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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21화 (22/61)

21화

새의 발톱을 본떠 만든 투갑(套鉀)을 낀 커다란 손이 어둠 속에서 어둑서니를 거침없이 끌어냈다. 본디 어둑서니는 정확한 형태가 없는 어둠에서 탄생한 요괴이나 자오의 손에 붙잡혀 나온 형태는 그들이 보았던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두 눈을 까뒤집은 채 기절한 모습은 제법 가련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를 동정해 줄 이는 지금 이곳에 없었다.

“진짜 잡았네.”

동백은 어둑서니의 한쪽 발목을 짐짝처럼 든 자오를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새벽에 다시 자취를 감추기에 한 일주일은 얼굴을 안 비출 줄 알았더니, 자오는 그날 점심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호영이 사준 삼각김밥 포장을 막 벗겼을 무렵이었다.

‘제게 선인님의 환심을 살 기회를 주시겠어요?’

저 잘난 줄은 알아서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웃음이 간드러졌다. 사실은 여우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잘못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얄망궂은 놈이라고 속으로 욕하며 동백은 자오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이곳이었다.

세운동 외각에 위치한 낡은 아파트는 지어진 지 약 사십 년 정도 된 곳이었다. 워낙 낡고 오래되어 금이 간 외벽은 곳곳이 떨어져 있었고 붉게 녹이 슨 철근이 빼꼼히 고개를 내민 곳도 많았다.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모를 지하로 내려가는 좁은 돌계단은 두 사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잘게 부스러졌다.

작은 창문을 통해 겨우 스며든 빛 아래로는 수많은 먼지가 부유했고 오랜 시간 쌓인 쓰레기와 오물은 케케묵은 악취를 풍겼다.

음산한 느낌마저 감돌아 보통 사람들은 드나들지 않을 텐데, 그나마 깨끗한 술병과 꽁초들이 나뒹구는 걸 보면 어떤 용도로 이용되었는지 눈치가 없어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동백은 바닥에 드문드문 떨어진 붉은 흔적을 눈으로 훑었다.

이보다 더한 참상을 겪고 두 눈에 담았던 남자는 무심하게 그 흔적을 지나쳤다.

“이런 곳에 있는데 용케 찾았네.”

“다 방법이 있죠.”

자오가 보란 듯 어둑서니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꽤 격한 움직임이었는데도 전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어둑서니를 동백은 손가락으로 쿡 찔러보았다.

발목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자오와 손과 다르게 동백의 손가락은 허공을 찌른 듯 허무하게 어둑서니를 통과했다.

본디 물리적인 실체가 없는 요괴이니 자오와 같이 갓 잡은 생선처럼 들고 있는 게 아니라 이게 당연한 모습이었다.

대체 어떤 술수를 부리고 있는 건지.

확실히 술법의 사용이나 응용에 대해선 자오를 따라갈 수 없음을 동백은 인정했다. 어둑서니도 자오가 아니었다면 한 달이 넘도록 찾아 헤맸을 것이다. 일이 이리도 쉽게 해결되자 동백은 묘하게 자존심에 금이 갔다.

그래, 내가 못 하는 게 아니다.

조금 오래 걸릴 뿐이지.

“그래서 이놈은 어찌 처리할까요?”

자오의 질문에 동백은 기절한 어둑서니를 한 줌의 동정도 깃들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며 답했다.

“죽여야지.”

한 번 자비를 보이면 다음에도 같은 자비를 바라고 덤벼드는 놈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 요수 놈들은 언제 뒤통수칠지 몰라 동백은 이제껏 자신과 마주친 요수를 단 한 놈도 살려두지 않았다.

최초가 있다면.

동백의 시선이 잠시 어둑서니가 아닌 자오에게 닿았다.

저놈 정도일까.

그 시선을 느낀 자오가 미소로 화답했으나, 동백은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웃음도 헤프고 뭐 하나 맘에 드는 구석이 전혀 없는 놈이다.

“제가 죽일까요? 굳이 선인님의 손에 피를 묻힐 이유도 없고.”

금방이라도 여린 목을 꺾어 버릴 듯 자오는 손을 뻗었다. 무슨 재질인지 모를 검은 투갑은 묵직한 예기를 발하며 섬뜩하고 날카로운 끝을 번뜩였다. 동백이 고개만 끄덕인다면 저 날카로운 발톱은 기절한 어둑서니의 목덜미를 단번에 꿰뚫을 터였다.

그러나 동백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당장 죽이진 않고 몇 가지 묻고 죽여야지.”

자오가 말한 선동꾼에 대해 동백은 아는 게 없었다. 선동꾼의 말에 겁 없이 동백의 터를 침입한 놈이니 뭔가 아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아는 게 없더라도 몇 마디 대화나 작은 단서라도 주어진다면 그것으로도 좋았다.

“그러려면 이놈이 깨어나야 하는데 일어날 기미가 전혀 없네. 여기서 더 기다리긴 싫은데.”

희미한 빛에 반짝이며 부유하는 먼지만 봐도 벌써 폐에 먼지가 가득 낀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악취는 또 어떤가. 요 몇 년 편하게 살았다고 고작 이 정도 악취에 슬슬 코가 아려왔다.

“그럼 장소를 좀 옮겨서 기다릴까요? 제가 괜찮을 곳을 압니다.”

“흠….”

어차피 자오의 도움을 실컷 받았는데 이제 와서 발을 빼는 것도 우스웠다.

이용할 수 있다면 기꺼이 이용하여야지. 게다가 놈이 먼저 환심을 살 기회를 달라고 하지 않았나. 그럼 원하는 대로 해줘야 맞는 게 아니겠는가.

