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윤기 나는 주홍색 털가죽에 멋들어지게 새겨진 검은 줄무늬와 위풍당당한 풍채. 그리고 까만 귀 뒤 귀엽게 찍힌 하얀 반점이 누가 봐도 ‘나 호랑이요’ 하는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 왔을 때처럼 몸을 숙여 두 사람을 태운 범은 다시금 산을 넘고 구름의 강을 건너 지상과 연결되는 문이 있는 선경의 외각에 순식간에 다다랐다.
굳게 닫힌 문을 확인한 동백이 범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찰나의 꿈과 같은 복귀였으나 이젠 다시 그가 사는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갈게.”
덤덤하고 짧은 인사를 남긴 동백이 막 문을 열어젖히려 했을 때였다.
“동백.”
그는 태상의 부름에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다시 선경에 올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호범이를 데려가게.”
제 이름이 불리자 커다란 범의 귀가 짧게 파닥였다.
“글쎄…. 다시 올 일이 있을까?”
“세상일은 아무리 신선이라 한들 모르는 법이지. 다시는 선경에 오지 않겠다고 한 자네가 지금 여기 있듯이.”
그럴듯한 태상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동백은 거대한 호범과 시선이 마주치곤 미간을 살포시 접었다.
보통 호랑이 크기라도 난리가 날 텐데, 호범은 커도 너무 컸다. 아무리 동백의 능력이라도 사람들의 인지 범위를 아득히 벗어나면 그걸 자연스럽게 여기게 만들긴 힘들었다.
태상의 제의는 고맙지만 거절할 생각이었던 동백은 순식간에 크기를 줄여 제 다리에 얼굴을 비비적대는 호범을 기막힌 얼굴로 쳐다봤다.
“이 정도면 문제없겠지.”
“근데, 고시원은 애완동물 금지야.”
고양이만 해진 호범을 번쩍 들어 올린 동백은 마치 애교를 부리듯 꼬리를 살랑이는 호랑이를 턱, 옆구리에 꼈다.
“데려가도 길바닥에서 자야 할 텐데 괜찮아?”
“본디 짐승은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존재이니 상관없지 않겠나.”
주인의 말에 호범이 불만스럽다는 듯 짧게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 울음에 태상은 동백이 떠나기 전 한 가지 더 덧붙여 말했다.
“가끔 특식이나 좀 챙겨주게.”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동백은 호범을 옆구리에 낀 채 문을 활짝 열었다. 도화 향기가 가득한 선경의 바람 사이로 거세고 차가운 지상의 바람이 섞여들었다.
문을 넘어 선경을 벗어나려던 동백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다시 태상을 향해 물었다.
“태상, 혹시 까마귀가 잘랐다던 날개가 어느 쪽인지 알아?”
“자오라면….”
태상은 자신의 기억에 또렷이 남은 광경을 다시금 되새겼다. 피와는 어울리지 않는 선경에 선연히 흩뿌려진 붉은 흔적과 제 날개를 스스로 잘랐음에도 고통 한 번 내비치지 않던 짐승.
“……이네.”
귓가를 스치는 거센 바람 소리에 태상의 목소리가 묻혔지만, 동백은 달싹이는 입술을 읽어냈다.
“그래.”
마지막으로 원하는 답을 얻어낸 동백은 다시금 문을 넘어섰다. 아래로 뻗은 금빛 계단을 지르밟으며 그는 오래전 선경을 떠났을 때처럼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습관처럼 자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둑한 어둠이 깔린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위로 점처럼 보이는 비행기가 가로질렀다. 밤처럼 까만 눈동자는 텅 빈 하늘에서 보이지 않는 자취를 쫓았다.
이런다고 동백이 돌아오는 건 아니었으나 기다림은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을 하늘로 이끌었다.
딱히 동백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미운 정도 정이라고 곁이 비자 묘하게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형 오늘도 안 왔어요?”
동백이 자리를 비운 사이 오디션에 붙어 고된 연습을 마치고 돌아온 호영이 고시원 앞에 멀거니 서 있는 자오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동백이 선경으로 간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시간.
이호영은 며칠 동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크게 대수로워하지 않았다. 매번 그랬듯 당연히 돌아올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게 일주일이 되고, 이주, 삼 주가 되자 이호영은 패닉에 빠졌다. 호영은 동백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니냐며 자오를 붙잡고 벌벌 떨었다.
자오는 솔직히 말해 이호영이 몹시 귀찮았다.
동백만 아니라면 이런 인간과 대화를 나누지도, 얽히지도 않았을 텐데. 대체 무엇이 그리 특별하여 얼음 같은 마음을 지닌 그 신선의 애정을 얻어낸 걸까.
가느스름하게 뜨인 눈으로 호영을 바라보던 자오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이호영을 다독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금방 돌아오실 겁니다. 저와 그리하기로 약속하셨으니까요.”
뭐, 입 밖으로 소리 내 약속하진 않았어도 동백이 최대한 빨리 돌아오려 할 거란 건 사실이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자오의 말에 이호영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우물쭈물 망설였다.
