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23화 (24/61)

23화

“한때? 등선 후에 말입니까?”

은근히 과거를 캐묻는 자오의 말에 동백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이 몹쓸 까마귀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존심 따위는 죄다 버리고 바닥에 납작 엎드리면서도 기회를 잡으면 또 슬슬 기어올랐다.

“또 내가 궁금한 모양이네.”

동백의 핀잔에 자오가 천연하게 대꾸했다.

“저야 언제나 선인님이 궁금한걸요.”

“그럼 질문권을 써서 물어. 그러려고 얻어간 거잖아?”

“더 궁금한 게 생기면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보다 여기까지 오셨으니 제 사무실이라도 구경하시겠어요?”

자오의 제안에 동백이 녹음실을 나서며 “내가 왜?”라고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이대로 고시원으로 돌아가 쉬다가 태상에게 받은 금을 돈으로 바꾼 후 도화 박물관으로 갈 생각이었다. 쓸데없는 곳에 기력을 낭비하지 않을 생각인 동백의 뒤를 자오가 느긋한 걸음으로 뒤따르며 조잘댔다.

“제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응, 전혀.”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병법을 읊으며 자오가 봉황의 꽁지깃을 닮은 긴 눈꼬리를 휘었다.

“나중에 절 솥에 넣으려면 궁금해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랐던 동백은 자오의 말에 그를 잠시 바라보다 어디 마음대로 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매번 느끼는 건데, 네놈은 참 혀가 매끄러워.”

“칭찬 감사합니다.”

자오는 품에서 작고 검은 카드 하나를 꺼내 엘리베이터 보안 패널에 가져다 대고 최상층을 눌렀다. 착실하게 명령을 이행하는 엘리베이터는 건물의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두 사람을 토해놓곤 소리도 없이 다시금 제 할 일을 하러 떠났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선 동백은 머리카락을 흔드는 바람을 느끼고 코끝을 스치는 짙은 벽도화 향기를 맡았다. 자오가 어떤 술수를 부린 건지 분명 건물 안에 있었건만 동백이 도착한 곳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였다.

이곳은….

동백이 옆에 선 자오를 힐끔 쳐다보았다.

이놈의 영역이로구나.

평야에는 저 멀리 거대한 정전(正殿) 한 채가 우뚝 솟아 있었는데, 지붕엔 검은 기와를 얹고 처마에는 새를 닮은 잡상(雜像)이 올려져 있었다. 정전까지 이어진 길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졌으며 길이 아닌 곳은 하얀 대리석이 깔려 티 한 점 없이 밝게 빛났다.

적진 한복판에 들어오게 된 신선은 찬찬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높은 담 너머 벽도화가 군락을 이루고 건물 주변을 휘도는 물길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돌로 만들어진 다리는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이곳은 지나치게 화려하고 사치스러웠으나 텅텅 비어 있었고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공간은 적막했다.

공허한 세상을 지배하는 제왕은 그곳을 홀로 나아갔다.

등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그의 긴 옷자락이 바람에 흩날리자 마치 날개를 펼친 듯 너울거렸다. 자오는 정전 앞 다리 위에 멈춰 서서 동백을 돌아보았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은은한 향기가 섞인 따스한 바람이 옅은 분홍빛을 띠는 복사꽃 꽃잎을 휘감으며 몰아쳤다. 마치 선경의 한 귀퉁이를 툭 잘라다 가져다 놓은 모양새였다.

동백은 눈앞으로 날아든 꽃잎을 가볍게 쥐었다. 그가 잠시 선경에 머물렀을 때, 그곳엔 아무런 근심·걱정도 존재하지 않았었다. 흔히 사람들이 꿈꾸고 바라는 무릉도원이 바로 그곳이었으니.

시간은 격렬한 유수같이 흐르고 세월은 그 위에 띄워진 배처럼 휘말렸다. 세찬 흐름에 순응해 모든 걸 다 잊었으면 좋았을 것을. 동백은 1년도 지나지 않아 상제에게 달려가 간청했다.

‘제 마음속의 번뇌가 가득하여 더는 버티지 못하겠나이다.’

그리하여 동백은 다시 인계로 내려와 요수를 사냥했다. 상제는 파격적으로 동백에게 신선이 갖는 모든 굴레를 벗겨 주었다. 그는 유일하게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웠지만, 스스로 멍에를 쓴 체 여전히 땅 위에 있었다.

그런 선경의 모양새를 딴 이곳이 아름답냐 물으면 동백은 그저 이리 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단호한 대답 뒤에 그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네 술법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주려던 거라면 성공했어.”

이제 보니 태상이 예측한 1할 5리의 승률도 꽤 후하게 쳐준 셈 아니던가. 자오는 선경에 처박혀 세월이 흘렀는지도 모르고 살아갈 신선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적어도 술법으로 이 정도의 영역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자는 신선이나 요괴, 요수를 통틀어 손꼽힐 테니.

