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24화 (25/61)

24화

三. 하늘에 오른 총아

굽이치는 산맥과 거친 대지, 다섯의 호랑이가 사납게 포효했던 땅. 옛 오호의 땅은 동백이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거친 산세엔 아스팔트 도로가 깔렸고 언젠가 동백이 말을 달렸던 능선을 따라 커다란 철제 전기 탑이 세워져 있었다.

동백은 그것들을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다 손에 든 책을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전국지도> 라 쓰여 있는 책은 모서리가 닳고 세월의 흐름을 맞아 표지의 잉크가 바래 파랗게 변해 있었다. 출발 전 동백이 굳이 고시원에 들러 챙긴 책이었다.

이젠 핸드폰에 지도를 띄워 살피는 게 더 쉬워진 자오는 아주 오랜만에 보는 책의 등장에 살짝 눈을 크게 떴으나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들이 옛 오호의 땅에 도착한 것은 약 3시간 전이었다.

자오는 아주 손쉽게 동백이 찾는 목적지를 찾을 수 있음에도 나서지 않았다. 동백은 그에게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고 그는 그저 그런 동백을 마음대로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도움이라는 것은 때와 장소를 잘 맞춰야 하는 법.

사실 이곳에 오기 전, 동백은 금을 돈으로 바꾼 후 자오를 떼어놓으려 했었기에 더 조심스러웠다. 자오는 신경 거슬리지 않게 조용조용 기척을 죽이며 골몰한 동백의 옆얼굴을 관찰했다.

지금껏 몇 번이나 보았기 때문일까.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났다. 굳이 동백의 외모를 따져보자면 남자답게 잘생겼다기보단 섬세하고 선이 가는 미인의 느낌이 더 강했다. 항상 찌푸리거나 비웃거나 시큰둥한 얼굴을 한 탓에 그 미모가 약간 빛이 바랜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활짝 웃으면 정말 예쁠 것 같은데.’

하지만 자신이 그러한 미소를 과연 동백에게서 볼 수 있을까. 차라리 모든 거래가 끝나고 강제로 울리는 게 훨씬 빠를지도 몰랐다. 눈가를 붉게 물들인 채 오열하여도 웃는 것만큼 예쁠 것이다.

어찌하면 울릴 수 있을까. 웃는 것보단 쉬울 것 같다 하여도 이것 또한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다.

“…야.”

“…….”

방법이야 다양하게 있으니 모두 시도해 보면 될 테고.

“망할 까마귀야 부르잖아! 안 들려?”

“아!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자오는 동백의 싸늘한 눈초리에 습관적으로 얼굴 위로 웃음을 띠었다.

“길을 찾으셨나요?”

“찾았어.”

그럼 가지 않고 무얼 하냐는 무언의 재촉에 동백은 책자를 탁! 소리가 나게 접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쫓아 올 생각이야?”

동백은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금방이라도 칼을 뽑아 들 것 같은 기세에 자오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쉽지만 여기까지 따라왔으니 만족해야 할 성싶었다.

“그럼 근처에서 기다릴 테니 다녀오십시오.”

의외로 자오가 순순히 물러서자 동백은 검파에 얹었던 손을 물렸다. 하지만 여전히 미심쩍음을 지우지 못한 채 길을 따라 걷다가도 자꾸만 뒤를 휙휙 돌아보며 자오를 확인했다.

그런 동백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자오는 팔을 들어 근처의 작은 참새 한 마리를 불러들였다. 동백은 그가 까마귀만 다룬다 생각할 테니 이리 작은 새 정도는 신경 쓰지 않으리라.

「쫓아라.」

자오의 명령에 그의 손가락에 앉았던 참새가 다시금 포르르 날아올랐다.

찰거머리 같은 놈.

정비된 언덕을 오르며 동백은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자오의 기척은 그대로였다. 미동도 없이 흔들리지 않는 기척을 느끼며 동백은 다시금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

여기까지 오기 전에 떼어두려 했는데, 도저히 말로는 떼어둘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검을 뽑자니 빌어먹을 까마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약간의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그게 어찌나 얄밉던지.

진짜 죽여버리고 싶었지….

상대가 눈앞에 있다면 온 힘을 다해 후려칠 듯 주먹을 쥐었던 동백은 언덕 위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을 확인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여기서부터는 더 고집부리지 않아서 다행인데.

상대는 자오였다. 동백과 비슷한 세월을 묵은 까마귀 요수이며 현재 가장 강한 힘을 지닌 존재. 게다가 정보전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지금 이 순간도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 몰랐다.

다행인 점은 박물관이라는 곳은 여러 물건이 모여있는 곳이라 하나의 물건을 특정하긴 어렵단 점이었다.

대신 동백 또한 무언가를 찾는 기색을 보이거나 한 물건을 오래 들여다보아선 안 되었다.

아예 특정할 수 없게 해야 해.

‘OPEN’이라 적힌 팻말이 걸린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온 동백은 자연스럽게 팸플릿을 집었다. 도화 박물관은 사립박물관인데도 별도의 입장료를 받고 있지 않기에 몇몇 사람들이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인 동백은 팸플릿을 펼쳐보았다.

