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이곳을 내려가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친우가 돌아왔다는 것에 태상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야 그 길었던 지옥에 마침표를 찍은 것인가. 그러하다면 진정 연회를 열고 동백을 반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동백은 그런 태상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잠깐 할 게 있어서 온 거야.”
“……그런가.”
태상이 거품이 꺼진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러나 그는 금방 옅은 웃음을 되찾았다.
“그런데, 자네가 선경에 올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닌 듯한데.”
“…뭐.”
선경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대답을 망설이자 태상은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해 보였다.
“차마 입에도 올리지 못할 일인가?”
걱정을 얼굴 위로 가득 담은 채 태상은 동백의 손을 꼭 붙들었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내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네.”
자신을 향한 순수한 호의와 신뢰에 동백은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드리웠던 망설임을 걷어냈다.
의심할 사람이 없어 태상을 의심하다니.
“일단, 내 궁으로 가 술이나 한잔하며 이야기하는 건 어떤가.”
“어…. 오랜만에 왔으니 상제를 먼저 뵈려고 했는데.”
“상제께선 하늘의 흐름을 시찰하러 가시어 자리를 비우셨다네. 그러니 뵐 순 없을 게야.”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딱 그런 꼴이라. 상제가 자리를 비운 이상 동백이 그를 직접 찾아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꿩 대신 닭이라 하니, 상제 다음으로 선경에서의 지위가 높은 태상에게 맡기는 수밖엔 없었다.
“긴 시간을 할애할 순 없을 것 같아. 너도 알다시피 선경과 지상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니까.”
“알지, 내 어찌 모르겠나.”
엎드린 범의 등에 다시 훌쩍 오른 태상은 아래 있는 동백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서두름세.”
◆
선경에도 인간들의 도시와 같이 신선들이 모여 지내는 곳이 있었다.
상제의 천신궁을 중심으로 그 궁에 가까울수록 신선으로서 위상이 높고 강한 자라 태상의 궁은 그런 상제의 천신궁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태상을 주인으로 모시는 수백의 선녀와 선자는 거대한 범을 보자 고개를 조아려 그를 맞았다.
“술상을 봐오거라.”
자연스레 명을 내린 태상은 동백을 데리고 궁의 가장 내밀한 방으로 향했다. 평소엔 태상의 종마저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그의 거처는 금빛의 발을 내려 사방을 가려둔 탓에 조금 어두웠다. 그 어둠을 쫓듯 태상이 손을 휘젓자 방 한편에 놓인 호롱에 작은 불꽃이 일었다.
“자네가 이곳에 있다니 내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네.”
“호들갑 떨지 마.”
“호들갑이라니. 자네가 선경에 없으니 쓸쓸하더군.”
그 말을 하는 태상의 낯은 흐렸다. 반짝이는 빛을 잃어버린 듯 수심에 잠긴 얼굴은 아무리 동백이라 해도 약간의 죄책감이 일었다.
그는 동백이 하늘에 오르기도 전에 만난 인연이었다.
그 만남은 우연이었으나 동백이 신선이 될 수 있었던 건 태상의 도움이 컸다. 그가 아니었다면 동백의 혼백은 진즉 흩어져 천지를 떠도는 원혼의 악귀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한 번 이리 돌아왔으니 앞으로 더 자주 오게나. 안 그러면 날 빼앗길지도 모르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새로 사귄 친구가 있거든. 꽤 재미있는 이이지.”
조용히 발이 걷히고 작은 술상을 든 소년 선자가 소리 없이 그 상을 내려두고 물러섰다.
삿된 것에 현혹되기 쉬운 시야를 닫고 오직 자신을 이끄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청각을 곤두세우며.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으려 꽉 다물어진 입과 탐욕을 절제하여 공손히 모아진 두 손은 그들의 주인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을 내보이고 있었다.
이전엔 동백도 선경에서 지냈기에 저러한 종들이 있었다. 하지만 동백이 선경을 버렸을 때 그를 따르던 이들은 주인을 잃어버렸다.
그런 이들을 거두어 준 것 또한 태상이었다. 동백은 물러선 어린 선자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쩐지 얼굴이 익다 싶더니, 이전에 동백을 모셨던 아이 중 하나였다.
잘 지내고 있구나.
동백과 있을 땐 좀 더 어린 모습이었는데 그사이 좀 자란 모양이었다. 다시금 드리워진 발 뒤로 사라진 모습을 잠시 뒤쫓던 동백은 향긋한 내음에 저도 모르게 입술 끝을 올렸다.
“반가운 모양이야.”
“당연하지.”
오랜만에 마주한 아이가 잘 지내고 있다는 점도, 제 앞에 놓인 이 술도.
도화주(桃花酒)
선경의 끝자락에서 자생하는 벽도화의 꽃과 열매를 술로 빚어 만든 신선들의 술이었다. 오직 선경에서만 만들어지고 그 향과 풍미가 그윽하게 깊어 한 번 맛보면 다시는 잊지 못한다고 하여 인간들은 오매불망(寤寐不忘)으로도 불렀다.
