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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25화 (26/61)

25화

신선골을 보러 온 것인데 의외의 수확을 얻었다. 비록 내용은 볼 수 없어도 이 박물관의 ‘도화’라는 이름이 어디서부터 기인하였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이 서책을 부르는 이름에서 따왔겠지.

동백은 전시관 밖으로 나오며 손에 들고 있던 안내 팸플릿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저 책을 읽어 볼 방법이 없나 고민해 봐도 마땅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동백에겐 그냥 불에 탄 책일 뿐이지만 인간들에겐 아주 오래전 남겨진 역사의 기록이니 쉬이 내주진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훔치자니…. 신선이 할 짓은 아니었다.

박물관을 나와 언덕을 내려오며 동백은 짧게 목을 울렸다. 갑자기 요즘 들어 일거리가 확 늘어난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 탓만은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확실히 늘었다. 갑자기 밀려오는 높은 파도처럼 예기치 못하게 사건에 휩쓸린 동백은 나름 평온했던 삶에서 밀려나 골칫덩이들을 하나씩 순차적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선인님!”

그는 이젠 익숙한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얌전히 기다린 듯 자오는 다소곳하게 서서 동백을 맞이했다. 심술궂은 바람이 흩트린 머리칼을 손으로 정리하며 그는 해사하게 웃었다.

“볼일은 모두 마치셨나요?”

천천히 다가온 그는 자연스레 동백의 곁에 섰다. 자오는 상냥한 표정이었으나 눈은 먹이를 물어뜯으려는 승냥이와도 같았다.

동백은 그런 자오를 빤히 응시했다.

부쩍 늘어난 일거리 중 하나가 이놈 아니던가.

귀찮고 짜증 나는데 쉬이 떨쳐낼 수 없는 커다란 짐 덩어리. 대체 자신과 어떤 관계일지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는 꼼꼼히 포장된 커다란 상자.

“그리 빤히 쳐다보시니 못난 제 얼굴이 선인님의 심미관을 해칠까 걱정이 됩니다.”

한마디 말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고 마음속엔 날카로운 비수를 품은. 곁에 두기엔 지나치게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까마귀.

게다가 이 얼마나 간장 종지만 한 마음이란 말인가.

못생겼다는 말을 마음속에 담아두었다가 기회를 잡으니 옳다구나 내뱉는 꼴을 보라지. 동백은 코웃음을 쳤다.

“못생긴 걸 이젠 알아서 다행이네. 함부로 남을 홀리려 들진 않을 테니.”

“모두 선인님이 제게 깨달음을 주신 덕분이죠.”

“그래, 살면서 두고두고 고마워하도록 해.”

비록 그 살날이 얼마나 갈진 모르겠지만.

“예, 잊지 않겠습니다.”

자오는 동백의 말속에 숨은 칼날을 알아차렸어도 공손히 답했다. 본디 그들은 이런 관계가 아니던가. 한 걸음을 다가가면 다섯 걸음을 물러서고. 살얼음이 언 빙판 위를 걸으며 상대의 발아래 얼음을 깨부수기 위한 신경전을 벌이는 그런 관계.

그러니 이것이 일상이었다.

까마귀는 이 쓸모없는 소모전을 이어가는 대신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조금이라고 캐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보다 관람은 즐거우셨나 봅니다.”

“옛 생각도 나고 좋았지.”

어차피 박물관에 갔다는 사실은 자오가 그 핸드폰이라는 것을 켜 이 근처 건물을 확인만 해도 들키는지라 동백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중요한 것은 그 박물관에서 그가 특별히 관심을 가진 물건이 무엇이냐였다.

그들이 나누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서로의 의중을 노리는 그물이 되어 드넓은 망을 펼쳤다.

“그럼 저 또한 같이 갔다면 더 좋았을 것을요.”

“지금이라도 혼자 다녀오던지.”

“하지만, 선인님이 혼자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중에 필히 둘러보지요.”

자오의 가증스러움에 동백이 비죽 한쪽 입술 끝을 올렸다. 동백을 위해 다정스레 구는 것 같아도 결국은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무엇 하나라도 놓칠까 신경을 곤두세우는 꼴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동백은 이 까마귀가 쫓아올 수 없는 곳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조금 고민하긴 했지만, 차곡차곡 쌓인 의문은 스스로 해결하지 않는 이상 누군가 정답을 눈앞에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동백이 손에 쥔 문제는 아무리 땅 위를 헤맨들 그 답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직접 찾아가야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첫 번째 계단을 밟았다.

퉁!

마치 환청처럼 공기가 진동하며 사방으로 맑은 선기를 흩뿌렸다. 동백의 눈에만 보이는 금빛 계단이 하늘 너머까지 그를 인도하며 위용을 뽐냈다.

과연 이 길이 까마귀에게도 보일지. 동백은 알 수 없었다. 제법 놀란 표정을 보아하니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여 아리송했다.

“그럼 그러던가. 난 갈 거니까.”