<사라진 시대의 기록>

가장 앞에 커다랗게 쓰인 전시 제목을 훑은 그는 신선골에 대한 내용이 팸플릿에 적혀 있는지 먼저 확인했다.

없나?

쓰여 있는 것이라곤 구구절절한 역사 이야기 정도였다. 그것을 마른 눈으로 읽어 내려가던 동백은 한 구절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맴돌았다.

/<우영과 오호의 전쟁은 10년이나 이어졌다. 하지만 그 전쟁의 끝은 지독한 가뭄이었다. 이로 인해 우영과 오호의 인구 절반 이상이 사망하였다.>(이텔릭체)/

고통과 분노, 슬픔이 섞이지 않은 담담한 문장은 그저 있었던 일을 나열하는 것에 불과했다. 심지어 이 안내는 동백의 치열했던 삶을 조금도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기록이 남아 있었다 한들 믿었을까.

아니, 아니다.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옛사람들의 상상력으로 치부하고 그쳤겠지. 지금도 그렇지 않나.

동백은 전시관 입구로 들어가며 쓰게 웃었다. 그리 치열하게 살아남았건만, 역사에는 단 한 줄의 기록으로 그쳤다는 게 우스웠다.

사방이 은은한 불빛과 적당한 온도, 투명한 유리 벽으로 세워진 박물관은 고요했다. 발걸음 소리만 울리는 공간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교차하여 흘렀다.

그는 그 공간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녹이 슬어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검과 갑옷들은 우영의 것과 오호의 것이 잘 구분되어 진열돼 있었다. 그 시대에 쓰였던 화폐와 각종 장신구는 정교한 세공이 돋보였다.

그것들을 가볍게 둘러보며 돌이켜보니 그 당시 머리 장신구나 허리춤에 달고 다니던 노리개가 사치스럽긴 했었다.

무심한 듯 또는 관심 있는 듯 적당한 시간을 들여 나열된 물건을 둘러보던 동백은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목표물을 발견하고 떨리는 손끝을 숨기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급함과 초조함은 모든 것을 망치기 십상이니, 침착해.

전쟁에 나서기 전 자신을 다독이듯 마음속으로 읊은 동백은 그렇게 천천히 밝은 불빛이 내리쬐어지고 있는 진열장으로 향했다. 심장이 크게 날뛰며 귀에서 쿵쿵거리는 울림이 울렸다. 손끝이 떨리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단내가 흘러나왔다.

“말도 안 되는 걸 진열해 놨네. 신선골이라는 게 진짜 존재했을 리가 없잖아.”

“왜? 있을 수도 있지.”

신선골이 진열된 진열장을 구경하던 두 남성이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아마 동백이 애써 숨기려 했다 해도 자오는 영민한 자이니 바로 알아차릴지도 몰랐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신선골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걸 그냥 넘기진 않을 테니.

하지만 쉬이 답을 주는 건 그냥 패배를 시인하는 것 같지 않나.

그릇에 받쳐진 푸른빛이 도는 알갱이들은 언 듯 보면 작은 보석을 닮아 있었다. 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지만, 보석으로서의 가치는 없을 것들이었다.

동백은 그 그릇 아래 쓰인 문구를 찬찬히 읽었다.

<이름 없는 일기의 기록에서 발췌 ―

그것은 상처에서 흰 기름이 흘렀다. 먹고 마시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나 그것의 외양은 익히 알고 있는 존재였으며 말과 행동 또한 그러했다. 우리는 그것을 신선골(神仙骨)이라 불렀다.>

신선골은 두 가지 방법으로 만들어진다.

하나는 육체의 주인이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르는 것, 다른 하나는 시해(尸解)의 술법을 사용하여 만드는 것.

과연 이 신선골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오랜 세월을 살면 무엇이든 다 알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차가운 유리 너머 불에 타고 남은 잔해들은 동백이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비추는 불빛 아래 침묵을 지킨 채 번쩍였다.

동백은 다른 유물과 비슷한 시간을 들여 신선골의 잔해를 살피곤 남은 유물들을 찬찬히 살폈다. 대체로 전부 비슷했다. 녹슨 검, 갑옷, 그 시절 동백이 차고 다녔던 것과 비슷한 장신구와 의복.

조금은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있던 동백은 전시관의 마지막에 이르러 다른 유물들과 다르게 홀로 동떨어져 전시된 서책 한 권을 발견했다.

그것은 대부분이 불에 타 있었다. 검게 그을린 표지와 서책은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 있길 기대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유물 아래 붙은 이름을 확인했다.

<작가 미상의 일기 ― 도화의 일기

대부분이 불에 타 소실되었지만, 신선골에 대한 기록 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누가 작성하였는지 정확한 저자를 확인할 수 없으나 남은 내용에서 ‘도화’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역사학자들은 이것을 ‘도화의 일기’라 칭했다.>

도화의 일기라니.

난 일기 같은 거 쓴 적 없다고.

쓸 시간도 없었고.

툭, 유리 벽을 퉁명스레 두드린 동백은 책이 덮여 그 내용이 보이지 않음을 아쉬워했다. 적어도 한 페이지라도 펼쳐져 있었다면 읽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럼 누가 썼는지 힌트 정도라도 얻었을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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