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그것 말곤 없었어?”
“선동꾼에 대한 다른 말은 딱히 없었습니다. 있어봤자 정신 나간 어린 어둑서니에 관한 이야기일까요. 죽으려고 환장을 했다. 신종 자살법이다. 등등, 그 아해에 대한 말은 많지요.”
결국, 동백이 자오와의 대화에서 얻은 거라곤 누군가 동백이나 동백이 지키고 있는 이 세운동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과 선경에 대한 의심뿐이었다.
찝찝하게.
동백은 팔짱을 낀 채 고심했다. 어둑서니를 처리하고 옛 오호의 영토에 있는 도화 박물관이라는 곳을 갈 생각이었는데 이러면 세운동을 비우기가 여간 찝찝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생기면?
그는 저도 모르게 이호영의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힐긋 눈을 굴렸다. 작다면 아주 작은 반응이었으나 자오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고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선인님,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제게도 고민을 나눠 주시면 해결이 쉬울 겁니다. 우린 지금 한배를 탔으니까요.”
“내가 너랑?”
동백은 차례로 자신과 자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되물었다. 지금 자신이 들은 게 정녕 맞는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오는 동백의 맹렬한 부정에도 되려 태평하게 “아닌가요?”라고 물으며 덧붙였다.
“전 선인님의 호구잖아요. 어차피 써먹는 거 유용하게 써먹으셔야죠.”
그야 그렇지만….
겉도 속도 까만 놈이라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 도통 감이 안 잡힌단 말이지.
의심을 담은 채 가느스름하게 뜨인 동백의 눈초리에 자오는 자신의 무해함을 최대한 어필하며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재수 없으니까. 눈 바로 떠라.”
“후후….”
동백의 핀잔에 자오는 약간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점잖은 얼굴로 자세를 바로 했다. 저 빌어먹을 까마귀는 행동이 깃털같이 가벼우면서도 지내온 세월은 동백만큼 무거웠다.
그러니 자오가 목적을 위해 자존심일랑 내려놓고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알랑거려도 날카로운 발톱은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
“고민할 것 없이 선인님은 딱 한 마디만 하면 됩니다.”
편안함과 익숙함이 동백을 좀먹길 바라며 자오는 달콤하고 감미롭게 속삭였다.
「제게 도와달라고 하세요.」
술법이 섞인 요사스럽고 사특한 기운을 듬뿍 품은 목소리가 공기를 진동시키며 울렸다. 동백이 아닌 이가 들었다면 탐욕스러운 지배자 아래 무릎을 꿇고 도와달라 애걸할 매혹적인 목소리였다.
“사람 좀 많이 홀려 봤나 봐?”
“지금 가장 홀리고 싶은 상대는 멀쩡하네요.”
수많은 사람을 홀려 파멸로 내몬 탐욕적인 지배자는 시린 겨울에 피어난 동백을 탐닉하듯 느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 여유롭고 권태로운 미소 속엔 손을 뻗어 가지를 꺾고 싶어 하는 갈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지금껏 원했던 모든 것을 손쉽게 손에 쥐었던 짐승은 제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을 퍽 흥미로워하면서도 짜증 나 하고 있었다. 그 기색을 읽어낸 동백은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끌어올리며 가볍게 코웃음 쳤다.
홀리고 싶다니.
자신을?
웃기지도 않지.
동백은 자오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외양으론 흠잡을 곳 없는 사내였다.
약간 날카로운 눈매와 자신과 다르게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듯 올라간 입꼬리, 조금 까무잡잡한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엉킨 곳 하나 없는 결 좋은 머리카락과 다부진 턱선, 높고 반듯한 콧날. 굳은살 하나 없는 긴 손가락과 다른 이보다 머리 하나는 훌쩍 더 큰 키.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거죽이었다.
객관적으로 미적으로 뛰어난 외모인 건 맞지만, 동백의 사심 가득한 주관적인 관점에서 자오는 일단 요수라는 점에서 모든 점수를 죄다 깎아 먹고 시작했다.
그러니 동백의 평가는.
“못생겼어.”
“…….”
“못생겨서 홀릴 기분도 안 들어.”
참혹한 평가를 한 동백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작은 창으로 이제 막 떠오른 여명의 빛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니 내 환심을 사고 싶으면….”
달칵-
아주 작은 소음에 동백이 말을 멈췄다. 항상 이른 시간에 고시원을 나서는 남자가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는 공용 공간에 이르러 동백과 자오를 발견하곤 조용히 눈인사를 건네고 고시원을 빠져나갔다.
아주 잠시 내려앉은 침묵이었으나 동백은 머리 한구석에 반짝이는 생각을 떠올렸다.
원래 말을 하다 멈추는 게 제일 짜증 나는 법이다.
