로 생각이 모였다. 굳게 다물렸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차마 답을 알면서도 내놓지 못하는 동백을 지켜보던 까마귀는 덤덤하고 잔인하게 동백의 주저함을 박살 냈다.

“선경.”

“…….”

“맞죠?”

그래 맞다 이 새끼야.

자신도 똑같이 떠올리긴 했지만 밉살스러운 놈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는 꼴을 보니 속이 뒤집혔다. 심지어 저놈은 이 이야기를 듣고 먼저 알아차렸을 터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 말을 하며 어찌 반응할지 상상해 음흉하게 낄낄거렸겠지.

생각하니 더 열 받네?

동백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한 대 후려갈기면 속이 시원할 텐데, 자오는 영악하게 동백이 날뛸 수 없는 환경에서만 몸을 드러내고 깐죽거렸다. 들끓는 분노를 다스리려 크게 심호흡을 한 동백은 최대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일 수 있죠.”

동백의 말에 바로 반박한 자오는 심술궂게 제법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동백이 제 반박에 약간의 망설임이나 당혹감을 드러냈다면 흥이 식었을 텐데, 동백은 여전히 서늘한 낯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선경에서 지내는 인물이 나를 노릴 이유가 없어.”

“상대를 향한 악의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도 생긴답니다.”

“정말 한 마디도 안 지는구나?”

“전 진실만을 이야기했을 뿐인걸요?”

쉴 틈 없이 오간 설전은 누구도 승리의 깃발을 쟁취하지 못한 채 잠시 소강상태를 맞았다.

두 사람 모두 타당한 이유였다.

동백은 선경에서 그리 오래 지내지 않아 아는 신선들이 적었다. 따로 친분을 만들지도 않았으니 이제 와 자신을 노릴 이유를 찾지 못하였고.

자오는 아주 사소한 이유로도 누군가를 싫어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맞는 말이었다. 때로 가장 지독한 악의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이유로 이뤄지기도 하니까.

“아직 확실하진 않아.”

“그러나, 배제할 수도 없지요.”

부정하는 자와 의심하는 자.

수사팀이라면 썩 잘 어울릴 조합이었다. 생각이 다르니 각기 다른 방향으로 정답으로 향하는 길을 어떻게든 찾아낼 테지만, 그거야 정상적인 수사팀의 일이고.

“네놈은 이미 확신하고 있는 거 아니냐.”

“선인님이야말로 믿고 싶지 않으신 것 아닙니까?”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펼치며 한껏 으르렁댔다. 좁혀지지 않을 간극을 유지한 채 서로를 조용히 바라보던 그들은 끝나지 않을 말싸움을 이어가는 대신 살아온 경험에서 우러난 냉정함을 빠르게 되찾았다.

“이건 조사하다 보면 알게 되는 거니까 일단은 보류하자.”

“좋습니다.”

자오 또한 흔쾌히 동백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아직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시험지를 뒤로 밀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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