“…….”
살짝 볼을 부풀리고 고개를 푹 숙였던 이호영은 금방 표정을 가다듬고 활짝 웃었다.
“그럼 다행이네요. 전 오늘 너무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 볼게요.”
자오는 멀어지는 이호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순간 일그러진 표정에 분명 다른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제 감정을 추스르는 게 아주 제법이었다.
그저 해맑게 실실 웃고 다녀도 보통은 아니라는 건가.
과연 동백이 마음을 쓰는 사람다웠다.
“그래도 애 보기는 사양이니 어서 돌아오시죠.”
까마귀는 들을 이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상대를 파헤치는 것도 정작 그 상대가 없어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동백이 마지막으로 들렀던 도화 박물관은 벌써 세 번이나 방문한 차였다. 인간을 홀려 살펴본 박물관의 CCTV엔 그날 동백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동백은 입구로 들어와 안내 팸플릿을 집고 그것을 살펴보며 자오에겐 귀하게 느껴지지 않은 녹슬고 케케묵은 물건들을 평이하게 돌아보았다. 물건을 들여다본 시간은 일정했고 표정은 덤덤했다. 그를 지극히 의식한 태도였다.
까마귀는 CCTV의 화면을 보며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자신도 왜 웃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당혹스러웠다.
그저 이 상황이 유쾌하게 느껴졌다.
다시 떠올린 자오의 입가에 절로 웃음이 서렸다. 그런 동백의 노력이 무색하게 자오는 박물관에서 동백이 관심을 가졌을 만한 물건 두 개를 추려냈다.
아마 동백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의 노력이 무색하게 금방 들킬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걸.
그런데도 동백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숨겼다.
어쩌면 너무 쉽게 답을 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 고시원 앞을 우두커니 장승처럼 지키던 남자는 살그머니 눈을 떴다.
“오늘 제가 운이 좋군요.”
옆구리에 웬 작은 호랑이를 낀 동백이 삐딱하게 서서 자오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자오는 그 누구보다 먼저 동백을 반기며 두 눈을 휘었다.
한 달 하고도 일주일 만의 귀환이었다.
◆
뭐? 운이 좋아?
동백에겐 운이 나쁜 날이었다.
돌아오자마자 저 면상을 가장 먼저 보게 되다니.
자오는 눈웃음을 치며 동백을 반겼다. 왜 이런 시간에 고시원 앞에 장승마냥 서 있던 건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쯧!
동백이 혀를 차며 옆구리에 끼고 온 호범을 놓아주었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땅에 내려선 호범은 몸을 앞으로 숙이고 털을 곤두세웠다. 제법 사납게 목을 으르렁 울리는 게 작아져도 범다운 기개가 엿보였다.
단지, 상대가 나빴을 뿐이었다.
동백은 자오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적의를 보이는 호범을 툭 쳐서 제 다리 뒤로 보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범은 까마귀 무서운 줄 몰랐다.
호범이 아무리 영물이라 해도 자오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동백이 데려온 짐승이라도 그의 자비가 호범에게까지 닿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호범은 태상의 수족인데 자오의 손에 죽으면 무슨 낯으로 태상을 보냔 말이다. 적어도 다시 돌려보낼 때까진 몸 성히 지내다 가야 했다. 자꾸만 튀어 나가려는 호범을 발로 툭툭 밀치며 동백은 자오에게 당부했다.
“이놈은 죽이면 안 된다?”
“…….”
“불구로 만드는 것도 안 돼.”
“저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표정에 다 쓰여 있었어.”
동백의 말에 자오가 제 얼굴을 매만졌다. ‘정말 그랬나?’라는 의문이 서렸던 표정은 금방 능글맞은 미소를 되찾았다.
“그보다 선경에 다녀오신다더니 새로운 애완동물을 들이셨군요. 저로는 부족하셨던 걸까요?”
순간 동백은 의도치 않게 목줄을 맨 자오를 떠올렸다.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 위로 단단히 매인 붉은 가죽 목걸이와 그 목걸이에 연결된 체인을 늘어트린 채 자신을 향해 눈웃음치는 자오.
…….
동백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쩐지 속이 좋지 못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너무 속세에 물든 것 같았다. 상상해도 어떻게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었는지. 동백은 머리를 흔들어 생각하기도 싫은 장면을 훌훌 날려 보내곤 깐족거리는 자오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듣기만 해도 역겨운 소리는 집어치우고 별일 없었어?”
“별일이야 많았죠.”
한 번은 꼭 딴지를 걸어야만 만족하는 자오의 대화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동백은 그다음 말을 차분히 기다렸다.
“무엇이 궁금하신지요?”
“선동꾼.”
많은 것을 보고 듣는 까마귀는 기꺼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동백에게 내어주었다.
“조용합니다. 다시 나타났단 이야기는 들리지 않더군요.”
과연 그것을 믿을 수 있는가는 순전히 동백이 판단할 몫이었기에 자오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살며시 눈웃음쳤다.