동백은 자오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호기심과 약간의 기대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동백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치솟았다.
“이제 좀 쉬러 가야겠다.”
“……예?”
자오의 크게 뜨인 눈이 동백에게 이리 물었다.
‘환심을 사는 법은요?’
그에 대한 답을 주지 않은 채 동백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선인님?”
등 뒤로 자오의 부름이 들렸으나 그는 돌아보지 않고 방문을 열고 쏙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겨진 자오는 잠시 멍하게 자리를 지키다 묘하게 밀려오는 짜증스러움에 미간을 모았다.
별것 아닌 말이었을 것이다. 그가 그간 파악한 동백의 성격으론 험한 말이 돌아올지도 몰랐다. 자오는 찝찝함과 손끝이 달싹이는 조급함, 답답함을 느꼈다.
이걸 동백이 의도한 거라면 자신이 한 방 먹은 것이리라.
“하….”
짧은 탄식은 곧 작은 웃음소리로 변했다. 밝아오는 이른 새벽 홀로 앉아있던 사내는 동백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천천히 검은 연기로 사라졌다.
지금 자오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환심을 사기 위해선 동백의 앞에 어둑서니를 데려다 놓아야 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
그림자 속의 그림자. 어두운 곳에서도 가장 어두운 곳에 웅크린 작은 그림자는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커다란 눈엔 눈물방울이 맺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아직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는 어둑서니는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납작 엎드려 있었다. 조금이라도 기척을 내면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얀 신선이 달려와서 자신을 단칼에 죽일 것만 같았다.
물론 자신이 물리적인 공격에 죽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훌쩍.”
태어난 지 이제 200년.
다른 요수와 요괴들의 등쌀에 제대로 성장도 못 해 억울한데 이대로 죽는다니.
그놈의 말에 넘어가지 말걸.
뒤늦은 후회는 돌이킬 수 없고 결국 선택은 자신이 했으니 결과 또한 저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었다. 외모는 어리다 해도 그 또한 200년을 살아온 요괴니 앞으로 자신이 어찌 될진 잘 알았다.
죽겠지.
듣기에 혈화라 불리는 신선은 자비가 없다고 했다. 냉혹하고 차가워 겨울에 피어나는 꽃 중 가장 끔찍하고 아름다운 꽃이라던가. 그를 마주한 요수 중 살아남은 자는 없고 심지어 과거 선경에 오르기 전엔 홀로 수천의 요수를 베어 죽였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요수보다 피 냄새가 짙은 자가 어찌 가장 고결하다 일컫는 선경에 오를 수 있었는지 다들 의문을 가졌지만, 자오도 선경에 올랐다는 점에서 다들 그냥 강하면 선경에 가는 거냐고 쑥덕거리기도 했다.
그런 자가 신선이라니.
게다가 그 괴물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니!
어둑서니는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욕심부리지 말고 그자가 돌아온 걸 확인했을 때 도망쳤어야 했는데. 딱 한탕만 더 하자는 욕심이 모든 걸 그르쳤다. 삼십 년 전 동백에게 잡혀 죽은 망량(罔兩)을 비웃었는데 이젠 자신이 그 꼴이었다.
심지어 그 괴물 옆에 다른 괴물이 붙어 있는 걸 봤으니 꼼짝없이 죽을 날을 기다리는 처지였다.
까마귀 놈이 왜 그 신선 옆에 붙어 있는진 몰라도 요수들 사이에서도 악평이 자자한 자오니 그가 자신을 찾고자 한다면 못 찾을 것도 없었다.
다른 요괴나 요수들의 눈에 띄면 더 빨리 들킬까 두려워 세운동을 벗어나지도 못한 채 낡은 아파트의 지하에 숨어 있던 어둑서니는 저 멀리서부터 들리는 작은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인간들이 이곳을 찾을 땐 으레 불량스럽고 저질스러운 욕설과 함께 끔찍한 폭력이 뒤따르곤 했다.
이번에도 그런 걸까.
제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호기심에 꾸물꾸물 어둠 속을 기어 빛 앞으로 나아갔던 어둑서니는 마침내 지하로 들어온 이들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몇 번 모습을 본 적 있던 자오가 낡은 아파트의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그 뒤를 겨울에 내리는 흰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사내가 뚱한 얼굴로 따랐다.
어둑서니는 눈물이 맺혔던 눈을 부릅떴다. 인간이었다면 실금을 해도 수백 번을 했을지 모른다. 어둠 그 자체이기도 한 자신을 대체 어떻게 찾은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진짜 이런 곳에 있다고?”
“저기 있네요.”
자오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정확히 어둑서니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동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만 눈동자가 확실히 저를 응시하는 것에 어둑서니는 결국 감당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며 까무러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