“그보다 새 친구를 사귀었다고?”
태상이 따라주는 잔을 받으며 동백은 끊겼던 대화를 다시금 이어나갔다.
“그래, 자네가 놀아주질 않으니 그리하였지. 하지만 지금은 이 이야기가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내가 사귄 친구의 이야기보다 동백, 자네의 근심이 더 중한 것을.”
“…….”
“무엇이든 개의치 말고 말하게.”
작은 잔에 담긴 투명한 술을 단번에 들이켠 동백은 이상하게도 여전히 망설임을 떨치지 못한 자신을 타박했다.
태상을 믿지 않으면 대체 누굴 믿는다고 이렇게나 주저하는 것인지. 그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태상, 아무래도 선경의 누군가가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아.”
“흐음? 무엇을 말인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분명 선경과 관련이 있어.”
아직 놈의 명확한 목적도 의도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이나 동백은 단 하나의 정보만으로 자오의 의견이 옳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 있겠나.”
동백은 지난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선경의 시간은 짧았으나 아래의 시간은 얼마나 지났을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엔 명확한 시간의 흐름이라는 게 없으니 더더욱 그랬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정 걱정이라면….”
태상은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에 창 아래 굳게 닫혀있던 문갑의 문이 덜컥, 열리며 작은 물시계 하나가 쏜살같이 튀어나와 그의 손아귀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이건….”
“정확하진 않지만 땅의 시간을 대충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라네.”
그는 그 물시계를 뒤집어 술상 위에 올려두었다. 얇은 유리 안에 든 붉은 물은 약간의 점성을 띈 채 좁은 틈을 타고 천천히 한 방울씩 똑똑 떨어져 아래에 쌓였다.
“이게 아래로 다 떨어지면 대충 한 달 정도가 흘렀더군.”
“…….”
“동백?”
“이건 왜 만든 건데?”
태상은 쭉 선경에서 살아갈 존재였다. 그런 그가 왜….
“…종종 궁금할 때가 있더란 말이야. 자네가 지내는 곳의 시간은 얼마나 흘렀는지. 그래서 만들었네.”
그는 손가락 끝으로 툭툭 물시계를 건드리다 그것을 동백의 앞으로 밀어두었다.
“자! 그럼 걱정도 한결 덜었으니 한 번 이야기나 들어보지.”
톡, 톡.
물시계 안 붉은 물방울이 계속 아래로 추락했다.
마치, 누군가의 눈물처럼.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으니 서두르게나.”
태상의 재촉에 물건에 담긴 마음을 애써 모른 척한 동백은 자신이 품고 온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번에 내 터에서 어둑서니가 날뛰는 일이 있었어.”
◆
물시계의 마지막 방울이 툭, 떨어졌다.
땅 위의 시간은 그렇게 한 달이 흘렀고, 동백은 자신이 들고 온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럼 자오를 통해 요수들 사이 자네의 터를 침범하게 조장한 선동꾼의 존재를 알았고, 나중에 어둑서니를 심문해 선경이 관계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말이군.”
“맞아.”
“하지만 그는 요수인데, 정녕 믿을 수 있는 말인 건가?”
“적어도 어둑서니는 거짓말을 하는 기색이 아니었으니까. 까마귀를 믿은 게 아니라 내가 본 걸 믿은 거야.”
“흠….”
태상이 고민하듯 낮은 침음을 내며 목을 울렸다. 거의 비워지지 않은 술잔 속 술이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듯 그의 얼굴을 비췄다. 그러나 곧 그 표정은 단호하고 차가운, 상제를 대리하는 선경의 두 번째 하늘의 표정으로 탈바꿈했다.
“난 자넬 믿네.”
단단한 신뢰가 주는 안정감이 동백을 떠받들었다.
“조금의 의심이라도 생길 여지가 있다면 분명히 조사를 해 봐야 하겠지.”
“고마워.”
“마땅히 해야 할 일에 감사 인사를 듣고 싶진 않으니 술이나 한잔 더하고 가게.”
태상의 권유에 동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시선이 이미 붉은 방울을 모두 떨어트린 물시계에 닿았다. 이 짧은 시간에도 지상의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다.
아래는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아마 조금 더 흘렀으리라.
…….
결코, 자오의 말이 신경 쓰여서가 아니다.
본디 동백은 이호영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까.
동백은 늘어지는 옷자락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상의 궁에서 선경을 벗어나는 문까지 가려면 바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그런 동백을 따라 태상이 몸을 일으켰다.
“왜 일어나?”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친우의 가는 길인데, 끝까지 배웅해야 할 것 아닌가.”
태상이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그린 것 같은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그의 말에 동백은 아주 자연스럽게 자오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날개가 온전하였다면 가시는 길을 끝까지 배웅할 수 있었을 텐데요.’
분명 취지가 비슷한 말인데도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라 이리도 다르게 들리다니.
궁의 마당으로 나온 태상은 다시금 집채만 한 범을 작은 휘파람으로 불러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