두 번째 계단을 오르며 동백이 살짝 손을 툭 털었다.

가벼운 손짓에 동백의 의복은 순식간에 고치를 벗는 나비처럼 화려한 날개를 활짝 펼쳤다. 가벼운 티셔츠와 바지였던 복장은 소매가 넓은 도포가 되었으며 허리에 얇은 술띠가 감겼다.

목덜미를 덮은 짧은 머리카락은 여전했으나 너무도 희어 더러운 것이 묻을까 염려되는 옷자락은 땅에 끌릴 듯 길었다.

동백은 자오의 시선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서서 그를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과연 네놈이 지금 내가 가는 곳까지 따라올 수 있겠느냔 도발이었다.

자오는 그 도발에 응하는 대신 낯에서 놀란 기색을 지우고 도리어 아쉬움을 드러냈다.

“제가 꽤 귀한 장면을 보는군요. 날개가 온전하였다면 가시는 길을 끝까지 배웅할 수 있었을 텐데요.”

저놈의 입은 죽어도 물 위에 둥둥 뜰 거다.

동백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언제쯤 돌아오실 생각입니까?”

“볼일을 마치면.”

그게 언제가 될지 동백은 상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굳이 자오에게 말해 줘야 할 이유도 없고 말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돌아올 때쯤 되면 알아서 돌아오겠단 제멋대로 식 통보에 자오는 동백이 지상에 남겨둔 것 중 가장 마음을 쏟은 존재를 언급했다.

“인간의 시간은 지나치게 짧고 함께 나눌 기쁨의 순간은 찰나와도 같죠. 안 그렇습니까.”

천천히 계단을 오르던 동백이 다시금 멈춰 서서 자오와 시선을 맞췄다. 차게 식은 시선이 마치 한겨울의 삭풍같이 자오의 목 아래 서늘한 경고의 칼날을 드리웠다.

“건방지게 굴지 마.”

“그저 잊지 않길 바라며 드린 간언입니다. 선경의 시간은 때론 너무도 빨리 흐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자오의 입이 길게 호선을 그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 틈으로 목소리가 되지 못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부디 금방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그런 자오를 두고 동백은 하늘로 올랐다. 거센 바람에 나부끼는 소매가 지상에 남겨진 날지 못하는 까마귀를 조롱하듯 부풀었다.

금세 점처럼 작아진 지상을 내려보며 동백은 금빛 길의 끝에 서서 굳게 닫힌 문을 열어젖혔다. 그저 높이 오르기만 한다면 인간이 선경을 발견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지나가다 보면 눈에 들어올 테니까.

그러나 허락받지 못한 이들은 선경의 끝자락도 눈에 담을 수 없었다. 그들의 세상을 가르는 벽을 넘어서 동백은 실로 오랜만에 선경에 발을 들였다.

땅에 불기 시작한 서늘한 바람과 다르게 선경의 바람은 따스했고 벽도화의 향취가 짙게 남아 있었다. 그 향기에서 자연스럽게 자오를 떠올렸던 동백은 미간을 구겼다.

여기까지 와서 그 망할 놈을 떠올리다니.

어디 벽도화가 자오의 것인가. 본디 선경의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곳에 너무 오랜만에 온 탓에 자오가 더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동백은 머릿속에서 맴돌던 자오를 밀어내곤 느긋하게 잘 닦인 길을 따라 걸었다. 구름이 강처럼 흐르고 높은 절벽 위 태상과 술잔을 기울였던 안양각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나저나 슬슬 올 때가 되었을 텐데.

다른 신선이라면 몰라도 태상이 선경에 온 동백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지금쯤이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달려와야 하건만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선경을 드나드는 문이 있는 곳은 선경 중에서도 외각이라 상제가 있는 천신궁까지 가려면 거리가 제법 멀었다. 하여, 태상이 오면 탈 것을 강탈하려 했건만.

조금 더 기다려 볼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강구할지 고민하던 동백은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그림자를 발견하고 픽, 가볍게 웃었다. 그의 친우가 언제 제때 시간을 맞춘 적이 있었던가. 항상 늦는 게 미덕인 것을. 그래도 지금은 날래게 달려오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태상을 등에 태운 집채만 한 범은 산을 뛰어넘고 구름의 강을 건너 순식간에 동백의 앞에 도달했다.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멈춰 선 범이 몸을 숙여 제 등에 탄 이를 바닥으로 내려주었다.

“동백!”

화려한 붉은색의 장포와 황금빛으로 꾸며진 피풍의를 걸친 태상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긴 머리칼을 단정히 하나로 묶어 틀어 올린 그는 어찌나 급했는지 다리가 꼬여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간신히 중심을 잡아 넘어지지 않은 태상은 두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네가 선경에 오다니!”

들뜬 감정을 얼굴 위로 고스란히 드러내며 양팔을 활짝 벌리고 동백을 반긴 태상이 입가로 환한 미소를 띠었다.

“이제 완전히 이곳으로 돌아온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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