“좋아.”

흔쾌히 떨어진 동백의 허락에 자오는 어린아이 모습의 어둑서니를 양손으로 꾹꾹 둥글게 뭉치기 시작했다.

듣기엔 괴기해 보이나 본디 어둠 그 자체인 어둑서니는 술법이 섞인 손길에 아주 작은 검은 구슬이 되어 그의 품속으로 쏙 사라졌다.

“그럼 가실까요?”

빠앙―!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클랙슨 소리가 요란했다. 쏜살같이 지나간 차의 뒤꽁무니를 향해 동백이 짧게 혀를 찼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 나라를 대표하는 도시는 번잡스럽기 그지없었다. 널찍한 대로를 따라 달리는 자동차들은 끝없이 이어지고 사람들 또한 셀 수 없이 많았다. 동백은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J.O

자오의 회사는 인간의 기준으로도 요수의 기준으로도 참으로 절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금싸라기 땅이라고 하던가.

인간의 기준에서 좋은 땅이란 교통이 원활하며 자녀를 교육하기 좋고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일 것이다.

그것처럼 요수나 요괴도 그들만의 기준이 있었다. 인간들의 부정적인 감정으로 만들어지는 사기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곳. 모든 요수나 요괴들이 선점하고 싶어 안달 난 곳.

동백이 자리 잡은 세운동도 그중 하나이고 자오의 회사가 자리 잡은 지역도 비슷했다.

사기가 만들어지는 이유는 각기 다르겠지만 말이다.

자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미리 연락을 받았던 이명현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밤에 보았을 때와 달리 단정하게 빗어 포마드로 고정한 머리와 정장은 그를 좀 더 지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었고, 퍽 잘 어울렸다. 이명현은 여전히 조금은 불량스러운 눈빛으로 자오에게 투덜거렸다.

“갑자기 연락하셔서 뜬금없이 녹음실을 쓰신다고 하면 제가 뭐가 됩니까. 예약된 일정도 많은데.”

오늘 취소된 일정만 5개가 넘는다며 이명현은 동백이 처음 듣는 가수 이름과 그룹명처럼 들리는 이름 몇 개를 입에 올렸다.

“다른 녹음실에 우선순위로 올려주도록 해요. 그럼 불만을 품진 않겠죠.”

“벌써 그렇게 했습니다.”

“누가 쓰는 건지 묻진 않던가요?”

“당연히 묻죠. 알아서 잘 둘러댔습니다.”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이 할 일을 완벽하게 끝내 둔 이명현은 자오의 명령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같이 있는 동백을 발견하곤 ‘또 초자연적인 일이겠군’ 이란 체념을 얼굴에 한가득 담을 뿐이었다. 그는 온갖 욕을 먹어가며 확보한 녹음실로 두 사람을 안내한 후 냉큼 발을 뺐다.

최신식 설비가 가득한 녹음실을 잠시 신기한 눈길로 살피던 동백은 자오가 품에서 까만 구슬을 꺼내자 뒤늦게 의아한 듯 물었다.

“고작 몇 가지 궁금한 걸 묻는 건데, 녹음실은 왜 온 거야?”

“그러니까 온 거죠.”

“……?”

“……?”

순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아주 잠시 침묵이 감돌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얘가 아는 것도 얼마 없을 텐데 녹음을 하겠다고?”

“이놈이 순순히 말하리란 보장이 없으니 완벽하게 방음이 되는 시설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동백과 자오의 시선이 다시금 얽혔다. 약간의 당혹과 서로를 향한 작은 깨달음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너 생각보다 더 과격한 놈이구나?”

“요수니까요.”

자오는 검은 구슬을 사정없이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대로 바닥으로 처박힐 줄 알았던 구슬은 바닥에 닿기 전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허공에 둥둥 뜬 채 안절부절 허공을 맴돌던 어둑서니는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자 냉큼 모습을 바꾸어 동백의 앞에 넙죽 엎드렸다.

“아이고 신선님!”

정수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어둑서니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무고함을 고해바쳤다.

“저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이게 다 저를 꼬드긴 그 나쁜 놈 때문이라고요! 그 모옷~된 놈이 제게 와서 선인님이 자리를 비울 때를 알려주면서 달콤한 말로 현혹을 했지 뭡니까!”

“그래? 그놈이 뭐라고 했는데.”

“정확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혈화가 곧 세운동을 비우니 그사이 네가 터를 잡으면 혈화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죠.”

중간중간 연기까지 곁들여 가며 열성적으로 자신의 무죄를 외치던 어둑서니는 동백이 흥미를 보이자 살아남기 위해 그가 묻지 않은 말까지도 줄줄 내뱉었다.

“그래서 제가 왜 어쩔 수 없냐고 물으니 그자가 ‘혈화는 술법을 잘하지 못하니 널 잡을 수 없다.’라고 했었습니다.”

“그것참 흥미로운 말이네요. ‘혈화는 술법을 잘하지 못한다.’라”

자오가 어둑서니의 말을 읊으며 동백을 살폈다.

‘확실히 선인님이 술법을 잘 하진 않지.’

어둑서니의 술법을 풀 때만 봐도 꽤 무식한 방법을 쓰지 않았었나. 자오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치솟았다.

“아무래도 제가 먼저 선승을 올린 듯합니다만?”

“…젠장.”

동백은 지끈거리는 머리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발끝을 툭툭 굴렀다. 자오의 깐죽거림이 열 받는데 딱히 반박할 수 없어 더 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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