자오는 드문 동백의 긍정적인 답에 은근슬쩍 아까 마무리 짓지 못한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내두었다.

“그럼 군사(軍師)의 자리도 합당하겠군요.”

“어디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술법과 병법이 어디 같냐.”

“술법에 필요한 조언을 해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술법을 잘 못 하는 거지 모르진 않거든. 그러니 너는 군사(軍士)다.”

동백은 제 얼굴마저 비칠 정도로 매끄럽고 반들반들한 오석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꽃이 만발하였으나 나비나 벌이 날지 않는 정원이 흐드러졌다. 그가 나란히 옆에 서자 자오는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다른 사람의 발길을 오랜 시간 동안 허용하지 않은 까마귀의 지밀(至密)은 오랜만의 방문객을 반기듯 제 위용을 뽐냈다.

처마 아래 단청은 황금으로 칠해져 반짝였고 무늬는 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듯 유려하고 우아했다. 또한, 정전에는 현판 하나가 걸려 있었는데 오정전(烏正殿)이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쓰여있었다.

한가지 재능이 너무 뛰어나면 다른 재능이 없기 마련이라더니.

까마귀는 술법을 잘 부리는 대신 이름 짓는 능력은 가뭄에 메마른 논바닥만큼 바짝 메마른 모양이었다.

“궐(闕)은 아름다운데, 그 이름이 다 망쳤어.”

“제가 일을 하는 곳이니 딱 어울리는 이름이지요.”

까마귀가 정무를 보는 궁이라 하면 제법 어울리기도 하나 동백은 궐문 없이 개방된 입구로 들어가며 트집을 잡았다.

“게다가 정전이라니, 네놈이 왕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적어도 이곳에선 그렇지 않겠습니까. 제가 대표이사인걸요.”

동백은 오정전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기둥이 높은 천장을 지탱한 공간의 끝엔 어좌 하나가 덩그러니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식으로 만든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동백의 발길이 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가까이서 보니 더 가관인 것이 책상 위에는 업무용 노트북과 대체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지 모르겠는 전화기 그리고 자오의 다른 이름인 ‘한아’가 새겨진 명패가 놓여 있었다.

“하.”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도 안 나온다더니.

어좌에 오른 동백은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며 아래 있는 자오를 굽어보았다.

“여기도 좀 그럴듯하게 꾸며두지 그랬어?”

“제가 상소문을 받았다면 그리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요즘 인간들은 이메일로 일을 해서요.”

자오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둘러댔다. 그때 자오의 책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전화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그는 항상 있던 일인 듯 어좌로 올라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입니까?”

자신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는 게 퍽 익숙한지 이명현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녹음실에서 슬슬 나오셨을 것 같아서 연락드려 봤습니다. 혹시 제가 녹음실을 청소해야 하면 다음 예약 전까지 치워 두려고요.]

동백은 이명현의 말에서 이런 일이 몇 번 더 있었음을 짐작했다. 어쩐지 녹음실에 오는 걸 당연히 여기더라니, 좋은 방음 시설을 영 좋지 못한 곳에 사용한 전적이 많은 모양이었다.

“이번엔 깨끗하게 이용했으니 따로 청소할 필욘 없을 겁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다음엔 꼭 미리 말씀을 해주시든가 아니면 새로 방음이 되는 부스를 만드세요. 돈도 많으신 분이.]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풀풀 풍긴 이명현이 인사 없이 전화를 먼저 끊어버렸다. 자오는 통화가 끊긴 수화기를 내려두며 다분히 의도적인 몸짓으로 눈가를 소매로 찍었다. 딴엔 불쌍한 척을 한 것이겠지만 동백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볼 건 다 본 것 같으니 이제 슬슬 돌아갈 생각이었다. 선경을 본떠 만든 풍경은 동백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이곳의 주인 또한 동백이 이곳에 더 머물러야 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에겐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박물관에 들른 다음엔 아주 오랜만에 친우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자오는 그런 동백을 굳이 붙들지 않았다. 그가 이곳에 머물지 않는다면 자신이 그의 뒤를 따르면 되는 일이니까.

오정전을 나서는 동백의 곁에 선 자오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그가 곁에 있어도 동백은 더는 날카롭게 날을 세우지 않았다. 여전히 말은 툭툭대긴 해도 바로 검을 뽑아 들지 않는다는 건 꽤 대단한 관계의 진전이었다.

비록 필요에 의한 관계라도 그건 자신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이다음은 어디로 가십니까?”

좋은 소리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자오는 동백에게 살갑게 말을 걸며 다시 한 걸음 다가섰다.

한쪽 팔을 쭉 뻗으면 겨우 닿을 간격.

가까우면서도 먼 그들의 거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